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그 소설책은 닳고 닳을 정도로 읽었다.
나는 언제나 스칼렛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책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름)이 되어서 ‘내일은 또 다른 내일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마지막 대사를 읊조렸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 가서 내 이름도 비비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에 나온 여주인공 이름)으로 지었다. 스칼렛은 좀 성격이 드세 보이지만 그나마 입에 쫙 붙는 비비안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당시는 내 성이 김씨여서 거부감이 안 들었는데 살다 보니 내가 이 씨랑 결혼하게 된 것이다.
결혼 후 직장에 다니면서 이름이 뭐냐고 할 때 “저는 비비안 리입니다.”라고” 라고 하면 다들 킥킥댔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이름을 결혼 후 바꿀 수는 없어서 항상 그 이름을 말한 뒤 언제나 구구절절 설명을 해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처녀 때에 비비안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우연히 이 씨와 결혼하면서 ‘비비안 리’가 되었네요.”
시민권을 받을 때 '비비안 리'로 합법적으로 되는 게 살짝 창피한 것 같아서 외국 이름으로 싹 바꾸지는 못했지만, ID를 빼고는 그 외 누구랑 만나도 나는 비비안이라고 당당히 소개 한다. 이제는 구구절절 설명 없이 이름 만 밝힐 수 있다.
훗날 나는 딸을 낳아서 이름을 ‘발레리’라고 지었는데 킥킥대던 그 친구가 다시 한번 놀렸었다. 딸은 나 씨에게 시집을 보내서 발레리나로 만들어 보란다. 물론 어렸을 때 몸매 좋아지라고 발레도 시킨 적은 있지만 아직 24살인 딸이 정말 나 씨를 만나서 이름만은 '발레리나'가 될 수 있으려나?
그렇게 ‘레트 버틀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책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을 상상하며 내 산타페 시골 생활은 어느 날은 무지갯빛이 됐다가 또 어느 날은 구름 낀 날이 되었다가 하면서 9개월의 길다면 긴 시간을 마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고 1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시골에서는 도저히 학교에 다닐 중학교를 다닐수 없어서였고 또 이것저것 손대 보시다가 성공을 못 하신 아버지가 계속 자신감을 잃어 가시자 씩씩한 엄마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도시로 이주해서 리커스토어라도 차려보자고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역시 엄마의 추진력으로 우리는 그 황망한 시골 생활을 철수할 수 있었다.
산타페를 떠나는 날 다시 이민 가방 2개로 내 모든 살림을 담아 쌀을 싣고 가는 큰 트레일러 트럭에 몸을 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한국인 마켓에게 쌀을 운반하는 그 트럭의 뒷자리에 몸을 싣고 우리 가족은 이주할 수 있었고 장장 8시간의 긴 시간을 지나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 후 그 시골 쪽을 바라본 적도 없다고 생각한 적도 없이 오랜 시간을 앞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미나리’라는 영화는 분명 영향력이 있어 보인다. 나 같은 시골뜨기 출신 말고도 미국 전체의 이민자들이 공감한다니 신기하기도 하다. 이민 생활에서 아버지의 선택이 탁월하지 못하다면 엄마의 플랜 B가 더 주목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터전을 옮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조금씩 자리를 잡으며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을 조금씩 번 부모님은 한국으로 재이주하셨고 나는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재이민 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14년을 살았지만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다.
당시의 그런 세월이 우리에게 놓여 있었고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87년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면 멋지고 깊이 있게 그리고 싶다. 내 인생의 쓰고 단맛을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시간들이 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