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목에 두른 남자는 작은 생수병 뚜껑을 따서 물을 마시는 중에도 책상을 주시했지만 다가서진 않았다. 천천히 주는 물과 연동해 느릿한 울대는 지루하게 한 통을 비우고 나서 원래의 위치에서 멈추었다. 그때. 등 뒤의 하얀빛 깜빡임이 일더니 붉은 숫자가 흰색으로 바뀌었다. -6.57-
별 감흥 없이 숫자를 스친 눈길은 불 켜진 화면을 향하고, 손가락 두 개가 터치패드에 얹혀 사선을 긋자, 알림이 울린 그의 SNS 계정이 선명하게 올라 온 글과 사진들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 눈길을 끈 것은 그가 사용하는 닉네임이었다.
-Mr. Ⅷ-
인터넷상에 떠도는 그의 계정은 비활성인 것처럼, 죽은 듯 조용히 몇몇 사용자의 소개로 찾아오는 이들이 전부다. 연결을 자처하는 사용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Mr. Ⅷ의 도움을 받은 접촉자들과 특별한 1인이었다.
그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단! 그 절박함에는 조건이 따랐다.
막연한 금전이나 물리적인 도움이 아닌, 품고 있는 의지와 희망이 간절했지만, 스스로는 불가항력이어야 했고, 가장 핵심은 대상자의 광배였다. 반드시 희고 투명한 광배. 즉, 신광이 깃들어 있어야 했다. 죽음의 푸른빛, 사악한 검은 빛. 절망의 회색빛이 아닌, 희망과 사랑 연민 등. 현재와 미래에도 선한 기운을 세상에 퍼뜨릴 수 있는 사람만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고, 깊은 의미의 절실한 사명이었다.
그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다. 실체는 물론 사진만으로도 그것을 가려내는 능력.
수건을 무릎에 놓고 의자를 끌어당긴 그의 동공으로 화면의 투과된 내용이 본격적으로 스며들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나신의 눈길은 도움을 청한 글을 여러 차례 읽어본 뒤, 사진 두 장에 스크롤을 멈추고 확대했다. 미간에서 인중을 훑은 손가락이 입매에서 멈칫하고 끊어 참았던 숨을 그제야 옅게 뱉었다.
‘엄청난 주변광이다.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길래? 이번 건은 신속하게 처리해야겠어.’
그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은 건 의뢰한 청년이 아닌, 노랗게 머리 염색한 사진 속 또래 여자의 사진이었다. 입술에 피어싱까지 한 그녀는 거친 외모완 달리 신광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탄은 또 다른 주변광 때문이다. 그녀와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선의 기운이 존재한 시그널이었기에, 흥분한 조바심을 다독이는 호흡 조절도 무용할 지경이었다. 결심을 굳힌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엔터 바를 튕겼다.
그 순간. 사진과 글이 소용돌이 끝점으로 변한 화면엔 강렬한 표식이 솟아올랐다. -Mr. Ⅷ-
그로부터 며칠 후.
경기도 부천시 인근 외곽의 한적한 도로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매끄럽게 정차했다.
어둑해진 도로의 가로등이 미처 제 밝기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조금 떨어진 건물의 창가는 때와 상관없는 테트리스 조각의 불빛들로 환하게 연결돼 있었다.
“딸깍!”
차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검은 슈트의 남자가 건물을 올려 보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주머니에 넣었다.
번잡한 지역이 아님에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차량 간격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곳에서 남자가 탐색하는 건물은 10층 높이의 한신 타워였다.
“저기…?”
그가 타워를 주시하며 감지한 인기척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죄송하지만, 혹시…?”
그는 슈트의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맙습니다. 설마 했는데,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입꼬리가 올라간 안도의 표정과 달리 다소곳한 두 손이 긴장돼 떠는 그가 허리를 온전히 편 것은 남자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난 후였다.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쁩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무엇보다 다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네! 설사 다친다 해도 동생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죠. 정말 고맙습니다.”
비로소 본래의 안색을 되찾은 남자가 건물을 힐끔 보고 말을 이었다.
“20분 전쯤 지하 주차장에서 여자들 십여 명이 내부로 들어가 5층에서 한 참 멈췄다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동생분을 봤습니까?”
