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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May 26. 2020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년 05월 05일




  주식 시장에는 유명한 명언이 하나 있다.

  "썰물 때 누가 발가벗고 헤엄쳤는지 알 수 있다." 워랜버핏이 한 말로, 요즘과 같이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쓰는 말이다. 위기가 왔을 때야 말로 어떤 기업이 위기에 대비했는지, 우량 기업인지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어느 나라가 발가벗고 헤엄을 쳤는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도 온 세상에 드러났다. 내가 발가벗고 헤엄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 위기, 한국 일시 귀국이란 큰 썰물을 만나 나는 그대로 갯벌에 처박혀 버렸다. 할 게 없다. 막막하다. 나 이제 뭐하지? 이 막연한 자유 덕분에 콜롬비아에서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이래서 다들 코이카가 경력 단절이라고 그랬던 거구나. 뭐 나야, 경력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코이카를 갔었지만 돌아오니 남은 거라곤 꿈처럼 아련한 콜롬비아 생활과 5살짜리 스페인어 그리고 그 사이 처진 피부와 주름 그리고 철없는 생각뿐이다. 참 가서 안일하게 살았었구나.




* 글과 상관 없는 사진 1: 나도 우리 동네도 같이 나이 들어 가는 구나.


  앉아서 멍하니 고민 또 고민했다. 그리고 스프링 노트를 하나 폈다. 방금 깎은 날카로운 연필을 들고선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 써 보았다. 먼저 떠오르는 건 맨날 이야기하던 코이카 종신형으로 살기. 또 코이카를 간다면 작년처럼 별 고민 없이 안일하게 살 수 있다. 내 나름대로 사람을 돕는다는 보람도 있고 다양한 언어도 배울 수 있고 해외 생활도 더 할 수 있다.


  다만, 받는 돈이 크지 않다. 그리고 거의 3년마다 세계 곳곳을 혼자 싸돌아 다니며 살아야 한다. 게다가 일반 코이카 단원은 아내와 같이 봉사활동을 못 가도록 법으로 막아두었다. (코이카 자문관은 부부 동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결혼, 연애를 담쌓고 살았는데, 그래서 강제적으로 비혼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다. 코이카를 다시 간다면 '코이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애, 결혼을 못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말년이 말한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성남 코이카 본사를 향해서 하루에 3번씩 절할게요.)


  그리고 코이카 단원 파견 사이사이 시간도 조금 애매해다. 봉사 기간 2년이 끝나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코이카를 지원해야 한다. 파견까지는 서류 시험과 면접시험. 그리고 영월 코이카 교육원에서 2달간 교육까지 받아야 한다. 시간이 척척 들어 맞고 코이카 시험, 면접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6-8개월 정도면 다시 파견 나갈 수 있다. 그래서 그 사이 시간이 붕 뜬다. 물론 그 시간을 잘 활용할 수도 있고, 나름 일 사이의 휴가라고 생각한다면 장점이 될 순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진로로는 취업하는 게 있다. 가끔 취업 생각도 한다. 거대한 기업에서 톱니바퀴가 되어, 주는 모이 꼬박꼬박 잘 받아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안정적이니까. 아직 연애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한다면 또 그때는 무슨 거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내가 카톡만 조금 해도 여자 친구냐고 물어보시는 우리 부모님에게도 희소식일 것이다.


  아직 취업하기에 완전히 늦은 나이도 아니다. 그리고 한국이 꼭 아니더라도, 해외 취업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페인어를 잘하진 못해도 그냥저냥 대화는 되니까. 콜롬비아에 있었을 때, 여러 번 현지 한국 기업으로부터 채용 공고도 있었다. 전부 나쁘지 않은 대우였다. 연차가 쌓인다면 한국에서 꿈꾸기 힘들 좋은 집에서 살 정도의 대우였다. 하지만 취업은 끝끝내 내키지 않는다. 내 몸에 한량 DNA가 박혀 있는지. 혹은 끝끝내 철들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다음 길은 대학원이다. 이 나이 먹고 석사로 다시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30살 대학원생이라니 딱 놀림받기 좋은 포지션이다. 흠...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맨날 대머리 다 됐다고 놀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대학원생인데. 대학원 가면 고생 제대로 하고 내 얼마 없는 머리카락도 저 늦봄 벚꽃처럼 다 우수수 떨어질 텐데. 하지만 그 악의 소굴이 눈 앞에서 계속 아른아른거린다.


  왜냐하면 코이카를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코이카에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코이카 기수 50여 명 중에서는 거의 절반 정도가 중도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다른 기수도 우리와 비슷한 수준일 거란 생각이 든다. 각자 개인 사정, 개인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코이카의 시스템이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글과 상관없는 사진 2: 낙동강에는 한강에 없는 낙동강 스웩이 있다.




