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순정 Apr 11. 2020

9시 뉴스 앵커가 재택근무를 하면?

코로나가 가져온 뉴스의 '뉴 노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초토화되고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는 요즘, 2009년의 신종플루 사태를 떠올리곤 한다. 한국에서만 십만여 명이 감염돼 260명이 사망했으니, 지금 신종 코로나 확산 사태와 비교해도 꽤 심각했다. 당시 공중파 방송사의 2년 차 막내 기자였던 나는 마스크 한 장에 의지한 채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지역 거점 병원의 야외 텐트에 마련된 선별 진료실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취재하고 인터뷰도 했다. 어떤 증상으로 방문했나? 기분이 어떠한가? 걱정되지는 않나? 이런 뻔한 질문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신종플루 전염되면 어찌하냐며, 고생이 많다며 다른 부서 선배들이 걱정을 해주면 씩 웃으며 '기자들 일이 그렇죠 뭐'라고 쿨내 돋게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차라리 신종플루에 감염돼서 한 일주일 정도 푹 쉬었으면 정말 좋겠다(=걸려서 쉬고 말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몸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취재활동에도 불구하고 '한 번 걸리고 싶다'는 깜찍한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타미플루가 치료제로 공급되면서 2009년의 역병 사태는 막을 내렸다.


    십 년여가 지나 다시금 초유의 전염병이 전 세계를 뒤덮은 지금, 현장을 누비며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은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할까? 혹시라도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전염되면 그때 꿈꿨던 그런 달콤한 휴식을 누릴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왔다. "놉!"


CNN 뉴스 앵커 크리스 쿠오모_ 친형인 뉴욕 주지사와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 관련 생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화면 왼쪽에 보이는 남자는 미국의 24시간 뉴스 전문 채널인 CNN의 앵커, 크리스 쿠오모. 미국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앙지로 떠오른 뉴욕주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의 친동생으로, 자신이 진행하는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에서 형인 쿠오모 주지사를 인터뷰하며 형제간 티격태격하는 모습을('엄마한테 전화 좀 해') 보여 유쾌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확진되었는데, CNN은 그의 양성 판정 소식을 전하면서 상태가 나쁘지 않고, 앞으로 'Work from home'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9시 뉴스 앵커의 재택근무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크리스 쿠오모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네 그게 바로 접니다'

    

    그는 변함없이 앵커로서 자신의 이름을 건 생방송 뉴스쇼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종전과 달라진 것은 뉴스 스튜디오가 아닌 자신의 집 지하실에 앉아 있다는 것. 그리고 슈트와 넥타이 대신 'work from home'에 어울리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하의는 파자마 차림일 것으로 99% 확신한다), 단 두 가지뿐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 <Cuomo Prime Time>에서 스튜디오에 있는 의학전문기자를 연결해 자신이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앵커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자막에 띄우고 뉴스거리로 보도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택 지하실에서 진행하는 그의 뉴스는 오히려 생동감을 더했다. 앵커로서 그동안 해왔던 것과 다름없이 스카이프 화상 연결을 통해 자치단체장들과 코로나 대응 상황에 대해 인터뷰도 하고, 때로는 격리 중인 COVID-19 양성 환자 입장인 스스로를 인터뷰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기저질환자나 노인이 아닌)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자가격리 중인 자신의 신체적 증상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가족들에게 전염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내지는 집에 틀어박혀 타이레놀을 먹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처 방법이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감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대처와 치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그의 뉴스는 '남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전달'하는 기존 뉴스의 한계를 가뿐하게 뛰어넘으면서 시청자들에게 '진짜'를 시청하는 재미와 몰입을 충실하게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기자들만이 재택근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대다수 주에서 의료, 운송, 식품 등 필수 업종 종자사를 제외한 시민들에게 자택격리 명령을 내린 이후, 이미 많은 방송사들이 출연진들에게도 예외 없이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시애틀 지역 방송국 KIRO7의 아침 뉴스_ 앵커 1만 스튜디오를 지키고 앵커 2와 기상캐스터는 자택에서 뉴스를 진행한다