“아뇨. 남자 여러 명이 같이 섞여 들어가는 통에 정확히 보질 못했습니다. 승합차 두 대에서 내렸거든요.”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동생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에 행여 그가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된 모양이었다.
“흠.”
서너 발짝 인도 깊숙이 들어간 슈트의 남자는 잠시의 생각 끝에 나지막이 말했다.
“10분 후에 들어갑니다. 성매매 업소라면 시간을 늦출수록 복잡해지니까. 상황이 매우 혼란스럽고 위험할 겁니다. 내가 그들과 맞서는 동안에 동생을 찾아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한 방안에 모여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슈트의 남자에겐 긴장감이라곤 없어 보였다. 저 안에 다수의 폭력배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저기….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슈트의 남자는 그의 걱정에 웃지도,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않고 손목의 시계를 슬쩍 보고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아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엘리베이터 5층 버튼을 누른 남자는 슈트의 남자 뒤에서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닫힌 문이 다시 열리는 곳은 남자 친구의 폭력과 협박을 못 이긴 여동생이 성매매하는 곳이다. 그는 전후 사정을 막론하고 끔찍했을 많은 날,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은 여동생에게 미안함을 넘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한 살 차이라지만, 도움을 청할 오빠로서의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이 용서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빨간 화살표를 점멸시키며 3층을 지나 가벼운 진동과 함께 다음 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슈트의 남자 뒤에서 들렸다. 이윽고. 미약하게 중력을 저항한 문이 스르르 열리자. 복숭아색 체스판 바닥재의 복도가 그들의 걸음에 경쾌한 울림으로 반응했다. 두 사람이 겨우 교차할 정도의 협소한 복도는 좌우로 길게 소화기만 드문드문 놓여있을 뿐, 조용했다.
“따각! 따각!”
잠시 복도 좌우를 지켜봤던 구둣발 소리가 방향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시선엔 양쪽으로 엇갈려 도드라진 각방의 손잡이가 있었다. 대충 가늠해도 십여 개. 그는 잔뜩 긴장해 벽을 더듬고 따라오는 남자에게 말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꽤 나 요란하군. 그 손 좀 치워주겠나?”
등에 닿은 남자의 손에서 잔떨림을 느낀 슈트의 남자는 미소를 띠고 돌아섰다.
“아? 네, 네.”
순간, 후욱하고 깊게 내쉰 오빠의 날숨이 호박벌 날갯짓 공명으로 벽에 부딪혔다.
“이 방부터 확인하지.”
그의 가슴을 가볍게 토닥여준 슈트의 남자가 첫 번째 문고리를 가만히 돌렸다.
“딸깍!”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방문은 은은한 키패드의 노출로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방 역시 개방을 거절하는 숫자 연합으로 이방인을 거부했다.
“5층이 분명해요. 제가 몇 번씩 확인했거든요?”
아무 반응 없는 내부의 침묵에 조바심이 난 오빠는 슈트의 남자에게 속삭이며 표정을 살폈다.
“아직 성매매는 이른 시간이니 어느 방 한곳에 모여있겠지. 오히려 잘 된 거야.”
그는 성큼성큼 걸어 다음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문가에 대고 집중했다. 비었다는 눈짓의 그가 다음 방을 향해 돌아설 그때. 몇 칸 넘어 열리는 문으로 노타이 양복의 사내가 나타났다.
“야! 의자 갖고 나와라. 씹쟁이들 때문에 밤새 서 있다 무릎 나갈 일 있냐?”
사내가 그들을 발견한 건, 방 안의 누군가에 지껄인 후 담배를 물고 돌아설 때였다.
“어따! 벌써? 흐미. 하루가 살벌했나 봐요? 초저녁부터 급한 거 보면. 킥킥!”
아무 경계 없이 그들을 마주한 사내가 얼른 담배를 집어넣고 안에 소리쳤다.
“준비들 해라! 두 분이시다.”
슈트의 남자는 사내의 흰 와이셔츠 깃과 대비된 목덜미까지 울긋불긋 문신을 본 순간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흉측한 돼지 형상이 발산한 검은 기운 때문이었다.
‘쓸어버릴 존재들.’
“준비는 무슨. 확인은 했어?”