  코이카에서는 단원을 보내기까지 정말 이 정도까지 돈을 쏟아붓나 싶을 정도로 돈을 쏟아붓는다. (단원 한 명당 1억이 넘게 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국내 교육에서는 4주 동안 합숙하면서 봉사 단원으로서의 소양, 국제 개발 협력, 인권 등의 교육을 듣고, 현지인 선생님과 언어 교육을 한다.


  현지에 가서도 현지 사무소의 사정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무려 두 달 동안 현지 선생님과 언어 교육과 현지 적응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세세하게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파견되고 나서부터다. 다행히, 기존에 단원이 있던 곳에 후임으로 가게 된다면 어느 정도 기반이 있지만, 처음 파견되는 기관은 그렇지 못하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코이카 봉사활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기관이 많다.


  그래서 기관에서 단원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기관에서 아무런 요구를 안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오는 단원도 있다. 그리고 봉사활동 오기 전에 요청받은 기관 필요와 실제 필요는 전혀 딴판인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나는 기계 설계 수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준비해 갔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 없는 수업이 기계 설계 수업이었다. 오히려 기계 수업을 하면 기존 선생님들의 일자리만 뺏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해온 것들은 시작부터 무용지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현지 사무소에서는 해줄 수 있는 바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각자 단원들은 각각 다른 기관에 파견되어 있고, 그 기관에 대해서 아는 바는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단원은 그 사이에 기관에 상처 받고, 사무소에도 상처를 받는다. 터무니없는 결말이다. 용두사미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스템이다.


* 글과 상관 없는 사진 3: 우리 동네 고양이 다들 보고 가세요.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코이카뿐 아니라 다른 봉사활동도 비슷했다. 나는 여태껏 여러 봉사활동을 경험해보고 이야기도 들어왔는데 수혜자와 봉사자를 위한 봉사는 많지 않았다. 이른바 '보여 주기식 봉사'가 많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험하기로는 효과적이지 못하지만 사진으로는 이쁘게 나오는 봉사. 아니면 많은 사람이 수혜 받은 것처럼 보이는 봉사. 그래서 수혜 받는 사람은 갸우뚱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이걸 왜 하는 거지 생각하지만 관계자는 웃으면서 사진 찍고 가는 그런 봉사. 그런 봉사들도 다수 있었다.


  돈과 시간, 열정을 들여서 여기 왔지만, 이리저리 상처만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 기부받은 돈으로 보여주기 식 사진만 찍는 봉사 활동.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처음 시작 단계,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은 서비스 디자인, UX, 디자인 싱킹. 유저 중심, 사람 중심 디자인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 그래서 봉사의 시작 단계, 설계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의견을 통합해서 더 나은 봉사를 디자인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해외에서는 많이 연구되고 있는 분야인 것 같지만 한국은 이런 쪽을 찾기 어렵다. 사람 중심 디자인, 디자인 싱킹은 공과대학과 디자인 쪽으로 빠지고, 봉사에 관련된 대학원은 사회 복지나 국제 협력 쪽으로 빠진다. 둘 다 공부하고 싶지만 한쪽을 꼽으라면 결국은 디자인 쪽이다. 일반 회사에서 제품 및 서비스를 디자인하듯이 사회적인 디자인, 봉사, 국제 협력을 디자인해보고 싶다.




  어디를 어떻게 공부할지 너무 막막하다. 얼마 전, 이 진로 고민으로 만난 친구에게도 그런 투정 아닌 투정을 했다. 흔히 가는 길이 아니니 어떤 대학원을 갈지, 무엇을 공부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 친구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문샷 Moonshot'. '달에 가겠다'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만 보고 나아가면 아무리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는 그런 문샷은 '인간 중심 디자인을 통한 봉사 활동'인 샘이고 말이다.


  아무튼 아직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시 콜롬비아에 돌아갈 수도 있고 이런 꿈이 있다가 또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을 한편에 넣어두고 대학원에 대해 더 찾아보고 고민해볼 예정이다.


  이런 길을 고민하는 거 보면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다. 눈 앞에 엄청난 고생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고 있다. 이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도 곧 우수수수 다 빠질 거다. 게다가 제길 이건 돈도 안되고 명예도 없는 길이다. 이런 가시밭길이 몇백 헥타르가 펼쳐져있지만 뭐. 저기 달이 보이는데 가봐야지. 별 수 없다.


* 글과 상관없는 사진 4: 걷다 보면 생각은 정리된다. 다리랑 머리는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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