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kim May 13. 2020

한국와서 좋다지만
마음은 콜롬비아에;(

20년 04월 13일




  캔커피를 들었다. 놨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생각에 잠긴다. 다 빌어먹을 물가 적응 때문이다. 시차 적응이야 한국 도착과 동시에 호텔에 감금되면서 금방 해치웠다. 음식 적응도 별거 없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먹는 매운 음식 때문에 입으로 한 번 그리고 화장실에서 두 번, 한국의 매운맛에 톡톡히 당했지만 지금은 혀도 위장도 고향이 한국이었단 걸 기억했는지 이제 다 적응했다. 까먹은 줄 알았던 한국어도 이제 제법 돌아왔다.




  하지만 도무지 적응하기 힘든 것이 이 빌어먹을 한국 물가다. 그래서 편의점 한 켠에 서서 캔커피만 주야장천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는 거다. 이게 얼만지 콜롬비아 돈으로 계산해 보았다. 이 조지아 캔커피가 지금 1100원이니까 콜롬비아 페소로는 3600페소쯤 되는구나. 그럼 그 돈이면 포니 말타 작은 거 2병 사 먹을 수 있을 텐데. 그 돈이면 소고기 꾸워 먹을 수 있을 텐데. 그 돈이면 양파 10킬로 넘게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어마어마한 돈으로 고작 15초 꿀꺽거리면 다 마실, 싸구려 원두로 만든 검은 물 나부랭이를 사려니 도저히 손이 안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카페인의 충성적인 노예. 뇌를 깨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사서 마신다. 500페소, 한국돈으로 단돈 200원이면 사 마실 수 있던 콜롬비아 커피 '띤또Tinto' 생각이 간절해진다. 콜롬비아에서 느닷없이 한국에 떨어진 것은 한국에서 느닷없이 북유럽에 떨어진 것과 같다. 이제 난 망했다.




  그래도 한국에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다. (코이카 만세.) 먼저,  2년 만에 벚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비록 편의점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핀 벚꽃나무 서너 그루로 즐기는 소박한 벚꽃 구경이었지만. 게다가 벚꽃 태반이 져서 바닥에 벚꽃이 깔리고 나무는 분홍초록초록했지만 그 나름 걸을만했다. 언제 또 바닥에 벚꽃으로 수 놓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벚꽃 끝물에 겨우겨우 봤다 :)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좋다. 동네 동생들, 대학 후배들, 고맙게도 나에게 먼저 연락 주셨던 사람들 하나하나 만났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이야기가 똑같다.


  '그저께 만났던 거 같다'라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라고. 20대 중반으로 돌아간 듯, 만나서 시답잖은 농담만 던졌지만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서 만나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즐겁다. 사랑하기보단 미워하기 쉬운 이 세상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가족들과의 시간도 좋다. 우리 가족은 전형적인 '몸이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마음은 더 돈독해지는 가족'이다. 아직 '그리워하던 마음의 여운', 일종의 찌꺼기가 마음에 남았는지 아직까지는 화목하다. 하지만 서로 듣기 싫어하는 말을 어떻게 귀신같이 아는지. 슬슬 시간이 지나니 부모님은 내게 결혼에 대해 물으신다.


  그래서 나는 바로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2018년까지인 치즈를 꺼내 보이거나, 왜 집에 청소기가 4대, 냉장고가 3대나 있느냐고 물으면서 응수한다. 이 평화의 쿨타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매년 칠월칠석에나 보는 한국 대표 롱디 커플 견우직녀의 이야기처럼 우리 가족도 가끔 한 번씩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곧 없어질 이 평화도 참 좋다.


  한국의 안전한 분위기도 좋은 점 중 하나다. 콜롬비아에서는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긴장모드다. 길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는 건 무슨 첩보 영화 속 지령을 받은 스파이처럼 사방과 위아래를 다 감시하며 몰래 꺼내야 했다. 길을 건널 땐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정신 나간 오토바이나 택시도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개똥이 또 어찌나 많은지. 콜롬비아에서는 산책하면서 게임 안의 게임. 코너 속의 코너처럼 개똥 피하기도 해야 했다. 이제 개똥 피하기도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건널 수 있다.


