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커 갈수록 모성애도 자라나고 있었다.
2017년 12월,
5월, 책은 약속대로 세상에 나왔다.
적극적인 마케팅은 하지 못했지만 간간이 들어오는 강의 요청에 강의하러 다니고 산부인과와 임산부 요가 수업을 다니며 보냈다. 종종 카페에 앉아 밀린 독서도 하고 미드도 보고 무엇보다 여자로서 항상 습관적으로 배에 힘을 주고 살았던 30여 년 동안 하지 못한 먹고 싶은데로 먹고 배 나올 걱정 없이 살아봤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식사를 하러 식당을 가든 어디서든 환영받고 양보받았다. 사회가 이렇게 따뜻한 곳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또 나름대로 임산부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국내 대학원을 1년 다니며 유학 준비를 했다. 원하는 대학원으로 곧바로 가진 못했지만
차선책으로 선택한 시카고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1년 후 내가 꿈꿔왔던
드림 스쿨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학위와 논문만이 나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결과물들을 내고 싶어 기웃기웃 거리다 그 당시 뉴욕에 불고 있던 스타트업 열풍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고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4개의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스펙들을 쌓아 올렸다.
졸업 후, 잠시 일을 하다 한국에 돌아와 지금의 남편과 곧바로 창업을 했다. 2년 좀 넘게 온라인 서비스를 운영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해 서비스를 접었다. 그와 동시에 4년간 붙잡고 있던 책을 냈다.
눈코 뜰 새 없이 달려왔던 시간 속에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지금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처음으로 갖게 된 반강제성 뛰는 휴식은 달콤했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삶의 점(dot)들을 정리 정돈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창업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 진단했다.
그래야 '다음'이 존재한다 믿었기 때문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무능했나 싶을 정도로 자책도 해보고 이불 킥도 수백 번 해봤다.
'그런들 어떡하겠냐? 다 지난 일이고 다음엔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면 되지...'란
말들로 날 위로했다.
출산은 또 나답게 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정 출산을 위해 자연주의 전문 병원에 다니며 임신 막바지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이가 역아라 가정 출산은 포기하고 병원 출산을 하되 자연분만은 포기하지 못했다.
역아 자연분만은 쉽지 않은 출산이라 각서를 써야 했다. 역아 출산에 대해 얼마나 우리 부부가 확고한지에 대해 의료진들에게 주는 일종의 러브레터 같다고 해야 될까?
사람일은 정말 내 뜻대로 안 된다고, 4일 진통에 아래가 열리지 않아 결국에 '자연주의 출산 전문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대에 올라가 마취에 잠드는 순간에도 걱정한 건
'남편한테 평생 골려먹을거리 하나 만들어 줬네.'란 분함이었다.
아기는 건강하게 4kg에 가까운 몸무게로 세상에 나왔다. 내가 꿈꿔왔던 캥거루 케어를 남편이 먼저 해버렸다. 제왕절개는 분명 남편 좋으라 하는 분만 같은 느낌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지만, 마취에서 깨 만난 아들은 좀 낯설었다.
'수술해서 그런가? 누가 모성애는 애 낳으면 다 생긴다 그랬어?'
그냥 내 몸이 너무 아팠다.
마취가 풀리고 나니 다리가 저려오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몸으로 아기 젖을 물려야 한다며 몸을 움직이라는 의료진의 말이 비인간적 이단 생각마저 들었다. 거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역겨웠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모성애가 내게 없다는 사실에 슬펐고 어떻게든 모성애를 짜내 보려 노력해 봤지만 그게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아픈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아기에게만 이야기 걸고 아기만 케어하는 모습에 서러웠다. 그래도 딸 챙기는 건 친정 엄마라고 엄마는 방금 만난 손자보단 본인 딸이 우선이었다. 또 난 그런 모습을 보며 내겐 왜 저런 모성애가 없지? 란 죄책감에 시달렸다.
며칠 후,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가 커가는 모습을 보니 조금씩 내게도 아기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몸이 100%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자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달래며 젖을 물리는 내 모습을 보니 나도 모성애는 없지는 않단 사실에 놀랐다. 오히려 아기 소리에 짜증 내는 남편을 보니 상대적으로 내 모성애가 부성애 위에 있단 으쓱함도 생겼다.
그렇게 아기가 커가며 내 마음속에 꿈틀거리던 모성애도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