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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y 15. 2019

디지털 여우장갑

누구를 위하여 마녀의 종은 울리는가?

디지털 여우장갑

또는

누구를 위하여 마녀의 종은 울리는가?     

     

-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는 이집트 발명의 신 토트와 태양왕 타무스의 유명한 대화가 나온다. 트는 발명품을 잔뜩 들고 와서 타무스에게 그걸 이집트인에게 보급하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문자가 있었다. 트는 문자를 망각의 치료제, 즉 파르마콘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타무스는 회의적이었는데 문자가 오히려 기억력이 실행되는 걸 막아 망각을 산출할 독으로 보았던 것이다.      


- 파르마콘의 이중성, 즉 약이 곧 독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다시금 언명한 이는 중세의 연금술사이자 독성학의 창시자인 파라켈수스다. 그는 “독물은 모든 곳에 있으며 독물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투약 정도에 따라 독약이 되거나 치료제가 된다”고 말했다.      


- 1,2차 세계대전 당시 조제실에서 일했던 경험에 힘입어 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독약이 인체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의 묘사에 있어 과학적 정확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는 그녀의 소설에서 가엾은 희생자들을 죽이는 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약을 사용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디기탈리스(Digitalis Purpurea)다.

      

- 주렁주렁 매달린 방울모양의 꽃봉오리 안에 손가락을 넣으면 잘 들어맞았던 까닭에 유럽에서 디기탈리스(Digitalis '손가락을 닮았다'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로 디지털의 어원과 같은데)는 오래전부터 여우장갑(foxglove) 혹은 요정 손가락(fairy finger)이란 동화적 애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자줏빛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사실 장갑의 내부는 디기톡신(digitoxin)이라는 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디기탈리스에 의한 독살장면이 등장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출판되기 전인 1932년, 벨기에서는 실제 디기탈리스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마리 베커라는 평범한 주부가 타락에 빠지면서 그녀의 옷가게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디기탈리스를 탄 차를 대접했던 것이다.      


- 중세 때는 여우장갑이 종교재판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되었다. 마녀사냥으로 기소된 여자들은 마녀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그걸 삼켜야 했는데, 이때 여우장갑은 마녀의 종(Witches' Bells)으로 둔갑한다. 중세 페미니즘의 만찬에 오른 최후의 성배.      


- 오늘날 심장근육을 수축시키는 강심제로 사용되는 디기탈리스는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의사 윌리엄 위더링에 의해 처음으로 주요약제로 수용되었다. 한 노파로부터 디기탈리스의 마법의 힘에 대해 전해들은 그는 전신 부종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했는데, 디기탈리스가 부종치료에 특효를 발휘하게 된다.     


- 문제는 디기탈리스의 치사량이 유효량의 단지 3배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극소량으로 치료와 죽음이, 천국과 지옥의 문이 갈렸다. 하지만 천국에 든 환자들 또한 긴 체내 반감기로 인해 중독성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 빈센트 고흐가 그린 폴 가셰 박사의 초상화 중 하나에서 우울한 표정의 박사는 손에 여우장갑을 들고 있다. 혹자는 가셰 박사가 고흐의 간질발작 치료에 디기탈리스를 썼을 거라 믿고 있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정신착란을 일으킨 디기탈리스가 감각의 반죽처럼 고흐의 캔버스에 아린 노랑과 별들의 느린 여행을 풀어놓았을 것이라고.

     

- 연쇄 살인범 마리 베커는 디기탈리스를 먹은 희생자들의 최후의 순간을 자세히 묘사하길 즐겼는데, 한 희생자에 대해 "바닥에 등을 꼿꼿이 대고 누운 채 아름답게 죽어갔다"고 악마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심장이 완전히 멎기 전 그들이 보았던 것이 광적인 노랑인지, 자주빛 아지랑이(Purple Haze)인지 따져보려는 듯.     

   

- 동화 속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듯 새로운 문자의 요정들이 창궐하는 디지털 향연, 독이 가득 담긴 저 새로운 중세의 정원에서 아치형 교수대에 고요히 매달린 마녀의 종은 산책자들에게 종일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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