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란제리쇼는 역사 속으로?
지난 2018년을 마지막으로 23년 동안 사랑받아 온 미국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화려한 판타지 란제리쇼가 올해 취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인권과 같은 아젠다에 힘이 실리면서 이 같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전시하는 쇼가 시대를 역행하고 있어 쇼의 효과가 매우 낮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개인적으로 감수성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온스타일을 통해 모델 리얼리티쇼나 빅토리아 시크릿쇼를 즐겨 봤기에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빅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고 제국이 언제나 영원할 순 없기에 자연스럽게 쇠하는 모습도 역사이리라.
마침 2주 전 뉴욕에서 폭염을 피해 잠시 에어컨 바람 쐬며 숨 좀 쉬고자 들어간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이번 매장 방문에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가볍게 슥 둘러보고 ‘이번 트렌드도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 뒤 팬티 3장 세일하는 곳을 보면서 역시나 안 예쁜 디자인들만 남았음을 확인하고 나오는 그런 루트를 탈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일단 매장이 확연히 비어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매장에 나 혼자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더워서 뉴요커들은 집 밖에 아예 안 나왔을 수도 있다)
또 매장 언니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나를 붙잡았다. 뉴요커들이 아무리 자본주의 앞이라도 보통 화가 좀 많이 나있는데 그들은 달랐다. 좀 절박해보였다. 한 스페니시 악센트가 센 언니는 여러 차례 혜택을 나열하면서 멤버로 가입하라고 했다. 나는 미국에 안 살아서 안 된다고 하니 크게 아쉬워 했다.
나도 뭐 더 이상 눈치보여서 안 되겠다 싶고 더위도 좀 어느 정도 식힌 듯해서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아름다운 디자인의 나이트가운이 보였다. 화사한 색상의 오리엔탈 패턴의 디자인이라 눈에 띄었다.
가격표를 보니 55달러 정도였다.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딱히 그 가격에 살 만큼 확 끌리진 않았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또 다른 친절한 언니가 말을 걸었다.
“Oh nice one! That is $25 today”
(아 그거 예쁘죠! 오늘은 단돈 25달러예요)
이게 무슨 어디 시장이나 보세 옷가게에서 들을 만한 충격적인 디스카운트 소식인가. 나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25 only? Are you sure?”
(25달러만요? 확실해요?)
그리고 그 언니가 잠시 계산대에 다녀오고 바코드를 찍어보더니 맞다고 하며 다시 돌아왔다. 오늘이 기회라고 하면서.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어디 아울렛에 가도 신상품을 50% 이상 할인해주는 빅시 매장이 있단 말인가? 그럴 확률은 아마 낮을 것이라는 게 그 순간의 내 판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나이트가운을 정확히 25달러에 구입했고 영수증에는 무려 29.5달러를 할인받았음이 적혀 있었다. 그때 내 손에 들린 핑크색 쇼핑백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그 콧대 높던 빅시가 페미니스트 운동 때문에 힘들어지긴 했구나...’ 어떤 시대의 흐름이란 걸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물론 그 매장이 유독 맨해튼에서도 매출이 잘 안 나오는 그런 곳일 수도 있지만 구겐하임 미술관 근처 맨해튼의 렉싱턴 가 주변이라 그럴 가능성은 좀 적어 보인다.
어쨌거나 그 2주 전 경험과 함께 오늘 접한 기사를 통해 패션계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페미니즘의 위력을 보면서 과연 앞으로는 어떤 굵직한 변화들이 있을지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랜드의 정체성 자체가 섹시함인 빅토리아 시크릿은 과연 어떤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나타날지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