마른 체구의 사내는 파라솔용 의자를 내려놓고 다른 사내를 노려보듯이 흘겼다.
“아! 그렇지.”
“새끼가, 전에도 좆나 깨져놓고 또 그러네, 오늘은 형님들도 계신 데 정신차려, 좆밥아!”
같은 기운이었다. 검고 짙은, 절대 사정을 두지 않아야 할 존재들.
“눈이 많이 왔죠?”
그새 경계의 눈초리로 바뀐 마른 체구의 남자는 슈트의 남자에게 다가서면서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한여름에 난데없는 눈 타령은 일종의 손님을 거르는 암호였다. 철저히 예약 손님 위주로 운영하는 절차에는 당연히 증명할 답변이 있을 리 없었다.
“눈이 한 10센티는 쌓였을 텐데?”
원하는 대답을 못 하고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남자와 머뭇대는 그 뒤의 일행을 사납게 노려본 사내가, 뒤 돌아 고개를 저으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기세등등한 돼지 사내의 손끝이 슈트의 남자 어깨를 밀치려는 순간. 불쑥 뻗은 그의 주먹이 사내의 가슴팍을 때렸다.
“억!”
뒤뚱하고 휘청인 사내에게 연이어 차가운 경고가 꽂혔다.
“죽진 않겠지만, 이 짓거리는 오늘로 끝인 줄 알아라.”
이어서 강타한 주먹은 사내의 골반을 때리고, 고꾸라지는 허리에 한 방 더 가해졌다.
“으윽! 헉!”
결코 현란하거나 빠른 동작이 아니었음에도 공격받은 사내는 대응도 못 해 보고 벽을 쓸며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간결했지만, 묵직했다. 순식간에 공포의 올가미에 걸린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숨만 헐떡였다. 슈트의 남자는 단 세 번의 타격으로 돼지 같은 육중한 몸뚱이를 맥없이 침몰시킨 것이다.
“이? 이, 이런 개 같은!”
힘없이 나가떨어진 동료에게 놀란 마른 체구의 사내가 손에 잡힌 의자를 집어 던지고, 냅다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기습! 기습이다! 다 나와!”
허둥지둥 문마다 두들기며 고함을 친 사내가, 급기야 어느 한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혀. 형님! 하마가 깨졌습니다.”
“뭐라고? 누가? 하마가? 무슨 소리야, 새꺄!”
마른 체구의 사나이가 뛰어 들어간 방은 그에게 욕을 해댄 사내와 다른 두 명과 여자 예닐곱이 있는 방이었다. 형님이란 사내는 누군가와 통화 중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누. 누군지 모르지만, 두 놈인데. 그게. 그러니..까.”
그의 양손은 자발스럽게 놀리기만 할 뿐, 바깥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결국 형님이란 사내에게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퍽!”
“아 악!”
“이런 삥 빠진 새끼가. 정신 안 차려?”
그의 앉은 채 걷어찬 구둣발이 바닥에 닿는 동시에 다른 사내들은 잽싸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동생들의 뒷모습이 이리저리 나자빠져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야! 뭐야?”
타다닥! 급히 사내들 틈을 파고든 두 사내가 허리 뒤 춤에서 번뜩이는 회칼을 뽑아 들자, 앞선 사내들은 그들을 방패 삼아 물러서 전방을 꼬나봤다. 잠시의 대치 상황. 슈트의 남자와 그들 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거친 숨소리만 복도에 허용했다. 벽에 기대고, 바닥에 눕고. 꿇은 무릎으로 숨만 헐떡이는 사내들 말고도 가슴팍을 잡고 연신 헛구역질하며 겨우 몸을 가눈 자들이 어이가 없었다.
“상판은 짭새는 아닌 것 같고. 누구냐, 늬들?”
짐짓 가소롭단 표정의 사내가 칼끝을 까닥거리며 양옆의 동료에게 입술을 삐죽였다.
“애들 조진 것도, 개시도 못 한 영업장을 이따구로 만든 이유가 뭐야? 설명 잘해라. 팔다리 따로따로 한강에서 물장구치게 할 모양이니까.”
