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실패 후, 커리어에는 전혀 도움 안 되는 임신이란 걸 하게 됐다.
2017년 4월,
나는 결혼한 지 6개월을 맞이하며 달달하지만은 않은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연애 4년에 결혼을 하다 보니 콩깍지가 벗겨진 지 오래고, 처음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서로의 다름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쿨하게 연애할 때는 문제 되지 않았던 각자의 집안일들이 거슬리기 시작하던 때,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던 것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내가 이 사람과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아마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냉전기에 휴전이 찾아온 건 임테기의 희미한 두줄 때문이었다.
지난주, 대천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남편 대학교 친구가 아기 100일 기념으로 초대해 밤새 달려 대천으로 향했다. 해산물과 바다회에 소주를 걸쭉하게 마셔대며 우리에게 언제 아이를 가질 거냐며 묻는 친구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린 40 되기 전에는 가져야지! 좀 더 즐기고."
남편이 40 되려면 5년이고, 난 9년이나 남았다.
그런 우리 부부가 딱했는지 얼마 전 출산한 언니가 방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더니
두꺼운 백과사전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임신 출산 육아의 대백과?......'
"이전에 친구가 임신하면 선물하려고 사다 놨는데 친구가 있다고 필요 없다고 하네요. 현지씨 언젠가 이거 필요할 테니 가져가요."
"고고.... 고.. 마워요. 두껍네요..."
남편과 친구네 거실에서 한 숨 푹 자고 일어나 차 뒷좌석에 '임신... 대백과'를 싣고 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친구들이 콜 하면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 좋은데 이걸 왜 포기해?'
혼잣말을 하며 남편과 서울로 향한 기억이 난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생리도 몇 주째 늦는 것 같아 이상하다 하고 있는 찰나,
사무 용품이 필요해 사무실 옆 다이소에서 들렸다 계산하려는데 앞에 임테기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게 아닌가.
'이천 원밖에 안 해? 싸니까 하나 구매해 볼까?'란 마음에 하나 집어 들고 계산 후 가방에 쑤셔 집어넣었다.
며칠 동안, 임테기 존재에 대해 부정을 한 건지 아니면 잊었던 건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구매하고 며칠이나 지나 테스트를 해봤다.
3분이 3시간 같은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아주 희미하게 선이 하나 가 있는데,
'내 소변이 튀어서 오류가 난 거겠지?', '싸구려라 그런가?', '내 눈이 좀 이상한가?' 등등
온갖 핑계들을 대가며 동네 약국으로 달려가 "비싼 임테기" 5개를 구매해 동시에 테스트를 했다.
계속 말도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보고 변비냐며 묻는 남편 얼굴에 임테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3분 동안 반듯한 곳에 눕혀 놔야 정확하기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본
10개의 희미한 두줄.
그 시각 남편은 정수기 물을 컵에 담고 있었고,
나는 남편과 아일랜드 식탁 하나를 앞에 두고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바라보며,
"에이,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에이 아니야 장난치지 마!"
를 연신 남발하며 출산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심지어 산부인과 간호사한테까지 연락을 돌렸다. 스피커폰으로 우리는 다급하게 임테기 희미한 줄이 몇 프로의 확률이냐 물었다.
"95%? 초반에는 원래 희미해. 근데 거의 맞더라고. 와~ 축하해!"
미국에서 유학하며 오랜 시간 실리콘앨리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대형 출판사들과 계약을 하고 책을 내려했지만 여러 번 일이 엎어지면서 책을 내는 일을 잠시 중단했었다. 그러다 작은 출판사에서라도 출판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남편의 제안에 힘들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출판 계약까지 맺어 다음 달이면 책이 세상에 나오는데.....
책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강의하러 다니며 커리어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될 터인데....
내게 너무도 중요한 이 순간 가장 불필요한 건 '임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