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05월 23일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영화에 너무 잘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는 사자와 세계를 구하던, 우주 유영을 하던, 혹은 대머리 교수님한테 드럼을 못 친다고 쌍욕을 듣든 간에 그 영화 줄거리에 푹 빠져든다. 꼭 진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이 나고 검은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끝없이 공허하다. 허무하다. 타노스가 손가락이라도 튕긴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것 같다. 상앗빛 영화관 긴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서 나오면서 현실로 천천히 돌아온다. 나는 이 상앗빛 허무함이 싫어서 영화가 싫었다.
원래 모든 끝이란 허무하다. 영화의 끝도, 롤러코스터의 끝도. 카페베네 로고가 올라오며 회색 화면으로 바뀌는 것도. 아마 내가 죽어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에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다 헛되고 또 허무하구나.`
얼마 전, 코이카 홈페이지에 한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의 요지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 힘들어 보이므로 한국에 들어온 날로부터 3달 뒤, 각 단원의 계약이 '종료'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종료되는 절차와 예상되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나의 콜롬비아 코이카 봉사활동은 뜬금없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끝을 맞이했다.
처음만 하더라고 당연히 돌아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미의 코로나 상황을 매일 살펴보며, 어렴풋하게 콜롬비아로 돌아가긴 힘들겠다 싶었다. 시간이 서서히 흘러가고 나는 조금씩 마음을 접어갔다. 그리고 끝끝내 일말의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혹시 나는 역시나였다.
그래도 충격은 덜했다. 원래 알고 맞는 매도 아프지만, 갑자기 맞을 때, 예를 들어 발가락이 문지방에 부딪치거나, 혹은 책상 밑에 물건을 줍다가 일어서면서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을 때가 더 아프다. 그래서 곧 맞을 거라고 잔뜩 쫄아 있던 탓에 갑작스러운 공지에도 그냥 쉽게 납득했다. 이미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믿기 싫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이 공지와 함께 나의 423일간의 봉사활동은 끝이 났다. 작년 초, 콜롬비아로 갈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이런 마무리를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세계적으로 역병이 대유행해서 한국으로 전 단원이 긴급 일시 복귀를 하고, 결국 그 역병으로 코이카 계약까지 취소되다니. 누가 이 스토리를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개연성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끝났다. 이 허무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상영관에서 나와 긴 상앗빛 복도를 터덜터덜 걷는 기분이다. 1년 좀 넘게 봤던 그 영화가 길었다는 느낌이지만 그 외에는 모두 같다. 꿈같은 시간을 보냈고, 좋은 사람을 만났으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나태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돌아왔다.
이번 봉사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테슬라의 사장으로 유명한 일런 머스크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 한 달간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 실험은 그 이름도 유명한 '1달러 프로젝트'인데 한 달 동안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런 머스크는 한 달 내내 냉동 핫도그와 냉동 오렌지만 먹고 컴퓨터를 하거나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게 느꼈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아무리 망해도 하루 1달러 정도면 살 수 있겠구나'라는 걸 깨닫고 두려움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나의 봉사도 '1달러 프로젝트'와 비슷한 실험이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 없이, 제한된 돈을 가지고 살아도 나는 괜찮을까? 이 실험의 끝은 Yes. 안정감도, 많은 돈도, 소중한 사람도 좋지만, 세상에 쓸만한 일을 하는 것 만으로 좋았다. 아마 나는 계속 이런 길로 가도 되는 사람인 것 같다.
아무튼, 이 길었던 여정의 끝은 여기다. 이전 나의 콜롬비아 이야기를 다들 재밌게 들어줬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하여튼 새로운 여정 앞에 서 있는 나. 또 새로운 글 주제가 있다면 이렇게 얄궂은 글을 쓰겠습니다. 여기까지 꼬박꼬박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나의 콜롬비아 봉사 원정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