그가 더욱더 대차게 입살을 날린 것은 일행의 뒤에서 지켜보는 형님이란 자와 마주친 눈빛으로 객기를 더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살벌한 허세는 슈트의 남자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질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잠깐의 대치를 기회 삼아 전체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기운. 그들 중에 아예 꺾어 놓을 자와, 다스리는 것으로 끝낼 덜한 자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잠시 멈춰 춘 것일 뿐,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꺾어 버려 할 자. 셋 중 하나는 이미 다스린 자였다. 지금도 가슴 통증의 헛구역질로 고통스러워하는 자가 그랬다. 아직 완전히 악한 기운에 잠식되지 않아 언젠가는 선한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고통을 주어 기운의 변화를 앞당겨 주려는 의도였다.
“오늘 나를 만나 고맙다고 느낄 땐 너희들이 제명을 다한 후일 것이다. 신의 심판을 받을 때 말이다. 지금 이후로 반성할 기회를 얻을 자는 많지 않을 테니.”
선고를 끝낸 순간, 심장을 꿰뚫는 섬뜩한 눈빛이 사내들의 동공을 싸잡아 옭아맨 채 바닥을 박찬 슈트의 남자가 벽을 밟고 무리로 파고들었다.
“퍽! 파박! 퍽! 퍽!”
이번은 전광석화였다. 내리찍고, 올려 치고. 돌아 차고. 사내들의 틈에서도 그는 비행하는 나비처럼 자유롭되 불규칙한 궤적으로 순식간에 무너뜨려 갔다.
“윽! 아아악! 꺼억! 악!”
고꾸라지고, 넘어가고. 퉁겨지는 맥없는 몸뚱이들은 부딪쳐 서로를 덮치는 혼란 속에 별다른 반격조차 하질 못했다. 일방적이었다. 단 한 사람에 의해 볏단 쓰러지듯 주저앉는 그들에겐 차라리 먼저 맞고 쓰러지는 것 외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휙! 획, 획!”
그때. 조무래기들이 사이로 매섭게 지르는 회칼들이 슈트의 남자 가슴과 배를 목표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형님이란 자의 칼 또한 현란하게 번뜩이며 미간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개새끼!”
쓱! 간발의 차로 칼끝을 목 옆으로 흘린 슈트의 남자가 주춤하는 찰나, 연이은 칼끝이 복부와가슴을비껴가면서 상의를 베었다.
“뒈졌어!”
그 순간. 세 개의 회칼 중 기회를 살피던 하나의 칼날이 재차 슈트의 남자 복부를 과녁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헉!”
다급하게 물러선 슈트의 남자 뒤에서 짧게 끊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복도의 소화기와 함께 우당탕 바닥으로 굴렀다. 겁에 질려 근접한 여동생의 오빠가 남자의 방어적 후퇴를 방해한 것이었다.
“조져!”
찰나의 방심이 부른 위기 상황이었다. 바닥의 네모 타일 안에서 체스판 기물처럼 늘어서서 지켜보던 사내들이 명령에 따라 일제히 슈트의 남자를 덮치려 달려들자, 동굴 속 메아리로 난무한 구둣발 소리가 맹렬한 함성으로 가세하듯 복도를 크게 울렸다.
득달같이 덤벼드는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십 여보. 때마침 손에 잡힌 소화기 핀을 뽑은 그가 그들을 향해 그립을 힘껏 움켜쥐자, 살포된 분말에 직격당한 사내들은 일순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 으윽! 내 눈, 내 눈!”
“콜록! 콜록! 우웩!”
방출된 소화 분말액이 복도를 형틀 삼아 고밀도의 수은처럼 무겁게 잠식해 갔다.
“뭐해, 새끼들아! 빨리 안 잡아?”
일시에 분열된 그들을 다그치는 호통이 백색 암막 분말액 너머에서 울리자, 움찔거린 형체들이 불에 덴 듯 빠르게 팔을 휘저으며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마주한 슈트의 남자를 보는 순간, 누구랄 것 없이 다리가 굳어버렸다. 고요하지만 서늘한 눈빛. 우뚝 선 그의 슈트에 쌓인 분말액을 서릿발로 느낀 것이었다.
“꼴깍!”
더는 앞으로 나서질 못하는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메마른 침 삼킴이 들렸다.
