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성인 adhd 아들은 소아 adhd, 우리는 정상일까요?
"엄마 앵그리!"
그것은 아이가 처음으로 말한 영어 단어였다.
기저귀를 아직 다 떼지 못한 저 녀석이 처음 말한 영어 단어가 ‘angry’라니,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역시나 좋은 엄마가 아니며, 육아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에 또다시 무너졌다.
‘정신병자’인 엄마 옆에서 자라는 아이의 리액션(!)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더 깊이 가라앉았다. 밥 한 술 뜰 여유도 없는 바쁜 일상,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들. 그때 그 사업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나의 불안정한 정신만큼 아이의 트라우마도 비례하여 자랐나 보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는 정신과 주치의의 소견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 불안장애, 기분장애, 양극성 정동장애 — 다 합쳐 통칭 조울증이 내 주병명이었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아이는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아이는 유치원을 다니는 동안 차분하고 친구들과 잘 지냈고,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선생님은 아이를 “참을성이 많고 차분하며,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다 갑자기 2학년 2학기 초부터 담임선생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독 교실에서만 아이는 화를 참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공간에서는 그런 모습이 관찰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에서 이미 유난하기로 알려진 몇몇 짓궂은 아이들이 주도적인 놀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우리 아이는 방어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정도가 폭발적인 것이었던 데다 담임교사의 편향된 태도까지 더해져, 아이는 교실에서 혼자 고립되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엄마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부·외부 선생님들을 찾아가며 알아갈수록 부모로서 속상한 건 물론이고, 외롭고 힘든 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 앞에서 짐승이 털을 곤두세우고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이유지. 지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게 정상 아니야? 그럼 놀림을 당하고 가만히 있어야 해?”
아이의 상황을 들은 지인들이 옆에서 더 난리였다.
“그게 왜 문제냐, 놀리는 애들을 혼내야지!”
되묻는 말에 나는 짧게 답했다.
“응, 요즘엔 그게 문제래. 화를 내는 아이가 문제래.”
솔직히 그 상황에서 나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빨리 그 상황에서 내 아이를 꺼내고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내 아이가 전문가의 도움으로 나아지길 바랐다.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한편으로는 ‘이제 터질 게 터졌나 보다’ 싶었다. 그동안 아이에게 화를 내던 내 모습을 어찌 거짓 없이 부정할 수 있을까. 넘치는 모성애에서 터져 나온 죄책감으로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불같고, 물 같고, 나무 같고, 쇠 같고, 흙같이 매 순간 달랐던 엄마와 살아온 아이의 손을 잡고 우리가 함께 가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힐링유’는 추천받은 병원 중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아이의 여러 검사가 시작되었고, 나는 엄마로서 점점 더 위축되었다. 매일 학교를 가겠다는 아이의 등교를 말리지 못했고,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시기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주눅들지 않고 학교를 가는 아이를 위해 살았고 버텼다.
아이는 ADHD 진단을 받았다. 놀랍지 않았다. 이미 내 병명 중 하나가 ‘성인 ADHD’였기에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심각하지 않네, 다행이다' 그 생각이 먼저 든 건 내가 이미 정신과 진료를 받아온 덕분이었을까. 나는 아이와 마치 준비된 사람들처럼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하라는 대로 성실하게 아이의 치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놀이치료와 진료, 6개월이 지나자 한 번으로, 또 6개월이 지나자 2주에 한 번으로 치료 횟수가 줄었다. 부담스러운 치료비용은 숫자에 불과했다. 나는 지금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보호자의 책임감, 그리고 그 모든 원인 제공자로서의 죄책감이 그 시간들을 견디게 했다.
엄마는 불안장애와 육아우울증을 꾸준히 상담 받았고, 놀이치료 선생님은 한 시간 동안 아이의 감정을 해소해 주기 위해 모든 시간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정신과 원장님과 놀이치료 선생님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진료와 치료를 해 주셨다.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모인 덕분이었던가. 놀이치료만 끝나고 나오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한결 후련한 마음으로 엄마 또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봄날 오후, 햇살이 집 안 깊숙이 들어왔다.
하교 후에 거실에서 간식을 먹는데 아이가 묻는다.
“엄마, 오늘 뭐 했어?”
“응? 엄마?”
“나는 오늘 1교시에 국어 수업을 했는데, 엄청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하교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이어졌다. 나는 표정의 동요 없이 끝까지 듣고 있었지만 사실은 가슴이 벅차올라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이가 이제 나에게 그의 시간을 공유하려 하는구나! 그리고 아이는 엄마의 시간을 궁금해하는구나! 그동안 아이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응, 좋았어’가 전부였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자세히 말해주다니 놀라운 변화였다. 아이의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치료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빠짐없이 6개월. 힘들었지만, 아이가 나아지기만을 바라며 버텼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병원에 함께 가주는 것이었다.
아이는 아침에 약을 먹고, 나는 잠들기 전에 약을 먹으며 아이보다 내가 먼저 지치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치료를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다. 3학년이 되자, 나는 모든 사교 모임을 중단하고 아이와의 시간에 집중했다. 그제야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내 아이의 상황이 이러한데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모임을 갖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무기한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내 생활은 100% 아이의 생활에 맞추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픽업하고, 함께 공부하고, 책을 읽고, 리코더를 연습했다. 미술숙제와 독후감 숙제도 함께 했다. 공연을 보러 가고, 미술관에 다니며 우리는 더 바빠졌다.
시간은 느리게 돌았지만, 노력의 방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3학년 2학기, 놀이치료 일 년이 되자 아이는 눈에 띄게 변했다. 행동이 줄어들고, 집중했고, 차분했고, 성적이 올랐다. 담임 선생님은 놀라며 말했다.
“정말 모든 면에서 성숙해졌어요.”
칭찬이 시작되자 아이는 스스로를 믿기 시작했다. 공부 잘하는 모범적인 아이가 되었고, 나 또한 조금은 잘하는 엄마라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제 우리는 투닥거리다가도 곧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다. 아직 보통의 엄마와 아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인내하며 견뎌온 치료의 시간들이 앞으로 큰 힘이 되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당시 빠르게 시작한 우리의 정신과 치료는 아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택이었을 거라며 나는 매일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차라리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시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정신과를 간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