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들을 낳고 이민을 오고 새 직장 생활을 하고 새 집도 사고.. 그렇게 한 10여 년의 시간을 숨 없이 달려왔다.
아이들이 어느덧 엄마를 찾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아마도 혼자서 샤워도 할 수 있고 잠도혼자 잘 시기가 그때쯤 인듯하다) 남편도 배 나온 아저씨가 돼있다 보니 더 이상 예전처럼 설렘이 없었다.
그 시절 내가 힐링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온 가족이 다 자고 난 후 10시부터 한 두어 시간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
드라마는 시작을 하면 한두 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해서 시작을 못하고 보통 재미있는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원래 어려서는 소설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게 나의 꿈이었을 정도였는데 나이가 들고 핸드폰이 점점 활성화되어가니 점점 동영상 쪽으로 눈길이 갔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게 사람마다 관점이 틀려서, 인기가 많다고 해서 찾아보면 나에게는 시시할 때도 있었다. 오히려 생각 없이 찾아본 영화가 잔잔하니 울림이 강한 영화가 나는 더 좋았다.
한동안 뭘 보았는지 남기고 싶어서 인스타그램도 따로 계정을 따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딱히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수만 개의 새 영화들이 즐비하고 있지만 그 풍족함에서도 잘 찾지 못하고 결국 다큐멘터리를 클릭하고 있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볼 영화가 없을 때면 친구들이 보라고 권해주는 드라마를 시작했다. 마침 금요일 저녁이면 그날부터 정주행 해서 주말 동안 어느 정도 친구들이 보고 있는 회차까지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드라마가 "힐러"였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등을 집필한 송지나 작가가 쓴 드라마라서 더 와닿았다.그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지창욱"이라는 남자 배우는 내 무던한 삶이 다시 두근두근 뛰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몇 번을 돌려보다가 그의 행적을 찾아 예전 드라마도 챙겨 보았다. 바로 전에는 "기황후"라는 사극에도 출연했었는데 이 드라마 역시 너무 재미있었다. 예전 같으면 드라마가 끝나는 동시에 그 배우로부터 멀어졌는데 '지창욱'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내 관심이 더 뜨거워져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찾게 되는 소위 덕후가 돼버렸다.
하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의 덕후생활이란 가드라인이 있어 도통 열심히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팬들을 그를 보러 공항에도 가고 그가 한참 출연 중인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있는데 나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에이, 그냥 이 팬질도 그만둘까 부다. 살짝 그 뜨거움이 식을 만할 때 그가 의류 촬영과 브랜드 런칭쇼에 참여하러 LA에 온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야호! 를 외쳤다.
엘에이 한인타운 한복판에 있은 Line Hotel에서 과연 그를 직접 만나 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촬영한다는 브랜드를 서치하여 보았다. LA의 패션디스트릭에서 여성의류로 성공한 한국 비즈니스 부부가 지창욱을 새로 론칭되는 남성스트리트 브랜드에 모델로 발탁한 것이다.
하지만 초대권을 받은 사람들만 그 쇼에 참가할 수 있었고 나는 다시 포기하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 브랜드에 대한 해시태그를 타고 타고 찾아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그 런칭쇼에 서 DJ를 하게 될 분의 인스타그램을 알게 됐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교회 권사님의 막내아들이었다!
그 권사님과 함께 성경공부 할 당시 막내아들이 걱정이라고 밤만 되면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이가 바르게 인도되기를 기도부탁한다 하셨다. 아들이 셋이라면서 가족사진을 보여줬었는데 우리가 그리 걱정했던 막내는 소위 엘에이 바닥에서 아주 잘 나가는 DJ였다. 유명한 한국 랩가수들이 오리지널 감성으로 새 곡을 만들고 싶을 때 어김없이 이 DJ를 찾고 노래들이 다 새로운 음향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DJ아들을 가진 권사님에게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고 인사도 드리고 부탁도 할 겸 바로 연락드렸다. 권사님은 나의 부탁에 하하 웃으시며 흔쾌히 응하셨고 DJ아들은 내 이름을 기억해 뒀다가 입구 직원들에게 귀띔해 놓아서 런칭쇼에DJ이름을 팔았더니 순수히 입장시켜주었다!
나 혼자 가는 건 너무 후달렸기에 친구를 데리고 둘이 갔다. 마침 그 친구도 나랑 비슷하게 "힐러" 드라마를 보았고 나처럼은 아니지만 "지창욱"에게 호감이 간다고 했다.
두 아줌마가 그런 시끌시끌한 런칭쇼에 들어가 보니 살짝 그들의 표정에서 "이 아줌마들 뭐야?" 하는 거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우리를 사장부부의 먼 인척으로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니 저쪽에서 후광이 넘치는 보살 같은 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정말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자그마한 얼굴에 큰 눈코입이 어찌 저리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혀 있는지 봐도 봐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를 계속 따라다니며 어떻게 든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싶었다.
신제품 런칭쇼가 다 끝나고 그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를 엿보아서 얼른 다가가 내 핸드폰을 건네며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사인을 해주었고 바로 이때다 싶어서 내 친구 옆구리를 쿡 찔렀더니 친구가 "인증샷도 부탁드려요~" 하며 애교 섞인 말투로 부탁했다. 우리 같은 아줌마들을 많이 봐왔으리라~ 그는 순순히 다 찍어주고 악수까지 해주었다!
"지창욱씨, 감사해요! 언제나 응원할께요!"
나의 이런 극성에 남편은 두 손 두 발 다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위태위태해 보였는지 자기도 나름 인터넷에서 지창욱을 찾으며 그의 행적을 뒷조사했다. 그러더니 참 바른 청년일세! 하며 이 팬덤와이프의 행동을 조금은 봐주었다.
그렇게 몇 년 바짝 그의 덕후 활동을 하며 나는 난생처음 유튜브도 만들어보고 나름 2십만 구독을 돌파해서 구글에서 $200 체크도 받아 보았다.아이들에게도 "엄마 이제부터 유튜버 야!"하고 자랑도 했다. 그와중에 우리아들은 자기 친구들에게도 떠들어댄건 비밀!
그런 즐거운 추억거리를 여기 브런치에 공개하려니 좀 쑥스럽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힘들었던 결혼생활 그리고 숨차게 지나온 내 인생의 작은 돌파구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다 예전얘기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그때의 감정은 다시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난 행복했기에 그리고 팬심을 다했기에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