“칼날을 그대로 먹이는 걸 보니 남의 생명쯤은 대수롭지 않다?”
착시였을까? 사내들은 순간 그의 손이 빨갛게 달궈지다 사라짐을 보았다.
“비켜. 새끼들아!”
완벽한 말아먹은 기회에 화가 치민 사내 둘이 칼끝을 겨누고 뛰어나오면서 소리를 지르자, 곧이어 내지른 으름장의 다른 칼등이 사내들의 등 뒤에서 머리통과 어깨를 때려 앞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동작은 굼떠 보였다. 어느새 몸을 날린 슈트의 남자가 앞선 회칼의 두 사내를 허공에 띄운 시간차 때문이었다.
“퍼벅! 퍽! 쩍!”
번쩍하며 인 섬광이 칼날의 반사 빛인지, 그의 주먹에선지 분명치 않았지만, 찰나의 불꽃 같은 광경은 그들에겐 벼락이나 다름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허공에서 구겨진 두 사내에게서 날아간 칼은 벽을 튕겨 한 사내를 가슴에 꽂혀 쓰러뜨리고, 미처 바닥에 닿지 못한 사내들은 남자의 무릎과 주먹질로 갈비뼈가 부서지고 허리뼈가 무너지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추락했다.
“어억! 으으윽!”
잇단 파괴적인 공격은 이내 사내 무리로 향했다. 공격성이 본격적으로 타격에서 파괴로 바뀐 건 이때부터였다. 부위를 가려 치고 힘의 분배로 인정을 뒀던 처음관 달리, 그들 대부분이 불구가 된 들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랬다. 분명 그렇게 변했다.
칼끝이 목을 겨누고 들어온 순간, 그들의 검은 기운이 복도를 암흑으로 바꿀 만큼 강렬하게 뻗쳐 나옴을 감지하면서 자비란 허울은 그에게서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퍼벅! 으! 으악! 악! 팍!”
현란한 안무를 갖춘 마리오네트가 되었다. 남자 주먹과 발길질에 따라 꺾이고 고꾸라지게 조정되어 오롯이 연출자의 의지에 따르는 도구로 전락했다. 벽과 바닥 사방에 핏자국을 뿌린 터진 입술과 깨진 코는 보기에도 끔찍할 만큼 처참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고통스러워 한 부위는 가슴과 허리였다. 하나같이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써봐도 무반응의 하반신에 경악한 표정들이었다. 소화 분말액이 분사된 시간이라 봤자, 불과 10분 내외. 제각각의 문신이 어지러운 건장한 사내들과 기세등등 서슬 퍼렇던 회칼의 사내 두 명이 전혀 다른 상황이 된 것이다.
“으...저. 저게 무. 무.슨. 오..지마! 오지 마!”
무참하게 박살이 난 동생들에 충격받은 형님이란 자가 하얗게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너..너 누구야? 어떻게….”
심하게 떠는 입술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아귀가 풀렸던지 땡그랑, 회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 발짝의 거리가 되었다. 주저앉아 버린 사내는 숨소리마저 웅얼거리며 체념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였다.
“사..살..려..”
애걸하는 사내를 무표정하게 보던 슈트의 남자는 칼을 집어 그의 미간에 두고 무겁게 말했다.
“사악한 기운이 너무 짙어. 살려는 주겠지만, 오늘을 원망할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고. ”
“헉!”
남자의 냉소 직후, 고개를 덜컥인 사내의 미간에서 선혈이 붉은 점으로 피어났다.
“으악! 아아악. 뜨거워! 눈! 내 눈. 안 보여!”
눈을 감싸고 허우적대는 그에게 연속한 충격이 척추에 가해졌다. 우두둑, 둔탁한 소리에 찰나로 단절된 호흡은 몸부림치는 사내의 상체를 뒤집어 새우 등으로 굽혀버렸다.
“끅! 끄윽!”
무자비의 잔혹함이었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현시대에선 너무 나약해 어울리지 않은 걸 알았다. 바뀌지 않을 악의 종자를 끊는 것 또한 나의 숙명이니까.”
