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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Vada Oct 01. 2024

굴곡 있는 고개를 누구와 함께 건널까

팬덤시절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들을 낳고 이민을 오고 새 직장 생활을 하고 새 집도 사고.. 그렇게 한 10여 년의 시간을 숨 없이 달려왔다.


아이들이 어느덧 엄마를 찾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아마도 혼자서 샤워도 할 수 있고 잠도 혼자 잘 시기가 그때쯤 인듯하다) 남편도 배 나온 아저씨가 돼있다 보니 더 이상 예전처럼 설렘이 없었다.

그 시절 내가 힐링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온 가족이 다 자고 난 후 10시부터 한 두어 시간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

드라마는 시작을 하면 한두 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해서 시작을 못하고 보통 재미있는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원래 어려서는 소설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게 나의 꿈이었을 정도였는데 나이가 들고 핸드폰이 점점 활성화되어가니 점점 동영상 쪽으로 눈길이 갔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게 사람마다 관점이 틀려서, 인기가 많다고 해서 찾아보면 나에게는 시시할 때도 있었다. 오히려 생각 없이 찾아본 영화가 잔잔하니 울림이 강한 영화가 나는 더 좋았다.

한동안 뭘 보았는지 남기고 싶어서 인스타그램도 따로 계정을 따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딱히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수만 개의 새 영화들이 즐비하고 있지만 그 풍족함에서도 잘 찾지 못하고 결국 다큐멘터리를 클릭하고 있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볼 영화가 없을 때면 친구들이 보라고 권해주는 드라마를 시작했다. 마침 금요일 저녁이면 그날부터 정주행 해서 주말 동안 어느 정도 친구들이 보고 있는 회차까지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드라마가 "힐러"였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등을 집필한 송지나 작가가 쓴 드라마라서 더 와닿았다. 그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지창욱"이라는 남자 배우는 내 무던한 삶이 다시 두근두근 뛰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몇 번을 돌려보다가 그의 행적을 찾아 예전 드라마도 챙겨 보았다. 바로 전에는 "기황후"라는 사극에도 출연했었는데 이 드라마 역시 너무 재미있었다. 예전 같으면 드라마가 끝나는 동시에 그 배우로부터 멀어졌는데 '지창욱'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내 관심이 더 뜨거워져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찾게 되는 소위 덕후가 돼 버렸다.


하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의 덕후생활이란 가드라인이 있어 도통 열심히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팬들을 그를 보러 공항에도 가고 그가 한참 출연 중인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있는데 나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에이, 그냥 이 팬질도 그만둘까 부다. 살짝 그 뜨거움이 식을 만할 때 그가 의류 촬영과 브랜드 런칭쇼에 참여하러 LA에 온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야호!  외쳤다.

엘에이 한인타운 한복판에 있은 Line Hotel에서 과연 그를 직접 만나 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촬영한다는 브랜드를 서치하여 보았다. LA의 패션디스트릭에서 여성의류로 성공한 한국 비즈니스 부부가 지창욱을 새로 론칭되는 남성스트리트 브랜드에 모델로 발탁한 것이다. 

하지만 초대권을 받은 사람들만 그 쇼에 참가할 수 있었고 나는 다시 포기하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 브랜드에 대한 해시태그를 타고 타고 찾아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그 런칭쇼에 서 DJ를 하게 될 분의 인스타그램을 알게 됐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교회 권사님의 막내아들이었다!

그 권사님과 함께 성경공부 할 당시 막내아들이 걱정이라고 밤만 되면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이가 바르게 인도되기를 기도부탁한다 하셨다. 아들이 셋이라면서 가족사진을 보여줬었는데 우리가 그리 걱정했던 막내는 소위 엘에이 바닥에서 아주 잘 나가는 DJ였다.  유명한 한국 랩가수들이 오리지널 감성으로 새 곡을 만들고 싶을 때 어김없이 이 DJ를 찾고 노래들이 다 새로운 음향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DJ아들을 가진 권사님에게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고 인사도 드리고 부탁도 할 겸 바로 연락드렸다. 권사님은 나의 부탁에 하하 웃으시며 흔쾌히 응하셨고 DJ아들은 내 이름을 기억해 뒀다가 입구 직원들에게 귀띔해 놓아서 런칭쇼에 DJ이름을 팔았더니 순수히 입장시켜 주었다!


나 혼자 가는 건 너무  후달렸기에 친구를 데리고 둘이 갔다. 마침 그 친구도 나랑 비슷하게 "힐러" 드라마를 보았고 나처럼은 아니지만 "지창욱"에게 호감이 간다고 했다.

두 아줌마가 그런 시끌시끌한 런칭쇼에 들어가 보니 살짝 그들의 표정에서 "이 아줌마들 뭐야?" 하는 거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우리를 사장부부의 먼 인척으로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니 저쪽에서 후광이 넘치는 보살 같은 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정말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자그마한 얼굴에 큰 눈코입이 어찌 저리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혀 있는지 봐도 봐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를 계속 따라다니며 어떻게 든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싶었다.

신제품 런칭쇼가 다 끝나고 그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를 엿보아서 얼른 다가가 내 핸드폰을 건네며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사인을 해주었고 바로 이때다 싶어서 내 친구 옆구리를 쿡 찔렀더니 친구가 "인증샷도 부탁드려요~" 하며 애교 섞인 말투로 부탁했다. 우리 같은 아줌마들을 많이 봐왔으리라~ 그는 순순히 다 찍어주고 악수까지 해주었다!

"지창욱씨, 감사해요! 언제나 응원할께요!"

나의 이런 극성에 남편은 두 손 두 발 다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위태위태해 보였는지 자기도 나름 인터넷에서 지창욱을 찾으며 그의 행적을 뒷조사했다. 그러더니 참 바른 청년일세! 하며 이 팬덤 와이프의 행동을 조금은 봐주었다.


그렇게 몇 년 바짝 그의 덕후 활동을 하며 나는 난생처음 유튜브도 만들어보고 나름 2십만 구독을 돌파해서 구글에서 $200 체크도 받아 보았다. 아이들에게도 "엄마 이제부터 유튜버 야!"하고 자랑도 했다. 그와중에 우리아들은 자기 친구들에게도 떠들어댄건 비밀!

그런 즐거운 추억거리를 여기 브런치에 공개하려니 좀 쑥스럽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힘들었던 결혼생활 그리고 숨차게 지나온 내 인생의 작은 돌파구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다 예전 얘기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그때의 감정은 다시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난 행복했기에 그리고 팬심을 다했기에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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