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30대를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내가 책을 쓰겠다며 잠시 한국에 들어왔더랬다. 20대 초반에 집을 떠난 이후로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늘 그랬듯 대부분은 내 일에만 집중했다. 밤새 글을 썼고 동틀 녘에야 잠에 들었던 생활을 했다. 그랬기에 밤사이 벌어지는 일들을, 그 중에 특히 아빠의 행동변화를 알 수 있었다.
아빠는 밤새 화장실을여러 번다니셨고,자다가 큰소리를 지르셨다. 고요한 새벽 기운으로 글을 쓰다 깜짝 놀라 아빠에게 가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코를 골고 주무시고 계셨다. 낮에 신발을 신고 걸으실 때는 유난히 발을 끄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생각하여 엄마에게 여쭈었으나 특별한 진단은 없었다 했다. 정기적으로 한의원에 다니며 침을 맞고, 몸에 좋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 하셨다. 그렇게 특이행동들도 여러 차례 반복되니 익숙해졌다. 나중엔 좀 유난스러운 잠꼬대라 생각했다.
탈고를 한 후에는 바로 독일로 출국을 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친할머니의 부음을 들었으며, 그로부터 세 달 후에 아빠가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는 오빠의 연락을 받게 된다. 아빠에게 다가온 낯선 병명에 우울한 독일 날씨 속에서 울었다. 내가 잘못한 일들만 생각났다. 한국에 있을 때 병원에 모시고 갈 걸, '잠꼬대 많이 하는 증세' 또는 '발을 끌고 걷는 증세'로 검색을 한 번만 해 볼걸 등등 자책과 후회에 괴로웠다.파킨슨이라는 병명에 대해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아직 60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아빠에게 덮친 절망적인 병이라는 생각에 비통해 울면서 몇 날 며칠 일상이흘렀다.
아빠는 국내 파킨슨병 전문가로 손꼽히는 서울대병원 김한준 교수님에게 진단받은 이후부터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셨고, 처방된 약을 꾸준히 드셨으며, 단 하루도 누워 계시지 않고 운동하신다며 소일거리를 매일같이 찾아 하셨더랬다. 겨우내 황토방에 쓸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전기톱으로 자르고 장작을 패는 일 또한 쉬지 않으셨다. 그만하시라고 만류해도 아빠는 괜찮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후 독일에서 돌아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는 본인 스스로 파킨슨병이 아닌 것 같다고 하셨을 정도로 한결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그렇게나 낯설었던 파킨슨병은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난 다시 아프리카로 출국했고, 분기별로 한국으로 출장을 올 때마다 아빠의 모습에 안도했다. 약간 근육이 불편할 뿐 잘 드시고, 잘 움직이시는데 그 연세에 그 정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딨냐는 엄마의 말씀은 긍정적인 힘이 되었다. 아빠 친구분들 중에는 이미 몇 분이나 암으로 돌아가시고,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 생활하시는 분들도 계셨던 터라 이기적인 마음 한편으로 위안도 했다. '그래, 이 정도는 심각한 것은 아니야. 우리 가족에게만 이런 불행이 온 것은 아니야'라고 말이다.
마흔이 되어 낳기만 하면 부모가 되는 줄 알았던 내가 육아를 어찌할 줄 몰라 첫돌 무렵의 아픈 아이를 안고 친정에 돌아왔을 때, 그리고 당분간 친정에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건 아빠였다. 아장아장 걷는 외손주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셨더랬다. 새 생명이 들어옴으로써 온 집안에 생명력이 넘쳤다. 부모님 두 분이 지내시는 황토방에서는15개월 손주를 앉혀놓고 큰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나는 동안 숨 막히게 이어졌던 잦은 병치레가 조금씩 나아졌다. 덕분에 나는 육아휴직 기간을 거쳐 퇴사를 하고 부모님 곁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준비기간을 거쳐 직종을 바꿨고, 창업을 했고, 그리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일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아빠의 눈빛은 한결같이 근심 걱정이었다. 나를 볼 때마다 아빠는"힘들게 일 너무 많이 하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이른 아침 바삐 현장으로 가기 위해 넓은 마당에서 후진으로 움직이는 내 차가 멀리 떠날 때까지 아빠는 늘 한결같은 표정으로 서서 지켜보셨다. 파킨슨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가면 증후군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딸을 바라보는 근심 걱정인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때로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사이드 미러로 바라보다 운전하는 동안 눈물이 툭툭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의 보살핌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철들지 않은 마냥 어린 사춘기 딸이었다.