내내 무표정하게 그들을 파괴했던 슈트의 남자는 멀찍이 넋이 빠져 있는 오빠를 돌아봤다. 그의 경악한 표정. 놀랐을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복도도 그랬거니와 그의 잔인한 모습이 어쩌면 더 큰 공포였으리라. 심리를 반증하듯 심하게 떨고 있는 휴대폰.
“정신 차리고 방들을 찾아봐.”
의미 모를 미소를 거둔 슈트의 남자는 바닥의 사내가 끼고 있던 소화기를 집어 들고 문고리를 내려치려다, 무릎을 굽혔다. 흥건히 고인 핏물이 바지에 질척였다.
“비밀번호.”
“1234. #”
“다 같나?”
“네, 네!”
고통보다 더 한 두려움에 떠는 사내의 대답은 간결하고 빨랐다.
“삑! 삐삐….”
순간 슈트의 남자가 활짝 열어젖힌 문짝이 일으킨 공기의 분절이 허공으로 분말을 밀어 올려 작은 회오리가 생겼다. 텅 비었다. 썰렁한 내부에선 달큼한 싸구려 향수의 자극이 훅하고 몰려왔다. 굳이 안까지 들어가 이곳저곳 열고 미는 오빠를 지켜보던 슈트의 남자는 좀 전의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 어디야?”
“으으...저, 저 방에….”
그의 떨리는 손끝이 가리킨 곳은 두 개의 문을 지난, 가장 안쪽의 출입문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다 순간 비틀하고 엇갈린 다리에 반사적으로 벽을 짚었다.
“흠.”
잠깐의 깊은숨을 들이켠 그에게 오빠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피잖아요?”
슈트에서 삐져나온 셔츠를 적신 붉은색은 복도 조명이 설핏할 만큼 축축했다.
“음..괜찮아. 저 끝 방. 어서 가봐.”
“그래도. 피가.”
“괜찮다니까.”
부축을 거부하고 떠미는 등에 마지못한 오빠가 방문 앞에 서서 깊은숨을 몰아쉬고 조심스럽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미영아. 미영아.”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넣은 남자의 목소리는 애타는 오빠의 절박함이 아닌, 어딘가 모를 주눅 든 떨림이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격투의 끔찍한 잔상과 은연중 스며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갖은 탓이었다.
“어머. 누구지?”
한쪽 구석으로 몰려 잔뜩 경계하는 여자들은 긴 소란 끝에 머리를 디민 남자를 보자, 휘둥그런 눈으로 들리듯 말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미영이? 미영이가 누구야?”
그녀들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때. 격한 울음이 터진 화장실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왔다.
“오빠? 오빠아! 엉! 엉!”
속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끈이 벗겨질 듯 오빠의 품에 안긴 그녀는 복받친 설움이 봇물로 터진 듯 온몸이 무너지며 통곡했다.
“미영아! 미영아.”
“오빠!”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흑흑!”
“엉! 엉! 오빠! 끅-끅.”
“쟤가 미영이었어? 그럼, 오빠가 데리러 온 건가? 아님. 구하러?”
“그러게? 맨날 질질 짜면서 있었다던데. 애인이 천하의 개새끼라더라.”
“아주 지랄들이네. 씨발. 누군 오빠 없나?”
“이 년아. 늬 오빠란 새끼는 아픈 엄마도 너한테 떠밀고 새파란 년하고 날랐다면서? 이 짓, 그래서 한다며? 어따 똑같은 오빠라고 붙이냐? 붙이긴.”
“뭐라고?”
그녀들은 미영이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녀들의 성매매는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직업이었지만, 남자 친구의 강압과 폭력에 팔려 온 미영은 포주의 감시를 받는 숙소 생활을 하면서 성매매를 강요받고 있었다.
“가자. 미영아. 얼른 여기서 나가자.”
겉옷을 벗어 대충 그녀의 어깨를 감싼 오빠가 슈트의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인 오빠는 어느새 그에 대한 두려움이 가셔 있었다. 슈트의 남자 역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보다 훨씬 밝고 깨끗한 백색 기운을 가진 미영에게 흡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남은 여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있어야 할 사진 속 별개로 감지된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말고 다른 분은 없습니까?”
여전히 어리둥절한 방 안의 여자들은 적당히 선악이 공존하는 평범한 기운이었다.
