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비롯해 모든 시대를 관통해온, 오래되고 강력한 물음이다. '정의'와 '불의'의 화두는 끊임없이 나타났다. 권력과 소유를 지키기 위해 온갖 불의를 일삼았던 지배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항해 정의의 이상을 구현하는 투쟁의 역사를 통해서.
플라톤의 <국가> 1권에는 두 역사의 대변자격인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 간의 치열한 논쟁이 소개된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정의에 관한 우리의 통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의 주장을 쉽게 뒤집기도 어렵다. 우리는 가혹하게도, 여전히 불의의 권력이 유효한 역사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법을 만드는 주체는 권력을 가진 통치자 집단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그런 통치자가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한 법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자들은 말할 것이다. '법이 바로 정의'라고. 그러나 약자들이 그 법과 정의를 따른 결과는 말 그대로 '남에게 좋은 것', 다시 말해 '강자에게 좋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 존재냐"고 반문하며 그의 애매한 도식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부터 토론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해도, 그들도 때로는 실수를 저질러, 자신에게 불이익되는 법을 제정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닐 때도 있다'는 것이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엄밀론'으로 이에 대응한다. "우리가 의사를 의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의사가 때때로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가 병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의 통치자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 하는 '통치자'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이며, 통치자의 본질을 구현하는 '통치자'이고, 이상적이고 완전한 개념의 '통치자'다. 하지만 이러한 엄밀론은 오히려 트라시마코스 자신의 논변을 흔들어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앞서 선생이 말한 엄밀한 뜻의 의사는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요, 아니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요? 참으로 의사는 누구인지 말해보시오." 소크라테스의 반문에 트라시마코스는 당연히 의사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의사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벌기 때문에 의사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환자의 질병을 고치는 한에서 의사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그가 말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란, 통치라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자, 이른바 시민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통치자가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묻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통치자는 누구인지 말해보시오."
트라시마코스는 엄밀한 세계를 떠나, 다시 일상적인 경험의 영역으로 도피해버린다. "선생, 당신은 양치기가 양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통치자의 생각 또한 양치기가 양에 대해 갖는 태도와 같이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이 내세운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마저 부숴버렸다. 엄밀한 통치자의 개념은 없어지고, 힘으로서의 통치자만이 남아있다. 통치자의 힘은 자기이익과 동일시되며, 약자들에게 있어 정의란 '남에게 좋은 것'에 다름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정의로운 자는 항상 불의한 자보다 덜 가진다. 정의로운 사람은 항상 손해만 볼 수 밖에 없고,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불의 만이 그들을 자유케 하리라.'
트라시마코스가 보는 역사는 가장 완전한 불의를 실현한 자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역사다. 사기꾼이나 도둑 처럼 작은 불의를 행한 이들은 비난도 받고 처벌도 받지만, 누군가가 '전면적인 불의'를 저질러서, 아예 나라를 통째로 훔쳐버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는 역사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역사를 살아왔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불의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진다. "트라시마코스 선생, 강도단이나 도둑 무리가 공동으로 불의한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만약 그들이 서로서로에게 불의한 일을 행한다면, 그들이 그 일을 조금이라도 수행할 수 있겠소?" 소크라테스의 일갈이다. 불의는 그 자체만으로 존립할 수 없다. 불의를 도모하는 무리에게도 의리와 신의가 있어야만 한다. 아무런 의로움이 없는 곳에서는 불의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역사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다해도, 권력이 소유를 지키고자 온갖 불의를 행하는 지배의 역사라 하더라도, 늘 그 역사에 대항해 정의를 실현하는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불의의 역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기에, 정의를 향한 투쟁의 역사야말로 인류의 삶과 역사를 지탱해온 진정한 역사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역사에 참여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한 아테네의 제국주의, 패권주의, 불의한 타락은 그리스를 병들게 했다. 소유와 권력을 지키려는 강자들, 그리고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아첨꾼들이 득세하던 세상, 불의의 권력이 유효한 세상에서 당당히 소리쳤던 외침이 소크라테스였고, 그리스의 몰락은 우리에게 어떤 역사가 진정한 역사인지 보여준다.
근대 열강들의 제국주의, '배부른 돼지들의 자본주의'로부터 잉태된 현대 사회는 2500년전 그리스를 너무나도 닮아있다.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패권 국가들, 자본에 충성하는 지식인들.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에 참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