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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임용 Mar 26. 2020

밴드의 마지막

마지막 트랙들에 대한 이야기




밴드라는 제도에서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자발적인 '해체'다. 다른 외부적인 요인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활동 종료를 공표하는 이 행위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물론 단순히 해체했다고 해서 그 밴드가 위대한 건 아니다. 내 기준에서 마음을 울리는 '해체'는 그 기저에 '마음만 먹으면 더 해먹을 순 있는데, 더 하면 추해질까 봐 그만둔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물론 '은퇴'라는 단어도 있다. 하지만 은퇴는 너무 무겁다. 대중에게 잊혀지거나, 구설수에 올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은퇴 '당한' 뮤지션들도 많다. 따라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뤄내고, 동시에 사생활도 깨끗한 이들에게만 명예롭고 주체적인 은퇴가 어울린다. 하지만 '은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에 걸맞은 뮤지션이라고 한들, 그것을 쉽게 입 밖으로 낼 수 있을까? 사람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명예롭게 은퇴한 이에게 번복이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민망하다. 게다가 번복이라고 하면 '돈이 쪼들려서 다시 기어 나오려는 건가?' 하는 반응도 있으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은퇴 번복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반면, 해체라는 행위에 있어 번복에 해당하는 '재결성'은 은근히 유쾌한 구석이 있다. 마치 해체를 하고 띵가띵가 놀던 멤버들이 '심심한데 다시 할까?'하는 느낌이랄까? 또한, 대놓고 '돈 때문에 나왔습니다'라고 해도 크게 밉지 않고, 오히려 쿨해보이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재결성은 번복처럼 자신이 뱉은 과거의 말을 주워 담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해체라는 단계를 밟은 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시간적으로 봤을 때 앞으로 나아가는 어떤 수순 같다. 그래서인지 해체는 은퇴보다 슬프지 않다. 재결성은 번복보다 가볍고, 그래서 언젠가는 일어날 일 같고, 일어나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어느 정도는 밴드도 의도한 면이 있을 것이겠지만, 리스너는 해체하는 밴드들의 마지막 앨범, 그중에서도 마지막 트랙에 상당히 깊은 감정을 담아 감상한다. 어떻게 보면 그 트랙은 한 밴드의 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곡의 내용이 엄청 낭만적이거나 슬프지 않더라도 (그런 곡들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밴드의 해체 전 마지막 트랙들을 소개한다.




Pavement <...And Carrot Rope>



인디록의 메시아 Pavement에겐, 대한민국의 밴드 이름이기도 한 '좋아서 하는 밴드'라는 별칭이 가장 어울린다. 다른 뮤지션들도 당연히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Pavement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믹싱이나 엔지니어링, 마스터링 등의 디테일한 부분은 귀찮다는 듯이 무시하고, 곡의 구성은 개나 주란 듯이 파괴해버리고, 감미롭게 정제한 목소리와 기교는 전부 가짜라는 듯이 냅다 질러버리는 Stephen Malkmus의 보컬이 인상적인 초기 작품들을 들어보자. 거칠고 투박하지만 곡 하나하나에 애정이 느껴진다. Pavement는 뮤지션으로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다거나, 돈을 많이 번다거나,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겠다거나하는 특정한 목표가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정말 단순히 음악을 하는 게 좋아서, 그것뿐이어서 음악을 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들에게 음악은 어떤 놀이 같은 것이었다. 복잡하고 미묘한 기술이나 상업적 성공을 위한 보장된 방법론은 불필요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믹싱 등 음악적 완성도에도 관심을 가졌다. 나는 여러모로 성숙해진 후기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긴 한다.) 


Pavement는 1999년 [Terror Twilight]를 마지막으로 해체했다. 큰 불화가 있었다기보단, Stephen Malkmus의 말마따나 Pavement로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것이 해체의 이유였다. <...And Carrot Rope>는 Pavement가 자신들의 끝을 언제나처럼 즐겁게,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방식의 음악으로 본인들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곡이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유별난 주제를 담거나, 더 극적인 구성을 취하거나 하는 것 없이 딱 Pavement만의 감성을 고스란히 담았다. 영화로 치면 큰 반전 없이 잔잔한 음악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런 풋풋한 엔딩이다. 억지로 감상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Pavement - ...And Carrot Rope (1999)




The Beatles <The End>



불후의 명곡 <Let It Be>가 수록된 동명의 앨범이 발매일 상으로는 The Beatles의 마지막 작품이나, 녹음상으로는 <The End>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의 마지막 곡이다. [Let It Be]는 아직은 밴드의 관계가 원만했던 시기에 미리 녹음해놓고 발매만 미뤄뒀던 작품이다. The Beatles의 11번째 스튜디오 앨범 [Abbey Road]의 마지막 트랙 <The End>는 "Love You"라는 구절을 발랄하게 반복하는 게 인상적인데, 말년에 이들 사이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고 들으면 어쩐지 씁쓸하다. 그래서인지 <The End>의 신나는 분위기에 마냥 공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을 사랑해준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로서는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어떤 밴드보다 드라마틱하고 위대했던 밴드의 마지막이 생각보단 초라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슈퍼 밴드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해피엔딩보다 더 여운이 남아 The Beatles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이런 끝도 있기 마련이라는 어떤 교훈을 몸소 보여준 것 같달까?


The Beatles - The End (1969)




언니네 이발관 <혼자 추는 춤>



언니네 이발관의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모던록 최고 명반이다. 이 앨범의 좋은 점은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4년의 공백기를 끝내고 나온 [가장 보통의 존재]는 보컬 이석원의 깨달음(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으로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감정들을 담아낸 앨범이다. 1번 트랙부터 9번 트랙까지는 전부 가장 보통의 존재가 느끼는 연약한 감정들에 대해 풀어내다가 마지막 트랙 <산들산들>에 가서야 '그래도 난 가야 하네 / 나는 나의 길을 가 / 소나기 피할 수 없어'라며 비로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던지는데, 정말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감격스러운 구성이 아닐 수 없다.


9년 뒤 이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앨범 [홀로 있는 사람들]을 발매했다.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트랙인 <혼자 추는 춤>은 '난 아무것도 아냐 원래 / 그래서 뭐 / 난 행복해'라며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부터 이어진 슬픔과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작은 의지를 요약한다. 언니네 이발관은 이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추며 '다 함께 몸을 흔들며 / 노래하고 춤추며'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세계를 함께 꿈꾸자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한다.


이렇게 보면 [가장 보통의 존재]와 [홀로 있는 사람들]은 장편 연작 소설 같기도 하다. 은퇴를 선언했던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 다시 펜을 잡고, 고전이 될 만큼 위대한 두 권의 책을 내고 홀연히 사라진 것 같은 전설 같은 이야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언니네 이발관 - 혼자 추는 춤 (2015)




장기하와 얼굴들 <별거 아니라고>



대한민국 인디 음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장기하와 얼굴들은 지난 2018년 마지막 앨범 [mono]를 끝으로 공식 해체했다. 해체의 이유가 매우 인상적인데, 그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앨범 [mono]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판단하에 박수 칠 때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알고 보면 다 별거 아니라고'라는 이 곡의 주제는 끝까지 그들답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장기하와 얼굴들이 사랑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별거 아닌 것'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밴드로서 분명 충분히 '별거'인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마지막에서까지도 그 '별거'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으며 우리를 위로해준다. 또한 밴드의 해체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고, 그렇기에 각자의 영역에서 스타트 라인에 선 서로와 스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듯한 인상이 들어 그 또한 참으로 다행이다. 밴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마지막 모습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 별거 아니라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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