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 정신건강 특효약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십 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까지 내 마음속 위시리스트 1번은 바로 '1000피스 직소퍼즐 완성해보기'였다. 세계일주도 아니고, 연예인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거액의 슈퍼카를 사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퍼즐 맞추기? 그것도 퍼즐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흔한 장르 아닌가. 이래저래 맞춰보면서 그림만 완성하면 되니까. 사실 1000피스 퍼즐 맞추기로 간단하게 이름 붙였지만 진짜 원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퍼즐 맞추기나 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내지는 평화)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여유를 갖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쉬이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던, 예상 난이도 '하'의 위시리스트는 (1번으로 정한 이유도 달성하기 쉬워 보여서였다.) 그 긴 세월 동안 목록에서 지워지지 못하고 서점이나 문구점을 갈 때마다 퍼즐 코너를 서성이게 만들었다.
끝까지 완성은 다 하지 못할지라도 그 많은 세월을 그렇게 서점을 기웃거렸으면 마음에 드는 그림이 담긴 퍼즐 한 두 개 샀을 법도 한데 그러지도 못했다. 선천적인 기질 탓인지, 자라온 환경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최선을 다해 '목적'을 쫓는 삶을 살아온 이에게 유유자적 그림 퍼즐을 맞추고 있는 행위는 커다란 사치처럼 느껴졌달까. 그리하여, 이 위대한 대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큰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는데 그게 그리 쉬이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일을 하지 않는 여가시간도 그냥 '쉬기'보다는 꼭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틈틈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설은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기 개발서, 경제서, 육아서. 가슴보다는 머리에 담는 책을 꾸역꾸역 읽어왔고 남들 다 보는 드라마도 즐기지 않았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행위는 마냥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데 책이 잃기 싫을 때는 영어로 나오는 드라마나 리얼리티쇼를 봤다. 노트를 펴고 모르는 단어나 표현을 받아 적으면서.
이 케케묵은 위시리스트를 실현시켜 준 것은 뜻밖에도 코로나바이러스였다. 미국을 뒤덮은 코로나 광풍으로 사실상 가택연금상태가 되면서 자잘한 온라인 쇼핑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게 되었는데, 이 똑똑하기 그지없는 아마존 AI가 아름다운 그림의 1000피스 직소퍼즐을 추천 카테고리에 탁 띄워주는 게 아닌가! 해외 이사를 두 번씩이나 하고, 암 치료도 받고, 아이 둘 낳고 기르며 바삐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위시리스트를 한번 이뤄볼 기회가 왔다 싶었다. 뭐, 사놓고 완성하지 못한다 한들 크게 상관이 없기도 했다. 어차피 그 순간의 목적은 위시리스트 달성이 아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소비' 그 자체였으니까.
그렇게 고른 인생 첫 퍼즐의 제목은 [cats in Positano]였다. 파랗게 펼쳐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화단 옆에 하얀 야외 테이블이 놓여있고, 고양이 두 마리와 작은 새 두 마리가 테이블 위아래에 한가로이 머물고 있는 그림이다. 위쪽에 살짝 늘어진 나뭇가지에 걸린 탐스럽고 샛노란 레몬까지,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다 마음에 들었다. 특히 고양이들은 고령에 (14살, 10살) 비행기를 너무 자주 태우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번에 데려오지 못하고 한국 친정에 남겨둔 반려묘, 순돌이와 찌루를 생각나게 했다. 동물들 너머로 보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파란 바다는, 가난했지만 겁 없고 행복했던 대학시절 배낭여행의 기억을 오랜만에 끄집어냈다.