아빠는 올해 들어 부쩍 누워 계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걷는 것도 힘들어하셨고, 주차장으로 내 차가 들어올 때마다 바라보고 서 계시는 모습을 보면 아빠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른쪽 팔이 떨리고 있었다.
파킨슨 진단 8~9년이 되도록 약을 점점 줄여 최소화하고도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학회에 보고하려 한다 했던 서울대 주치의의 소견이 너무나 고마웠었는데 말이다. 최근 들어 부쩍 불편해 보이는 아빠의 모습은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마당에서 가족끼리 오빠의 캠핑카를 펼쳐두고 고기를 구워 먹는 자리에서도 불편하다며 일찍 자리를 뜨시고 황토방에 들어가 누우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내가 아빠가 더 힘들어지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는 매일 꿈을 꾸잖아. 꿈속에서 또 그렇게 싸워요. '야, 너 이리로 와봐 인마' 하면서 매일 이 친구와 싸우고, 저 친구와 싸우고 자면서 얼마나 팔을 휘두르시는지 몰라"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엄마의 말씀에 오빠와 나는 마른 웃음으로 답했다. 우리는 수술로 고칠 수 없고, 약으로 완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빠가 언제고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지내실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인 파킨슨 환자의 가족이다.
"아빠는 건강하고 자유로웠고, 두려울 것이 없는 청춘이었던 그때 그 영광의 시대로 매일 돌아가 사시는 거야. 그곳에서 반가운 친구들도 만나고, 동네 건달처럼 실컷 싸움도 하고, 현실에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꿈속에서는 자유롭게 쓰시는 거니까 대리만족도 되겠지. 아빠를 보며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낭만적인 병이라고 생각하자. 아빠는 매일 꿈속에서 행복한 여행을 하시는 거야"
오빠의 말에 끄덕끄덕 하는 한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었더랬다. 아빠가 매일 꿈속에서 현실의 불편한 몸을 뛰어넘고 낭만 청년이 된다는 생각을 하니, 파킨슨 환자의 특징인 엄청난 잠꼬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슴 아픈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빠의 파킨슨 지병은 피할 수 없는 긍정적인 현실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아빠가 초라해지고 안쓰러운 분이 아니라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분이라 받아들였다.
외손주 생일날 아침 아빠가 2층으로 가지고 올라온 하얀봉투에는 힘들게 손수 쓰신 글씨가 적혀 있었다. 평생 서예를 하셨던 아빠가 파킨슨 환자가 되며 가장 먼저 잃어버린 필체...
(손에 힘이 없어 가늘고 흐린 글씨를 쓰시는 분이손주에게 깨끗하게 적어 주기 위해 몇 번이나 새로 고쳐 쓰셨을까)
아빠는 올해 봄부터 무릎이 아프다 하셨고, 모시고 간 정형외과에서는 오른쪽 무릎의 연골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파킨슨 환자에게는 인공관절 수술을 권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고 주저하다가 서울대 주치의로부터 '수술을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를 듣고 결심하게 된다. 아빠는 8년 전에 심장에 스텐트 시술을 한 이유로 복용하는 약 때문에 전신마취를 해야 했다.
아빠는 인공관절 수술에서 깨어나시고 차츰 마취가 풀리면서 예전처럼 잘 드셨다. 간병인에게 아빠가 말씀이 많이 없는 편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농담도 잘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안심을 했다. 그렇게 수술 일주일이 되는 화요일 오전, 아빠가 밤새 잠을 못 주무시고 돌아다니며 넘어지셨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다. 아빠는 이미 엠뷸런스에 실려 있었고, 엄마는 몹시 당황해하셨다. 정형외과 집도의는 아빠를 어서 신경과가 있는 대형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고했다.
