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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Sep 08. 2021

4년 차 일기쟁이의 유쾌한 일기 쓰기

끄적이다 보면 너도 곧 빠져들 거야


나는 4년째 일기를 쓰고 있는 아마추어 '일기쟁이'다.

일기를 쓴다고 하면 많이들 신기해한다. '공대 출신' '20대'라는 타이틀이 한술 더했으리라. 수업 필기도 태블릿 PC에 미리 다운로드한 교재에 전용 펜으로 하는 시대다. 종이 위에 볼펜으로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일기를 쓰는 행위가 이제는 영 낯선 모양이다. 나도 일기를 쓰지 않은 시간이 훨씬 많다. 고등학생 때 까지는 매일매일이 똑같아서, 대학생 때는 밤에 일기 쓸 기운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놀아서. 그렇지만 4년째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많은 사람들 특히 내 또래에게 일기 쓰기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사실 일기를 쓰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면 완전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직접 써보면서 일기 쓰기의 여러 장점을 발견했고, 자칭 영업왕으로서 아래 글을 읽는 당신이 일기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길 바라본다. 

 


좋은 점 1.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 


몇 년 전 우울증으로 잠시 정신과에 다닌 적이 있다. 처음 병원에 방문한 날, 의사 선생님에게 속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펑펑 울었다. 한바탕 하고 집에 왔더니 갑자기 기분이 너무 들떴다. 이상했다. 알고 보니 난 우울증이 아니었는데 엄살을 부려 병원에 갔나 싶었다. 그 생각을 비웃듯 몇 시간 뒤 감정은 다시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다음 병원 상담 때 물어보니 일시적 감정 해소 현상이라고 했다. 가슴에 품고만 있는 감정이 책장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흩어져 있는 책이라고 한다면 말로 감정을 표현하며 책들이 다시 책장에 가서 꽂힌다고 했다. 혼돈으로 존재하던 감정의 구체적인 형체를 마주하면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단다. 생각해 보니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대학시절, 기숙사 방에서 새벽까지 친구와 미주알고주알 고민을 털어놓다 보면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함을 느꼈다. 가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나 슬픔이 나를 덮치는 날이 있다. 감정의 처음과 끝을 좀처럼 잡을 수가 없는 그런 날. 그럴 땐 늘 일기를 쓴다. 각자가 참 바쁜 이 세상, 마음에 있는 응어리를 친구에게 매일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기장은 언제나 묵묵하게 이야기를 받아 준다. 고민이 있어서 일기를 쓰는데, 쓰다 보니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었던 적도 많다. 마음에 비가 오는 날, 일기를 써 보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좋은 점 2. 아무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일기는 일부러 보여 주지 않는 한 나만 보는 나만의 글이다. 일단 나는 엄청난 악필이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 줄 일이 더 없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새 다이어리의 맨 앞 페이지를 펼친다. 글을 써 내려가기 전 내 글씨로 곧 망가질 일기장에게 엄숙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낸다. "다이어리야 미안하다. SNS 보면 예쁘게 꾸민 일기장도 정말 많던데...". 덕분에 일기를 아주 편하게 쓴다. 실수로 잘못 쓰는 것도, 줄 간격이나 형식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글씨가 못생겨서 티가 잘 안 나기 때문이다. 악필은 공공장소에서도 편하게 일기를 쓸 수 있다. 조금만 멀어져도 알아볼 수 없으니 비밀스러운 내용도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물론 내용에도 아무 부담이 없다. 전 직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일주일 만에 쓴 일기는 강렬한 한 문장이었다. "오늘도 11시에 퇴근했다. XX힘드네 XX"(XX의 뜻은 상상력에 맡겨 본다). 그날 기분에 따라 하루 일과가 아닌 것을 써도 좋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은 날이면 일기 대신 책의 내용과 감상을 적기도 한다. 하루 종일 여행 계획을 짠 날은 완성된 계획을 적을 때도 있다. 글 마저 쓰기 싫으면 그냥 그림을 그려버리기도 한다(그림실력도 신통치 못해 일기장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부담 없이 썼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써보자. 아무거나 괜찮다.



좋은 점 3. 한해에 한 권의 책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쓰면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다. 12월 31일이 되면 그해의 일기를 처음부터 쭉 읽어본다. 생각보다 해낸 일도 많고 다사다난했던 일 년이라 매번 놀란다. 취업 성공, 시험 합격 또는 결혼과 같은 빅 이벤트가 아니라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 누군가 나에게 올해가 어떤 해였냐고 묻는다면 "그냥 평범하고 무난했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슬픈 일이다. 평범함과 무난함 속에도 수많은 감정과 사건이 있다. 나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중에는 아주 덥거나 아주 춥거나 피곤한 날도 많았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어버이날 케이크 디자인도 직접 해서 주문 제작했다. 광안리 바다를 한 해에 2번 봤는데 한 번은 남자 친구와 함께, 한 번은 15년 지기 절친한 친구와 함께였다. 일기를 쓰면, 너무나 쉽게 잊히는 순간들을 간직할 수 있다. 상품은 디테일이 생명이지만, 사람의 생명에는 디테일이 있다. 허구인 드라마도 하나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수십 시간으로 제작되는데 우리의 소중한 삶이 몇 줄로 압축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한해의 일기를 완성하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자.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하느라 대단히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주자. 



좋은 점 4. 다이어리를 살 때 기분이 좋다


장점이라 하기에 조금 민망해서 마지막에 넣었다. 그렇지만 다이어리를 사는 행위는 아주아주 즐겁다. 사실 아무 노트에 일기를 써도 상관없다. 그래도 1년 동안 매일 보고 만질 물건이라면 아무래도 욕심이 난다. 선택지도 아주 많다. 크기도 색깔도 속지 구성도 각양각색이다. 교보문고의 종이향 디퓨저 냄새를 맡으며 매대 사이를 거닌다. 단단한 어깨와 매끈한 가죽 표면의 다이어리를 이것저것 펼쳐본다. 부드러운 속지를 손가락으로 훑을 때 이 시대의 지성인이 된 것만 같은 '뽕'은 덤이다. 



마치며 


지금까지 일기를 사랑하는 평범한 20대의 영업 글이었다. 그래도 일기 쓰기가 부담스럽다면…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일기 쓰는 즐거움이 자극적이지는 않아 영업이 쉽지 않다. 모 건강식품 광고처럼 "일기 쓰기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일단 해보시라. 매년 연말이 되면 어떤 다이어리를 살 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당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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