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희감성 Aug 02. 2019

뉴욕, 폭염의 추억 하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뉴욕의 기록적 폭염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한 달 간의 미국 여행은 크게 네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뉴욕은 마지막 행선지였다. 특별히 내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곳이었기에 기대가 꽤 되었다.


하지만 막상 미국 땅을 밟고 보니 첫 목적지였던 캘리포니아부터 본래 미국 방문의 메인이었던 콜로라도, 반가운 이가 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더불어 조지아, 테네시, 노스 캐롤라이나까지 방문했다)까지 모두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노스 캐롤라이나 샬럿 공항에서 떠날 때까지도 그 지역에 정이 많이 든 상태여서 한국에 있을 때처럼 그렇게 크게 뉴욕이 기대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착륙하기 전 비행기 창가에서 본 맨해튼과 허드슨강이 너무 아름다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후 3시경 미니어처 버전의 뉴욕시티는 폭염의 햇살 가운데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었기에 그저 ‘내가 드디어 뉴욕에 왔구나!’ 싶은 마음만 부풀어 마구 설레기 시작했다.


‘Welcome to the New York City’를 본 뒤의 설렘이 가시기도 전에 일단 택시를 불러야 했다. 그때 내 판단을 후회한다. 그냥 기차를 탈 걸... 초행이라 무거운 짐 들고 여러 번 환승하기 힘들까봐 그런 판단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복잡한 역을 이동할 때 누가 내 짐을 가지고 갈까봐 (유럽에서 훈련된 의심병) 택시가 안전할 듯 싶었다. 리프트의 경우 셰어하면 30달러 정도 나와서 나쁘지 않았다. (뉴욕 물가 생각하면 그 정도는 저렴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택시를 부른 후 화면에 나온 동선이 매우 이상했다. 택시 타는 레벨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움직였는데 내가 잘못가고 있었다. 다행히 12분 뒤에 택시가 도착한다고 해서 내가 택시 도착할 시간에는 지정된 택시 존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택시 존이 여러 개인데 랜덤으로 선택된 내 존이 제일 안쪽에 있어 수많은 차량이 몰리는 와중에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나의 콜이 무려 네 차례나 거절당했다. 나는 이동하면서 영문도 모른 채 연거푸 거절당하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위도 예상 범위를 뛰어넘었다. 물어물어 도착한 Q존에서 마지막 택시를 기다리는 그 5분이 50분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본 아름다운 뉴욕과 달리 땅은 마치 지옥의 열기로 타오르는 듯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Hey, 소희! Please come to the M”

(소희! M으로 오세요)


“Oh, I called you to come to the Q zone”

(저는 Q존으로 오시라 했는데요)


“I know but you have to come to the M!”

(아는데요 일단 M으로 와야 해요!)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일단 정신 없이 달렸다. 이대로 또 거절 당해 폭염 속에 또 남겨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차들을 헤치고 도착해보니 셰어하는 택시에 다른 승객들은 이미 타있었고 제일 멀리 있는 Q존으로 들어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나 한 사람만 M으로 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미리 좀 알려주지... 나도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 걸리지 않고 다른 승객들과 동시에 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 그 중동에서 온 리프트 기사는 왜 거기까지 가있냐고 나무라는데 서럽고 화가 났다. 폭염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거절 당하면서 기다린 게 서러운 것보다 내가 졸지에 그 세 사람을 짜증나게 한 인간이 돼있는 사실에 화가 났다.


짐을 실으면서 좀 미리 알려주지 그랬냐고 일갈하고 나서 차에 타보니 이미 다른 승객들이 나를 기다리느라 화가 나있었기 때문에 나도 더는 따지면서 말하기가 싫었다. 그제야 그 기사도 나더러 오라고 한 게 미안하니 당신을 제일 먼저 내려주겠다고 했다.


바깥의 뉴욕의 날씨처럼 내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미국에서, 특히 뉴욕에서 느낀 건 이렇게 무질서한 것들에서 오는 혼란함이었다. 세계 최고 국가의 최대 도시가 반드시 질서정연하지는 않다는 걸 배운 것이다. 아 물론 스스로 인정한다. 나는 어느 정도 조직된 질서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독일에서도 잘 산 것 같다)


어쨌든 이것은 뉴욕 무질서 에피소드 중의 첫 에피소드일 뿐이지만 실질적으로 나에게나 그 뿔난 승객들에게나 대기시간으로 인한 불쾌감보다 폭염 아래 대기하는 사실 자체로 인한 불쾌감이 더 컸는지 모른다. 폭염은 이렇게나 내 뉴욕 여행 전반에 걸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2주가량 시간이 지나니 이마저도 미화가 된다는 게 놀랍다. 그래서 감사하다. 오늘 이곳 서울에서 뉴욕의 폭염 에피소드를 복기하면서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사무치게 그리운 걸 보면 내 기억미화력 덕분에 팍팍한 삶이 계속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폭염 덕분에 뉴욕병에 걸리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다. 물론 당장은 도지지 않고 언젠가 불현듯 뉴욕병이 도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고통스러운 더위도 기억 안에서 아름답게 안착한다는 것만 묵상해도 이번 여름나기는 성공한 듯 싶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굿바이, 빅토리아 시크릿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