오 자유. 오 프리담.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게 너무 좋다. 14일간 호텔에 갇혀있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에게 중요한 자유는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두발 자유 등 많은 자유가 있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두 발'의 자유이다.


  역시 사람은 걸어야 한다. 싸돌아 다녀야 한다. 14일간 호텔에서 사람은 '걷는 동물'이란 걸 깨달았다. 코로나로 잔뜩 쫄아서 마스크 끼고, 손소독제 열심히 발라가며 집 주변을 부지런히 싸돌아 다녔다. '두 발'의 자유를 흠뻑 만끽했다.




  한국 온 이래로 매일매일 코로나 뉴스를 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요즘 그 상승세가 만만치 않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은 세계적으로 186만 명이나 감염되었다. (이 글을 업로드하는 이 순간에는 425만 명이나 된다.) 세계적으로 매일 8-9만 명씩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웠던 남미도 지금은 상황이 심각해졌다. 특히나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며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는 그저 과장에 불가하다던 헛소리를 일삼던 대통령이 있는 브라질의 상황이 제일 심각하다. 벌써 한국의 두배가 넘는 2만 명의 감염자가 생겼다. (지금은 무려 17만 명이다.) 그리고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대통령인 이상, 사태는 더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콜롬비아의 '이반 두케' 대통령은 다행이게도 무능한 대통령이지 멍청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50명쯤 될 때부터 시행했던 이동 금지령으로 주변 남미 국가들에 비해서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콜롬비아 친구의 말을 듣기로는 아직도 몰지각한 사람들이 몰래 외출하는 바람에 대도시 중심으로 코로나가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콜롬비아의 확진자 수는 11600여 명이다.)


  하긴 콜롬비아 사람들은 파티와 축제의 민족인데 하루 종일 집에 감금이라니 힘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발 내가 콜롬비아로 돌아가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 준다면 고맙겠다.


  그리고 콜롬비아 내에서 지금 심각한 문제는 빈민가들의 빈곤이다. 저기는 코로나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코로나로 인한 빈곤과 굶주림이다. 최근 콜롬비아 보고타 빈민가에서는 빨간색 옷이나 빨간 깃발을 내건 집이 많다. 이 빨간색의 의미는 위급하다는 신호. 도시 봉쇄로 인해 수입이 없고, 먹을 걸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인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보고타 빈민가 집집마다 붉은 옷이 걸려 있다. 언제쯤 상황이 나아질까.


  문제는 콜롬비아 전역 봉쇄령이 한 달을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빈민가의 집에 빨간색 옷이 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콜롬비아 빈민층은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이나 비정규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코로나로 인해 가계 소득은 없어졌는데, 반면 식자재의 가격은 배가 넘게 올랐으니 기본적인 식사조차도 힘들어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굶주림이라는 건 콜롬비아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콜롬비아에 있는 베네수엘라 난민들이다. 콜롬비아에 있는 베네수엘라 난민들은 격리될 집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구걸로 연명하지만 이동 제한으로 인해서 구걸도 불가능해졌다. 몇몇 도시에서 운영되던 무료 배식도 50명 이상 모임이 금지되면서 폐쇄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마스크나, 손소독제를 구할 형편이 될리는 만무하다.


  콜롬비아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베네수엘라 난민들도 문제다. 콜롬비아에 난민으로 왔기 때문에 무국적 신분이라 콜롬비아의 공공의료 서비스를 받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증상이 있더라도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는 건 쉽지 않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콜롬비아 각지에서는 난민들이 다시 베네수엘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이런 무방비한 상태에서 목숨을 건 대이동이라니. 그만큼이나 절박한 상황이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짐을 싸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두 발로 안데스를 건너는 목숨을 거는 길이다.


  세계가 난리다. 우리는 세계 전쟁에 비견되는 큰 비극의 역사 가운데 있다. 과연 세계가 언제 정상이 될지 모르겠다. 아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해외 뉴스들을 보면서, 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에 돌아왔음에 감사함과 안도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다. 제발 잘 마무리되길 기도한다. 3달 전 콜롬비아에서 단원 생활했을 그때처럼 평온해지는 날이 어서 오길 기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격리 당한 14일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