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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호성 Dec 18. 2021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각적 이미지들을 마주치는지.. 또 그런 시각자료들을 기반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얼마나 많은 판단과 결정들을 내리는지..


 문제는 우리가 내리는 이런 수많은 판단과 결정들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 대체로 우리를 이용하거나 우리를 통해 수익을 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미술을 주제로 인간사회를 둘러싼 오래된 사회적 현상들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여정이다. 


 1장에서 저자는 복제된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그림'은 여러 가지 대안 중에 하나가 아닌 독창성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기술발전과 함께 카메라가 탄생하면서 독창성이 훼손받아지기 시작했고, 더욱이 작품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많은 replica(복제품)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1장의 요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p 39)


 예술 이미지는 어느 순간부터 인스턴트화 되기 시작했다. 마치 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 주신 집밥이 어디서든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그럴듯한 반찬가게의 반찬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말이다. 안타까운 현상이면서도 왜 현대사회에서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 또 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렵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스턴트 이미지들에 너무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창성을 가진 예술 작품이 더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이를 찾아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일시적이고 자극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그림들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누드(nude)와 벌거벗음(nakedness)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받아져 왔고 미술이 이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해 왔는지 보여준다. Nakedness는 말 그대로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적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반면 Nude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 욕망을 일으키도록 의도화된 벌거벗음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관습화 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많은 누드화들이 탄생해왔고 이는 여성에 대한 편협한 사회적 시각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일반성'을 내포했는지를 반증한다.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p 76)


신기하지 않은가. 오래되고 낡아서 더 이상 현대적인 관념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러한 편견이 이제는 미술이 아닌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음이.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사회적 양상이 아무리 많은 변화를 거듭한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본질은 다른 매개체를 통해 되풀이된다는 점이. 인간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5장으로 넘어가면 유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주제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유화라는 것은 기름에 물감을 섞어 그리는 페인팅 기법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시각적 측면에서의 사물을 촉각적인 측면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화법임을 알게 되었다. 

 다른 화법과는 달리 많은 유화작품들은 마치 그림의 대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보이게끔 표현되었고(유화의 실체성)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화는 그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그림의 대상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특별한 화법인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많은 명문가들은 실제로 수없이 많은 유화 작품들을 구입하여 자신들의 저택을 화려하게 꾸며왔고, 이런 심리적 동기는 그 그림의 대상을 "소유"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나 역시 유화 작품들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7장은 선망의 대상(glamour)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그림 -> 광고로 이어지는 매개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Glamour(매력) 이란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으로서,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p 154) 


 이 논리에 의하면 대중에게 무관심할수록 선망의 대상자가 가지는 선망은 더더욱 커지게 된다. 모든 인간은 타인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다. 과거에는 훌륭한 작가가 그린 위대한 작품들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 외부의 선망을 얻어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값어치 있는 상품들을 소유하는 것이 외부의 선망을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처럼 인지된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 형식이다." (p 161)


 바로 이 원리를 활용하여 탄생한 것이 현대사회의 광고(Advertisement)인 것이다. 광고의 근원은 유화이며,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선망에 대한 욕구를 기반으로 교묘하게 발전된 수단인 것이다. 한 가지 차이점으로 유화는 유화 소유를 통해 소유자가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내포하는 반면, 광고는 보다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상품을 소유하게 되면 미래 시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자극적으로 광고한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산업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극도로 부추기는 광고가 사회적인 불안감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p171)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p 172)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이보다 더 잘 대변하는 문장이 있을까 싶다. 우리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불안했다. 태어난 이후부터 우리는 항상 결핍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왔고,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 미래 우리의 모습을 위해서만 생활하도록 주입되어 왔다. 현재 우리의 모습과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우리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현대사회를 얼마나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지, 또 이를 이용하여 상업적 활동을 영위하는 수없이 많은 IT기업들과 광고회사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 심각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자유의 시초, 르네 마그리트

           

 현대사회에서 한 번쯤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마그리트의 '자유의 시초'에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싸다 못해 벽을 형성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주입된 이미지들을 한 번쯤 스스로 부셔보고 그 이면의 것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남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 본연의 모습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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