음압 격리실에 들어갈 수 있는 보호자는 한 명이었고, 입원이 결정되기까지는 내가 아빠 옆에 있기로 했다. 오빠는 출장 중이라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응급실 당직의사가 몇 차례 다녀가고, 외과의사가 다녀가고, 신경과 의사가 오기까지 내가 본 아빠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정조명을 바라보시며 "누가 불을 때니? 왜 연기가 나?"라고 물으셨다. 창문 유리에 붙은 불투명 시트지를 바라보시며 "댐에 물 빼는구나. 추운데 왜 자꾸 물을 빼니?"라고 말하시며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으셨다. 3분 간격으로 새로운 꿈을 꾸시며 손을 휘젓고, 외손자가 차도에 뛰어든다며 이름을 부르며 보호하려 하셨고, 고모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셨냐고 하시고, "아이고, 고구마 참 맛있게 먹었다"며 입을 닦으시고, 손으로 입가를 연신 움직이시기에 여쭈니 양치질을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계속 "엄마는 언제 오니?"를 물으셨다.
그런 아빠의 낯선 모습을 보며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의사는 '파킨슨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섬망 증세'라고 말했다. 전신마취 후에 낯선 환경, 간병인이라는 낯선 사람과 있으면 더 심해지는 일시적인 증세로 아빠에게는 익숙한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의견에 따라 즉시 보호자는 엄마로 결정되었다.
간병인은 아버지가 정형외과에 입원해 있던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휴대폰으로 집에 설치된 CCTV를 하루 종일 보고 계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일어났나 보네", "지금 우리 손주가 유치원 간다", "지금 우리 딸이 출근하네"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 빨리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서 우리 가족들 춥지 않게 황토방에 불 때 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더라고 말했다. 아빠는 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엄마와 나는 펑펑 울었다. 아빠가 한 달 동안 편하게 물리치료까지 잘하고 나오시라고 간병인을 붙여드리고, 혼자 병원에 계시게 한 것이 지금 아빠를 아프게 만든 우리 잘못이라는 죄책감에 모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입원 첫 날밤에는 더 심해져 3분 간격의 단편적인 꿈속에서 링거도 잡아 뜯고 하셨다. 온통 피로 물든 시트지를 바꾼건 물론 가슴으로 통곡한 엄마였다. 다행히 삼일 만에 암모니아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일시적인 섬망증도 차차 나아져 이틀째부터 아빠는 3시간, 6시간씩 잠을 푹 주무시기 시작했다.
"지금 아버님은 집이 가장 좋은 환경일 것입니다. 집에 가시면 모든 게 금방 좋아집니다. 무릎만 괜찮아지시면 집으로 모셔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신경과 전문의는 CT, MRI 검사를 토대로 아무 이상이 없으니 집으로 모셔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최선의 방법을 권고했다. 입원한 지 나흘 째, 아빠는 섬망증도 거의 사라져 일어나 그 좋아하시는 TV도 보실 수 있는 일상적인 파킨슨 환자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다행히 정형외과 협진으로 물리치료도 병행하신다.
코로나19로 인해 입원병실에는 가보지 못하고, 1층에서 필요한 짐만 올려드리고, 엄마와 전화 통화로 상태를 공유한다. 영상통화로 외손주의 모습을 보고는 활짝 웃는 아빠를 보며늦게라도 출산하여 손주 한 명 보여드리기를 잘했구나 생각한다. 응급실에서 아빠가 섬망증으로 한참 힘들어하실 때 엄마가 "여보, 시하 데려올까?" 라고 묻자 꿈속에서도 손주 생각에 깨어나 울먹울먹 하셨던 아빠다.
나를 평생 보호해 온 그분에게 이제는 내가 그분의 보호자가 된다는 건 말이다...
아픈 아빠의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리고 매 순간 꿈속에 빠져 계신 아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나 크고 높았던 아빠의 위엄이 이제는 내가 보살펴야 하는 아이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은, 한없는 보호본능으로 아빠를 대하는 시간이 왔다는 것은 마침내 내가 철이 들어 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나 보다.
평생 나를 어린애라고만 생각하여 상의도, 결정도 맡기지 않으시던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며 의견을 구하고, 그동안 이 모든 것들을 혼자 해왔던 오빠가 부재한 시간을 대신해 뛰어다니며 해결하는 동안에 말이다. 연세 드신 부모님을 챙겨 드리는 자식이 느끼는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마흔네 살에 이렇게 철이 들어버렸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다시는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꿈과 싸우는 우리 아빠는 오늘도 편안하게 잠에 드실 것이고,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실 것이며, 언제가 되었든 그날까지 낭만 파킨슨 환자로 행복하게 지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