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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민 스님 Mar 26. 2019

따뜻한 등불 같은 기억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큰 집에서만 살다가 낯선 서울의 변두리 동네로 이사 와 ‘한 지붕 세 가족’의 단칸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니 처음엔 많이 무섭고 힘들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족의 범위가 부모님을 비롯해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사촌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종종 방문하는 친지들로 넓었는데, 서울에 오니 비좁아진 집만큼이나 서로를 챙겨주는 가족의 범위가 좁아졌다는 점이 나를 외롭고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의 엄마 모습은 결혼 생활과 함께 시작된 시집살이로 어린 내 눈에도 편안해 보인 적이 없었다. 시부모님 눈치를 보며 그 많은 식구를 위해 집안일을 하셔야 했으니 항상 바쁘고 긴장한 모습이셨다. 어린 나는 그런 엄마보다는 더 여유가 있고 더 행복해 보이는 고모나 삼촌과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도 처음 몇 년간은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있으셨는데 특히 살림만 하셨던 엄마는 예전보다 시간적으로는 여유로워졌지만, 서울 생활을 특별히 즐기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다만 나와 내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엄마는 항상 삶은 옥수수나 소보로빵 같은 간식을 준비해놓으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엄마에게 낮 시간 동안의 가장 즐거운 일거리이지 않았나 싶다.


간식거리가 떨어지면 엄마와 나는 이런저런 물건도 살 겸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집에서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안에는 새로 생긴 큰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동네 구멍가게와는 달리 평소 볼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엄마와 같이 장을 보러 걸어가는 동안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렇게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제법 무거운 장바구니를 엄마와 나눠 들곤 했는데 맏이로서 엄마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한집에서 살고 매일 얼굴을 보는 가족이지만 그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와 밖에서 따로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나이가 어린 아이의 경우, 엄마나 아빠 한 사람과 따로 밖에서 만나 무언가를 같이하면서 아이의 말을 관심 있게 잘 들어주는 것은 아이에게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지금은 누가 나에게 쇼핑하러 같이 가자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도망가겠지만 어렸을 때 엄마와 슈퍼마켓을 돌며 물건들을 구경하는 일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당시 내 눈에 슈퍼마켓은 진기한 물건들로 가득한 화려하고도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그런 좋은 물건들을 보는 동안에는 현실의 가난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끔 외국 영화에서나 봤던 신기한 먹거리를 발견하고 좋아할 때면, 엄마는 다른 것들보다 가격이 좀 더 비쌌지만 기꺼이 사주시곤 했다.

한번은 잉글리시 머핀을 보고 어떻게 먹는 건지도 모르고 무조건 샀다. 빵이니까 당연히 소보로빵처럼 달콤하고 맛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입 베어 문 그 차가운 빵은 텁텁하고 맛이 없었다. 잉글리시 머핀은 토스트를 해서 버터나 잼을 발라 먹어야 맛있다는 것을 안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또 한번은 레몬을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와 귤처럼 까먹으려다가 잘 까지지도 않고 맛도 너무 시어서 그냥 버렸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경우도 있는데 팝콘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옥수수 재료를 사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팡팡 튀겨진 팝콘을 동생과 함께 정신없이 먹었을 때다. 참 맛있고 행복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부모님은 단칸방 생활을 정리하고 방 두 칸짜리 월세로 집을 옮겼다. 자연스레 엄마와 같이 장을 보러 가는 시간도 사라졌지만, 다행히 엄마는 아버지나 자식들을 위하는 시간이 아닌, 엄마만의 삶을 수영과 같은 운동을 통해 찾으셨다. 결혼 전 해군을 나온 아버지 수영 실력에 반하셨다는 엄마는 막상 몇 년 당신이 수영을 배우고 나서 보니 아버지 수영 실력이 동네 도랑에서 막 배운 기본기 없는 수영이었다며 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미국에서 교수로 일할 때 한국에서 들어온 원고 청탁을 거칠고 부족한 솜씨임에도 응한 이유는 글쓰기가 승려로서의 삶을 깊이 관조하고 나를 탁마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 나가 생활하며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한 죄송함과, 덜컥 승려가 되어 더욱 먼 길을 떠나버린 아들로서의 죄송함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승려가 되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아들의 글이 신문이나 잡지의 작은 지면에 실리는 것을 먼 곳에서 부친 편지 기다리듯 기다리셨다.

내가 어느덧, 아이 둘 데리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었다. 일요일 법회가 끝나고 사찰의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보니 엄마와 장 보러 같이 걸었던 행복했던 시간이 문득 떠오른다. 이런 소소하지만 행복한 기억은 살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볼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따뜻한 등불이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순간순간 행복했던 기억의 힘으로 살아간다.


_혜민 두 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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