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문학동네
2019. 5. 24. ㅣ 14,500
누구나 정답을 원한다. 그러나 정답을 찾아 헤맬수록 해답 없음과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찾기 위해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이 아닌 ‘마침내’라는 선명한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저 착각일 뿐이라도, 그를 위해 보낸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는 그 노력을 통해 해답에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 걸음을 내디디지 않고서는 몰랐을 새로운 세계를 대면할 수 있다.
시인은 ‘마침내’를 열렬히 갈망하는 사람 같다. 그들은 자신에게 비친 최초의 여명에 닿기 위해 주변을 조금씩 감각하며 나아간다. 수수께끼를 두고 긴 시간 골몰하듯 걷고 멈춰서기를 반복하는 그들의 조심스러운 시도는, 수수께끼 같은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보편적인 마음과도 닮았다.
“나에게는 세 가지 수 수게끼가 있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다.” -327p, 「후기」
시인 심보선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세 가지 있다. 영혼과 예술 그리고 공동체이다. 2019년 문학동네에서 펴낸 그의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는 세 가지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담겨 있다. 그가 장기간 작성해 온 산문과 칼럼들은 그의 주된 관심을 드러내듯 각각 영혼, 예술, 사회, 총 3부로 묶였다. 앞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을 두고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그의 좌뇌"와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의 우뇌"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완전한 “좌우합작”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 말을 증명하듯 시인은 이 책에서 문제를 사회학적 측면에서 분해하고 다시 시적 세계로 편입하는 강한 역동성을 보여준다. 단단한 논리와 느슨한 영혼의 대화가 해답을 갈구하는 마음을 더욱 입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영혼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미명을 맞이하는 나는, 내가 시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저 미명 이후의 아침만이 나의 유일한 윤리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23p, 「영혼의 문제」
“왜냐하면 그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며 언제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잉여의 감각 속에서, 예감 속에서, 텅 빈 침묵 같지만 사실은 넘쳐나는 수다의 말로, 서늘한 금속 같지만 사실은 뜨겁게 달아오른 칼날의 이미지로 출몰했다 사라지기 때문이다.”-135p, 「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은 결국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영혼이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무엇도 아니고 우리를 초월적인 곳에 데려다 주는 신비한 힘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인간에게 무언의 요구를 지속한다. 사람은 그 요구에 자신의 언어로 응답하고 타인의 영혼에 손을 내민다. 영혼은 일상의 숨소리에 녹아 있으며 때로는 경이로운 모습으로 발현되었다가 때로는 미숙한 중얼거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미명 이후의 아침만이 나의 유일한 윤리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순간 낯설고 날카로운 이미지로 나타나는 모종의 신호와, 그에 반응하는 행위의 총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를 제공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비추는 것이다.
그의 좌뇌와 우뇌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한 갈망이 그의 한쪽 뇌를 사회학자로, 한쪽 뇌는 시인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말하며 “양쪽 다 불쌍한 나의 뇌여”라고 자조한다. 그러나 두 뇌의 합작은 강한 시너지를 낸다. 1부에서 2부로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그가 영혼의 문제에 천착하여 사회학자의 언어로, 시인의 언어로 번갈아 응답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문제를 발견하고 사회학적 측면에서 해석하여 시적 결론에 이르는 방식은 큰 걸음처럼 여유롭지만 세심하며 아름답다. 그 응답은 공동체를 향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사회를 향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3부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나는데, 우리는 멀리서 울리던 개인의 고뇌가 어느새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공동체에서 개인의 인격이 무시되는 일들을 응시하고, “지옥의 청년들”이나 “기소당한 절규”들에 감응하며 타인에게 무언의 요구를 보낸다. 영혼과 예술, 공동체로 나뉜 세 문제는 결국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시인이 보내온 요구에는 사그라들지 않은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다. 사회학자나 예술가의 언어로 정제되기 이전의 강렬한 마음은 「달려라, 뭐든 간에」나 「작업실의 부재」와 같은 글에서도 엿보인다. 마치 ‘달리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어떤 모습의 누구건 간에 멈추지 않고 달리기를 바란다. 그 길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만나 어떤 목적도 약속도 없이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만남과 대화 자체에 몰입하며 거기서 자연스레 삶과 예술의 형태가 마름질되는 경이를 맛볼 수 있을까? 그럼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정확히 봤다고. 내 말이 바로 그거라고.” -155p, 「작업실의 부재」
“그러니 달려라. 인간이든, 토끼든, 뭐든 간에, 달리고 달려라.”-199p, 「달려라, 뭐든 간에」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모든 것은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 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삶의 의미에 관한 그의 입장은 “단 한 번도 공을 잡아보지 못한 외야수”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경기가 시작되면 외야수는 자신의 자리로 달려가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공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날아오지 않는다. 공을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그에게는 경기장의 풍경을 즐길 여유조차 없다. 하지만 공은 여전히 날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야수의 삶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외야수는 그 부조리함을 탐구하는 행위로써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다. 그러니 “부조리의 발견”이 외야수가 사는 힘이 된다.
삶의 의미는 과연 해답 속에 숨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 손에 마침내 해답이 쥐어지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삶은 부조리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부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부재로의 전락을 위해 달리는 일, 자리를 잡고 두 눈을 크게 뜨고 호흡하는 일, 시간의 흐름과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점멸하는 영혼의 부름을 감각하는 일, 그것이 우리를 새로운 윤리로 이끌 것이며 그 시간이 삶을 건축해 나갈 토양을 제공한다. 그러니 지금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우리에게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일 것이다. 그쪽의 풍경은 어떠한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윤리를 세우고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