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곧 멸망한다.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이 단 한 대 있다. 이 우주선에는 인류 재건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탑승할 수 있다. 누가 우주선에 타야 할까?
친구는 명망 있는 학자나 엄청난 능력을 겸비한 사람을 태워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대체 누가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우리처럼 기타나 치고 노래 좀 부를 줄 아는 한량을 태우겠냐며, 더 가치 있는 사람을 태워야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사회적으로 더 가치 있는 직업과 능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쩐지 씁쓸해졌다. 내가 생각해 봐도 그 우주선에 나 같은 사람이 타면 얼마 못 가 인류가 멸망할 거 같았다. 하지만 친구의 말에 동의하기는 싫었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 능력이 우선시 될 수는 있어도 그 가치가 다른 가치를 월등히 앞선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가치체계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 걸까.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생각에 관한 생각』(2018, 김영사)에서 전문 능력과 인지편향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가 말하길 어떤 분야의 전문성이란 “작은 능력의 대규모 집합”이다. 예컨대 암기를 잘하면 그냥 암기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암기력과 수 읽기 능력, 연상 기억력 등이 체스에서 동시 발현되면 그 사람은 체스 전문가가 된다. 문제는 이 전문성의 가치이다. 객관적인 가치를 따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타당성이 증명돼야 한다. 그는 어떤 전문성의 사회적 타당성을 따져 보려면 그 분야의 세계가 체스처럼 굉장히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사회적 효용가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변수가 너무도 많아서 능력의 효용가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 그냥 그 사람이 더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카너먼의 동료 게리 클라인Gary Klein은 전문 능력이 “재인再認 기반 결정”, 즉 반복된 경험으로 학습된 고도의 직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이는 비전문가인 사람들도 충분히 훈련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월등한 사람이라 무언가를 갈고닦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인간의 사고 시스템이 그렇단다. 그러니 어떤 발레리나를 보고 ‘대단한걸…’ 하고 경이로워할 수는 있어도, 그를 보며 ‘저 사람은 정말 월등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생뚱맞은 반응이 되겠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측정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이끌어낼까? 애석하게도 주로 작용하는 것은 냉철한 비교 분석이 아닌 인지 편향이다. 말콤 글래드웰Malcom Gladwell은 『블링크Blink』(2020, 김영사)에서 미국인이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을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대통령으로서 그의 유일한 자질은 그 역할의 적임자처럼 생겼다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전문성이 아닌 얼굴을 보고 뽑았다는 말이 된다. 결국 무엇이 더 타당하고 가치 있는가를 열심히 따져 보아도 선택자의 선입견이나 가치 판단이 타당성을 앞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웃픈 결론에 이른다.
나는 인류 재건을 위한 우주선에 전문가들만, 소위 말하는 각 분야의 엘리트만을 골라 태우는 게 과연 옳은가 다시 생각해 봤다. 물론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하다. 질병관리청장에 뜬금없이 설거지의 달인을 앉힐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관련 지식이 있다고 사회에 그만한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적임자를 택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만 보면 무슨 무슨 부처에 해당하는 무슨 무슨 전문가보다는 누구누구의 친구, 누구누구의 학교 동창 혹은 선배가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 거 같다. 그러고는 "내가 아는데 일 잘하더라"라고 말한다. 어찌어찌 전문성도 있고 사회에 기여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와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공정하다는 착각』(2020, 와이즈베리)에서 고도로 엘리트화한 정치인들이 일반 시민의 담론 형성을 방해하고 그들을 담론장에서 배제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샌델에게 전문가들만이 가득 찬 우주선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저으며 말할 거 같다. “그게 과연 누구를 위한 우주선인가?” 우리 세상에는 고도의 전문가보다 고도의 일반인이 더욱 많은데, 그들이 일반 시민을 대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우주선에 기타나 좀 치고 노래 좀 부르는 한량을 태워야 하는 이유는 못 찾겠다. 저희가 왜 당신을 태워야 하죠? 인류를 위해 뭘 하실 수 있죠? 저요? 저는 기타 오래 쳤는데 때려치웠고, 요즘은 글 쓰는 게 좋은데,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고, 손재주가 좋은 편인데 딱히 만들어 놓은 건 없으며, 고양이 돌보기를 잘해서 친구 고양이의 사랑을 뺏어 온 전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취업도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다. 질문만 있고 대답이 없는 게 이 문제의 문제랄까.
여기서 뜬금없이 드라마 워킹데드가 생각났다. 나는 극 중 스티븐 연이 연기하는 캐릭터 글렌을 제일 좋아했는데, 그가 초반에 활약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 릭 일행이 좀비 무리를 피할 방법을 찾는 상황에서, 너드처럼 보이기만 했던 글렌은 즉석에서 멋진 전략을 펼쳐 보인다. 주변 지리를 달달 외며 좀비를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그를 보며 데릴은 묻는다. “너 근데 뭐 하던 놈이었냐?” 글렌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피자 배달부요. 왜요?”
그러니까, 나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보고 싶다. 그래. 전문가를 잔뜩 태운 우주선을 날리자. 그런데 그 우주선을 생활의 달인들로만 가득 채우는 거다. 설거지의 달인이나, 식물 키우기의 달인, 빨래 빨리 접기의 달인, 주차의 달인, 사람 많은 음식점에서 똑 부러지게 주문 잘하기 달인, 재수 없는 상사 상대하기 달인 등. 그들이 만들어가는 미래는 어떨까. 생활의 달인들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누구를 태우든 도긴개긴일 거 같다.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하니까. 그러니 나는 자꾸만 유치한 상상을 하게 된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부랴부랴 뛰어나와 어쩌다 인류를 구하는, 어정쩡한 모습의, 뭐랄까, 얼레벌레 히어로랄까? 이들을 기념한 동상도 아주 유니크할 것이다. 고무장갑을 낀 손이나 오토바이 헬멧, 그것도 아니면 같이 사는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린 히어로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