고립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덜컥 충동구매를 하기는 했지만 1000피스 완성의 대업을 달성하기에 결코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주지사의 자택격리 명령으로 학교와 회사가 모두 문을 닫은 마당이라 애도 보고 밥도 삼시세끼 챙겨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한가로이 퍼즐 맞추기나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두 꼬맹이는 하루 종일 놀아달라 아우성이고, 온 가족이 24시간 집에만 머물고 있으니 설거지, 청소 등 해야 할 집안일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아 집에 틀어박혀 매일 똑같은 일상만 반복하다 보니 머릿속에는 잡생각만 늘어갔다. 괜히 미국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갈까? 혹시라도 가족 중에 누군가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암수술받고 새로 얻은 인생, 후회 없이 공부도 하고 인생도 즐겨보고자 결심했는데 왜 하루 종일 애들과 씨름하고 솥뚜껑 운전만 하며 하루하루를 허비하고 있을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고 또 꼬였을까.
아이들을 다 재운 뒤 남은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빨래까지 정리하고 보니 이미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었다. 아침 일곱 시 칼기상하는 상전님들 시중을 들려면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 적막함이 감도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 쉬이 접어버리기가 못내 아쉬웠다. 아이들의 눈을 피해 (눈에 띄는 순간 소유권은 그들에게로 이전될 것이 뻔하므로) 찬장 안에 처박아뒀던 '그 퍼즐'이 생각났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찌 생겼나 한번 열어나 보자 싶었다. 상자 안에는 정말 정말 작은 크기로 울퉁불퉁하게 잘린 천 조각의 퍼즐 조각들이 뒤엉켜 있었다. 참고용 그림이 인쇄된 종이도 1/4 크기로 접혀 들어 있었다. 매끈하게 잘린 가장자리 조각들이 눈에 띄어 대충 자리를 잡았다. 샛노란 색감의 조각들은 필시 레몬 부분일 터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각들을 맞춰나가다 목이 뻐근해 고개를 들었더니 이미 새벽 세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놀라웠다. 이토록 완벽하게 몇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깔끔하게 지운 경험이 내가 기억하는 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없었다. 낮에 아이에게 못되게 군 것에 대한 죄책감, 건강에 대한 불안감,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게 될 지에 대한 걱정, 미국 땅에 발을 들인 이후 계속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잠깐 자유를 찾았다. 비록, 눈이 시큰하고 머리와 목이 뻐근해지는 부작용이 따라오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재우고 밤마다 조각 맞추기에 탐닉하기를 일주일. 드디어 위시리스트 1번이 이 사태 아니었으면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을 전염병균의 독려에 힘입어 달성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쁘거나 후련하지가 않았다. 매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스트레스로 지친 심신을 달래던 단골 술집이 폐업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랄까? 다음 작품이 필요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 집의 '요술램프'로 등극한 아마존에 접속했다. 지난번에 퍼즐을 고를 때 어떤 그림들이 있었더라? 기억을 되새기면서. 그런데 맙소사. 대부분 품절에 주문이 가능한 것들도 예상 배송기일이 한 달, 많게는 두 달 뒤였다. 다른 사이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 많던 퍼즐을 누가 다 사간 걸까?
며칠 뒤 엉뚱한 곳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뉴스 채널인 NPR에서 자택격리 명령 덕에 사람들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 직소퍼즐 수요가 급증했다는 내용을 기사로 다룬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가장 큰 게임 회사 중 한 곳을 예로 들면서 소매상 판매가 지난해 같은 주간 대비 300% 이상 증가했고 판매 급증으로 재고량은 이미 거의 소진되었다고 한다. 각 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자택격리 명령을 시행 중인 상황에서 퍼즐 산업은 필수 업종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생산이 중지된 것도 퍼즐 실종 사태의 또 다른 이유였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이례적인 직소퍼즐 인기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 굉장한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 머리를 식히게 해 준다고.
신종 코로나는 아직 정복하지 못했을지언정, 팬데믹 스트레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치료제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치료제가 나한테만 잘 듣는 약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불과 몇 주 사이에 모든 상점에서 씨가 마른 것을 보면. 하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지. 약은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에 마스크 부쳐준다고 했지? 내가 너네 집으로 택배 몇 개 보냈으니까 같이 좀 보내줄래?"
"어 언니, 근데 배송 좀 오래 걸린대. 한 달도 걸릴 수 있다는데?"
"괜찮아. 가진 건 시간뿐이다. 어디 가서 돈 받고 좀 팔 수 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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