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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Vada Sep 26. 2024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나의 첫 이민 이야기 3회

 하지만 6개월 동안 닭을 키우시던 부모님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에 두손 두발을 다 들으셨다. 무슨 일인지 닭들이 어느 날부터 살이 찌지 않았고 2킬로가 돼야 마켓에 납품을 할 수 있는데 닭들의 크기가 고작 1킬로 반 정도의 크기여서 어디다 제대로 팔 수가 없었다. 닭은 6개월 안에 얼른 팔아야 하는데 시간만 가고 닭들에게 주는 사룟값은 점점 더 들어가서 아버지는 결국 결단을 내리셨다. 남아있는 오백여 마리 정도의 닭들을 몽땅 식당에 반값으로 넘긴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본전도 못 찾고 닭 농장을 철수 하고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셨다.


아버지가 닭에 매달리는 동안 엄마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았다. 넓은 터에다가 고추와 배추, 무등을 심으셨다. 그 붉은 토지를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줘서 일궈낸 싱싱한 야채들은 다행히 닭들에 비해 알찼다. 집에서 버스로 2시간을 가면 한국인들이 모여있는 도시가 있었는데 우리는 가방에 여기저기 싣고 야채를 팔러 갔었다.


그 당시는 특히 풋고추가 인기가 많았다. 한국에서 바로 가져온 씨앗이라 그런지 맵기도 하고 길쭉하니 잘 자라서 도시에서 옷 가게를 하시던 한국인 가정들이 서로 앞다투어 구입해 주셨다.


나는 그 산타페에서 살던 시절들의 사진들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 한 장 안 찍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모습이 얼마나 시커멓고 촌스러웠을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나름 주말마다 야채를 가지고 산타페 도시로 나가면 멋 부린답시고 긴치마를 입고 큰 가방을 들고 시골 장거리 버스정류장에 서 있곤 했었다. 동양 사람이 별로 없는 그 도시에서 야채 팔러 다니는 내 모습이 어땠을까? 아무래도 내 촌스러운 모습에 한국 아줌마들이 그렇게 구입해 주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야채를 빌미로 도시 구경도 가끔 할 수 있어서 즐거웠었다. 엄마가 준 용돈으로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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