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및 유통 그리고 소비의 영역까지, 유튜브가 성장하면서 음악 생태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소비, 그중에서도 댓글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 영화, 미술 등의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는 일은 어떤 자격과 조건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유튜브의 댓글 기능은 이러한 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깊은 몰두를 뛰어넘어 색다른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고, 능동적인 감상과 여기서 파생된 다양한 방식의 재생산을 시작했다.
이러한 즐거운 현상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집단은 역시나 한국인들이다. 특히 잭 스타우버(Jack Stauber)의 작품이 눈에 띈다. 잭 스타우버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아티스트로, 독특한 음악 세계와 기괴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꽤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유튜버 '희귀종 비둘기'의 가사 번역 영상이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에 불을 붙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희귀종 비둘기'의 가사 번영 영상 아래 댓글창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는 사람들보다도 작품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원본 영상의 댓글이나 해외 네티즌들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유튜브가 만들어낸 이 현상은 진화하고 있는 대중문화 속에서 음악이라는 컨텐츠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소비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오감만을 이용한 일차원적인 감상과 창작자에게 맞춘 해석에 진부함을 느낀 것 같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라는 개인의 생각과 그를 둘러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투영해 작품에서 새로운 의미를 뽑아내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즐거움을 직접 만든다. 시적이고 낯선 잭 스타우버의 작품은 이런 활동이 실현되기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수많은 음악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았고, 본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수많은 의미가 담긴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해석에 목매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학적 논의를 차치하고서도 이 현상에 대해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없는 건 아니다. 너무 심한 의미부여는 작품에 대한 올바른 감상을 방해한다거나, 실제 창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떠드냐는 비판이다. 이에 더해, 어느 순간부터 진지함을 비웃음거리로 치부하는 온라인 여론은 자유로운 표현을 낙담시키는 또 다른 장해물이 되곤 한다.
하지만 아스거 욘(Asger Jorn)이 충고했듯 '예술 작품의 가치는 보는 이에 달려있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 존재하지만 적당한 규모의 감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한 발짝 더 가보자면, 수동적인 수용자로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볍게 던지는, 주관과 시대정신이 없는 밋밋한 감상들의 더미는 공허하다. 이러한 감상이 비난의 대상은 아니지만, 음악이라는 문화를 사랑하는 소비자라면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진지충', '선비' 같은 원색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글쎄,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의 따분함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수용자로서 존재하는 것에서 나아가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용감하게 풀어내는 이들의 발상은, 그들을 아티스트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번뜩인다. 작품을 소비하는 위치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의 위치로 걸어 올라간, 음악의 또 다른 길을 열어젖히고 더욱 풍성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코멘티스트'의 탄생이다.
잭 스타우버의 새로운 작품 <New Normal>과 그 아래 댓글창에 전시된 다양한 '코멘티스트'들의 작품을 감상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