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 친구는 20년 전 미국으로 갔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국밥을 나르며 혼자 몸으로 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명절이면 나는 친구 대신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도 나도 울었다.
친구들은 내게 "너 또 *정이 어머님 때처럼 울면 안 돼!" 강하게 말했다. "알았어. 안 울어" 그날은 비가 내렸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어머님 마지막 뵌 모습을 그렸다. 슬픔은 여기에 놓고 내리자 다짐했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나는 친구를 꽉 안고 등을 토닥였다. 눈 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고개를 쳐든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다음 주면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간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성당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참 예뻤다. 창밖 풍경에 한참 취해있는데 웃옷을 벗고 밭을 매고 있는 60대 즈음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더 돋보였다. 시골길이 끝나자 작은 읍내가 나왔다. 짝사랑하던 남자아이네 주유소는 교차로에 그대로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작게 불러보았다. 중학교 졸업 후 한번 도 본 적이 없었던 그 아이는 미소년에 머물러 있었다.
어, 여기? 성당까지 가는 길이 어렸을 때 살던 곳이었다. 밤마다 쫓겨나 엎드려있던 논바닥도 겨울이면 추위를 막아주던 큰 배수관도 사라지고 택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성당이 자리한 곳은 산이었지 아마. 어둡고 추운 밖에서 창을 통해 들여다본 행복해 보였던 그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할까?날이 밝을 때까지 4차선 도로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던 그 길을 친구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나는 조금 더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그때를 이겨냈던 것 같다. 이제는 알아버렸다. 그때와 내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은 미래라는 가식적인 결과물을 향해 지금 또 이겨내고 있다.
친구는 노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걱정 가득인 나와 달랐다. 내년에 서른 인 아들과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있단다. "내가 노년 준비를 1년 늦게 시작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아."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이구나! 감탄했다. 나도 노노가 서른이 되면 이렇게 멋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난, 한국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 무거운 뚝배기 서너 개를 쟁반에 담아 옮기며 일했는데 뭐는 못하겠니?"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일을 하지 않은 나는 어깨와 목에 파스로 도배를 하고 있다. "너, 참 대단하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너의 일 IS 뭔들 생각할게"하며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친구가 낯설어졌다. 내손을 꼭 잡은 철학자도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