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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희감성 Sep 10. 2019

비를 함께 맞아줄 수 있는 사람

흠뻑 젖어 빗물이 뚝뚝 떨어져도 함께라면

오늘 아침 그는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럴 때가 있겠지 싶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냥 두고 싶었다. 내가 제공한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나까지 그의 머릿속을 더 혼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하며 다시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래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나는 어떤 관계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개인으로서의 온전함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도 아마 그런 나를 더 편하게 여길 것이다.


아무리 시작하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연인이라는 포지션보다 나라는 개인의 포지션에 더 집중하는 게 온전하고 견고한 연인이라는 관계에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안정된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데 더 집중했을 뿐이다.


오늘 호우경보가 내려진지도 모른 채 나는 평소보다 일찍 마친 것에 들떠서 그에게 같이 산책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일을 마친 뒤 집에서 쉬겠다고 했고 나는 일하는 중에 메시지 확인은 했지만 미처 답은 하지 못했다. 그냥 여전히 무슨 심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겠거니 했다.


그게 설령 나와 관련된 이슈라 할지라도 그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묻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성숙한 태도와 자세로 먼저 이야기해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친 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회사 근처에 와있다는 그의 연락을 받았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집에 있는다며?”


“그랬지.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


그러고는 웃는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 생각들로 가득한 그런 얼굴이 아니라 그저 맑은 얼굴이다.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나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건 다행이다.


하지만 이내 비가 쏟아졌다. 하늘에서 그야말로 물폭탄이 떨어졌다. 비포장길 위 생긴 깊은 빗물 웅덩이에 발이 빠지는 건 예사였다. 옷을 입은 채 샤워한 꼴이 돼버렸다.


서로 말이 없었다. 어차피 말을 해봐야 빗소리에 소리가 묻혀서 소리를 질러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또 다시 약간 기분이 언짢아진 듯했다. 나도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 아니지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와준 건 고맙긴 한데... 그도 피곤할 텐데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였다.


사실 툭 터놓고 이야기를 언제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오늘은 그 적절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언젠가 내 마음을 전할 때가 온다면 그때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쏟아지는 비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와서 다 젖었잖아. 내가 미안해”


나는 오히려 그가 걱정됐다.


“아니야. 미안하단 말 하지 마. 내가 미안해. 비가 와서 다 젖으니까 짜증이 좀 났어. 미국에서는 차 타면 되니까 이런 일 없는데...”


“알아... 그러니까 내가 미안”


“미안하단 말하지 마 진짜... 내가 미안하니까. 내가 너무 무례했어”


그리곤 내 옆으로 와서 따뜻하게 내 어깨를 감쌌다.


“그냥 마음속에 있는 평안을 따라가. 나는 괜찮아. 원하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


내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만나면서 지나친 부담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전부였다. 내가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가 그걸 갚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그가 이 험한 빗속을 뚫고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함께 있음으로써 그가 새로운 힘을 내고 이겨내준다면 그걸로 고마울 것이다. 마치 오늘 빗속을 함께 걸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가슴 따뜻한 추억이 된 것처럼 내가 그에게 비를 함께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걸로도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그는 평소처럼 돌아왔다. 이런 메시지와 함께.


“너는 아름답고 친절한 영을 가진 사람이야.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있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웃으며 농담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이 말을 전할 날이 온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우리가 함께 했던,
앞으로도 함께 할
수많은 아름다운 날들도
모두 소중하게 기억하겠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 빗속을 걸은
오늘을 기억할게.
우리 앞에 어떤 험난한 일들이
펼쳐진다 해도
함께 할게.
언제나 네 곁을 지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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