    시애틀의 지역 방송 채널들도 뉴스 프로그램에 대대적인 "News From Home"을 시행했는데, 이게 될까? 싶었던 초기의 의문이 부끄럽게도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 기상캐스터는 자신의 집 TV 화면에 기상 지도를 띄운 채 스튜디오와 연결해 평소와 다름없이 기상정보를 전달한다. 앵커 중 한 명은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애완동물과 함께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New normal'에 대해 보도한다. 스스로도 애완견을 품에 안은 채로 말이다.




    스튜디오나 자택이 아닌 현장에서 취재를 하는 기자들에게도, 전염병 시대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뉴스에 나가는 인터뷰는 물리적인 환경이 허락하는 한 기자가 직접, ENG 카메라로 커버하는 것이 내가 일하던 회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이저 방송사가 추구하는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뉴스에서는 기자가 마이크를 들고 직접 인터뷰를 하거나 근접 취재하는 '그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가 권고하고 있는 "6 feet social distancing" (사회적 거리두기_ 약 182 센티미터)에서 언론도 예외는 아니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가 방송사 마이크만 알아보고 '너희들 엄중한 상황에서도 수고가 많구나 그러니 전염시키지 않겠다' 하며 비켜가지는 않을 터. 심지어 인터뷰라는 행위의 특성상 (비말이 비처럼 쏟아지는...) 바이러스 전염 가능성이 다른 일상적인 행위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키는 뉴스 인터뷰


    기사와 영상을 편집해 방송하는 뉴스 리포트의 경우 방송용 ENG 카메라로 촬영된 인터뷰는 그 수가 극히 적어졌고, 촬영을 한다고 하더라도 스탠드 마이크를 놓고 취재진과 취재원이 6 feet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다. 대신, 영상통화나 스카이프 등의 기능을 이용한 화상 인터뷰를 하고 이를 그대로 뉴스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화질이나 오디오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치료제 없고 치사율 높은 전염병에 감염될 것이 두려워 학교도, 직장도 포기한 채 고립을 자처하는 마당에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왔을지 모를(그래서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 방송사 취재진을 기꺼운 마음으로 만나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상 인터뷰 등 '비접촉' 취재와 인터뷰는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있는 미국에서 '뉴 노멀'로 자리잡았다.




    미디어 생태계의 폭발적인 변화는 어제오늘 탐지된 것이 아니다. 옛날 옛적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면, 요즘은 유튜버가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 2위를 다툴 만큼 1인 미디어의 위상이 높아졌다. 과거에는 유명인사인 '셀럽'에 열광했지만, 요즘은 방송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일반인 '인플루언서'가 대세다. 소위 '레거시 미디어'라고 불리는 기존 대중매체는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변화의 파도에서 어떻게든 가라앉지 않으려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이 이 가뜩이나 복잡한 '판'을 한 번 더 뒤흔들어 놓았다. 거대 방송사의 뉴스 종사자들은 그나마 그들이 경쟁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 줬던 가장 강력한 무기, 첨단 방송설비와 취재원 접근성을 한꺼번에 빼앗긴 채 자신의 방에 앉아 취재원에게 영상통화를 청하고, 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그저 한 명의 유튜버처럼.


    하지만 이 같은 팬데믹 사태가 레거시 미디어 뉴스에 마냥 페널티를 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 닥칠수록, 신뢰성 있는 채널에서 전달되는 함축적이고 정제된 정보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저 방송사의 뉴스가 뉴미디어 채널을 기반으로 하는 1인 미디어에 비해 이런 부분에 특화되어 있음은 아직까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재에서 진행하는 뉴스가 기존 방송 뉴스 채널의 새 가능성을 열어주는 돌파구가 될지, 아니면 진짜 '레거시(유물)'가 되어 박물관에 수장되는 지름길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안 걸린 이의 병원 나들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