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야! 옆반 전학생 이번 시험 올백이래!
'공부 잘해서 좋겠다. 엄마한테 칭찬받겠네'라는 딱 초등학생다운 생각을 하고 넘겼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아이를 다음 해 우리 반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아이가 그 공부를 잘한다는 아이인 줄도 몰랐다. 모범생이라길래 좀 더 새침하고 깍쟁이 같은 모습을 생각했는데... 그 아이는 꼭 순한 곰돌이 인형 같았다. 말수도 적고, 말도 느리고 성격 급한 내가 궁금한 걸 와다다 물어보면 눈을 끔뻑거리면서 한참 생각하다 대답하곤 했다. 한참을 어울리고서야 이제는 내 친한 친구가 된 그 아이가 작년에 올백을 받은 전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와 내 친구 완전 짱이네!
이런 우등생과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괜히 우쭐하기도 하고, 뭐든지 잘 해내는 그 아이에게 동경의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아이는 뭐든지 잘할 뿐만 아니라 뭐든지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저렇게 우수한 아이에게 단지 타고났다는 이유로 잘하는 것은 없었다. 작은 것이던 큰 것이던 정직하게, 꾸준히 노력해서 잘했다. 학교 공부는 물론이고 음악이나 미술 수행평가도 성실히 준비했다.
정말 신기했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생인데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할까?
지구인이 외계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12년 짧은 내 인생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존재에 대한 생경한 놀라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도 저 아이처럼 열심히 하면 상도 많이 받고 시험도 잘 볼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불이 붙었다.
그때부터 정말 모든 걸 다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내가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즐거웠다.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아이돌 가수의 신곡을 듣는 것과 같이 모든 일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보는 것도 그 자체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곁에 완벽한 본보기가 있었기에 옆에서 그 아이가 하는 그대로 따라한 적도 많았다.
그 뒤로는 열두 살 어린아이에게 흔하지 않을 광기의 순간들이었다.
- 보통 아이들은 공책에 네댓 줄 쓰는 방학숙제 일기를, 그 아이는 컴퓨터로 타자를 쳐 정성껏 썼다. 그래서 나도 글자크기를 더 줄여 하루에 에이포 한 페이지씩 한글파일로 일기를 썼다. 한 달이 넘는 방학 동안 매일 그렇게 일기를 쓰다 보니 글 쓰는 실력이 늘었다.
- 명화를 따라 그리는 수행평가 전날에는 새벽까지 제출할 그림을 집에서 미리 그려 보았다. 슬프게도 예체능에는 재능이 거의 없었기에 그나마 따라 그리기 쉬운 수렵도를 골랐다(사실은 당시 유행하던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을 하다 알게 된 그림이었다..). 얼마나 진심이었으면 16년 전에 뭘 그렸는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디에 어떻게 그릴 지 위치까지 정해 놓았다가 다음날 학교에서 그대로 따라 그려서 냈다. 2등을 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그 친구에게 가졌던 마음은 경쟁심이 아닌 동경이었기에, 내가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이는 아주 좋았다. 수다스러웠던 내가 조용했던 그 애를 많이 웃겼던 것 같다. 학기가 끝나는 날, 성적표 겸 생활기록부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애는 10개, 나는 11개로 한 해 동안 받았던 상장이 내가 딱 한 개가 더 많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노력하는 만큼 얼마든지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너무나 고맙게도,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3시간 노력하면 3시간만큼 잘하지만, 6시간 노력하면 2배로 더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꼼수 없는 정직한 노력의 가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성취감의 달콤한 맛을 알게 되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성공한 경험은 그다음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 예전에 잘 해낸 적 있으니 앞으로도 노력하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그다음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도전의 횟수가 늘어나니 성공한 경험도 늘어간다. 긍정적인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글을 다 쓰고 보니 초등학생 때 열심히 산 얘기를 너무 거창하게 한 것 같아 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