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타페 생활을 묵묵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짝사랑하던 친구가 한국에 있어서 였다. 그 당시 그 친구에게 가끔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었는데 그 편지 안에는 너무 판타지가 많이 섞여 있었다. 내 상상의 나래에는 그 친구와 나중에 인연이 이어져 그가 나를 보러 아르헨티나로 놀러 와서 이 시골집과 그 편지 내용에 적혀있던 것들을 다 보여주고 싶었었다. 나는 3~4장에 이르는 편지를 써서 보냈었지만, 그 친구의 짤막한 단 1장의 답장을 받아도 나는 뛸 듯이 기뻤고 행복했었다. 아마 그때부터 였으리라, 나는 말이 많은 남자보다 할 말만 하고 짧게 대답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 말에 진심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뚝뚝한 사람들의 장점은 그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그 친구의 답장이지만 그 당시는 아마 매일 읽고 또 읽었으리라. 거의 달달 외웠을 구절들이었는데 세월이 약인 건지 지금은 첫 줄조차 기억이 안 난다.
10년 후 나는 20대 중반이 돼서 한국을 방문한 적 있었는데 내 친한 친구의 오빠이기도 한 그 짝사랑을 드디어 다시 만난적이 있었다. 짝사랑한 기간은 산타페 살던 기간을 전후로 아마 4~5년은 됐을 텐데 그를 보자 나는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그리워하고 짝사랑하던 상대는 바로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내가 즐겨 읽던 소설 속 주인공의 장점을 다 뽑아낸 모습에 얼굴은 분명 그였지만 도무지 20대가 되어 다시 얼굴을 마주했을 때 확연히 틀린 그의 모습에 나는 얼른 짝사랑에 대한 추억마저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30년이 지나 세월을 되돌아보니 나에게 그런 짝사랑의 상대는 편지를 쓰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지금의 나로 탈바꿈해 준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다 내 소중한 보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