그 순간, 오빠의 부축으로 막 나가려던 미영이 멈칫하더니, 화장실을 가리켰다.
“있.어.요. 저 안에 주희 언니.”
그녀는 오빠를 슬며시 밀어냈다.
“가봐. 혼자 못 일어날 거야. 언니한테 마약을 주사했어.”
“마약?”
깜짝 놀란 오빠는 황급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과연 동생의 말처럼 여자가 샤워 부스에서 축 늘어져 비스듬히 꺾인 목으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있어요.”
그가 남자에게 다급히 도움을 청한 외침에 반라의 해파리가 된 여자가 꿈틀거렸다. 파르르 떠는 눈꺼풀이 올라가고, 동공은 어디에든 접점을 두기 위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홍채의 색이 옅다가 짙어지길 반복됐다. 하지만 사물을 맞추는 것이 아닌, 고장난 조리개의 무의미한 작용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부축하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이 헛심이 되었다. 힘을 줄 때마다 흐느적거리는 신체 부위는 늘어지고 처졌다.
“하!”
‘이럴 수가! 이 엄청난 기운은….’
탄성을 입에 문 남자는 재빨리 슈트를 벗어 그녀의 상체를 덮어줬다.
“뭐해요? 좀 도와주지.”
짜증과는 다른 말투가 흘긴 눈초리로 남자를 재촉했다.
“경찰이 오긴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죠. 어서요.”
“경찰?”
슈트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신고했나? 언제?”
물음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가 허리를 빼고 어물쩍 대답했다.
“그게. 아까 전, 저 사람들이 칼을 들고….”
순간 슈트의 남자에게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그들과의 격투 막바지에 덜덜 떨고 있던 그의 모습. 손에는 휴대폰이 들렸었다.
“이런! 룰을 어겼군. 경찰이 관여하지 않는 일에만 도움을 준다는 규칙.”
그는 잠시 실망스러운 얼굴을 보이고선 바지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들리는 신호음. 상대의 목소리가 옆에까지 들려왔다.
“네, 선생님.”
“왔나?”
“1층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올라갈까요?”
“그래. 서둘러.”
“알겠습니다!”
“여자 한 명을 데려가. 마약에 취했으니 각별히 조심해서.”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슈트의 남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눅이 든 오빠의 어깨를 다독였다.
“앞으로는 잘 보살펴주게. 동생의 특별한 기운은 세상에 많은 희망을 줄 것이야. 아주 소중한 존재임을 명심하게. 그렇기에 내가 온 거고. 알겠나? 그리고….”
그는 다소 긴장이 풀린 오빠의 손을 감싸고 귓가에 속삭였다.
“경찰이 와도 나는 여기에 없었던 거야. 아마 자네는 기억 못하겠지만. 동생은 기억하겠지. 나와 같은 부류니까. 비록 룰은 어겼으나 고마움을 표하네. 내게 청한 도움으로 동생과 주희를 구했으니. 모르겠지만, 대단히 큰일을 한 거야.”
그 순간. 맞잡은 손에서 짧은 경련을 일으킨 오빠의 목이 한차례 뒤로 꺾였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화장실을 벗어나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어느새 도로에 쌓인 시간이 어두웠다. 짙은 자주색이 된 흰 셔츠 밑단의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오피스텔 건물을 지켜보는 중이다. 당장 치료가 급한 옆구리 자상이었음에도 남매와 주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특히 주희였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연달아 빠져나오는 두 대의 차량은 익숙한 외관이었다. 첫 번째 소형 SUV에는 주희를 태운 남자였고, 꼬리에 붙어 따라 나온 승용차엔 남매가 있었다. 그들은 신호가 바뀌자, 같은 방향을 빠르게 내달려 시야를 벗어났다.
“끙!”
구부정한 자세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이어 눈빛이 흔들리는 탄식은 통증이 아닌, 깜빡이는 붉은색 때문이었다. 그때 발목의 미세한 압력에 시동이 걸린 차가 그르렁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아! 시시포스여. 불멸의 고통이여!”
질주하는 전조등에 가로수 그림자가 춤을 추고, 상점과 주점의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투영된 앞 유리창에 선명한 숫자가 비쳤다. 그의 방, 벽에서와 같은 붉은 숫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