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단 8분.
하지만 그의 8분이란 지구의 물리적 개념이 아닌, 사건의 지평선 경계 뒤 블랙홀을 유영하는 자의 영원일 수도, 수직 낙하한 쇳덩이가 지면을 충격한 찰나이기도 했다.-
1. 의문의 남자
깊은 새벽,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자욱한 안개에 덮인 야경은 도시 동맥의 혈류인 인적이 끊겼음인지, 다소 누그러진 희뿌연 안개꽃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본색을 잃은 스산한 달빛이 스민 누마루 활꼴 추녀선이 귀솟음 친 아래 유령처럼 서 있는 남자가 코끝을 움찔하였을 때는, 흑표범의 기세로 지면을 쥐어뜯는 자동차가 숲길을 가로지를 무렵이었다.
“흠.”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호흡. 기다란 외투 주머니에 넣은 손을 넓게 자락 펴 들썩인 그는, 돌기둥처럼 박혔던 다리로 계단을 내려와 축축한 습기로 희끗한 아스팔트 길에 섰다. 성북동과 부암동으로 갈린 양방향 도로. 그가 망설이지 않고 택한 길은 부암동 방향, 조금 더 어둠이 짙어 있었다. 아스라한 가로등을 등진 그의 모습은 언뜻 날개를 편 박쥐 같기도, 움츠렸을 땐 관절이 없는 장승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어떻게 걷든지 간에 고개는 고정된 한 방향이었다. 하늘. 성긴 별들이 점점이 박힌 밤하늘이었다.
“지금껏 이들과 헤쳐왔던 아득한 과거부터 절망보다 단 한 번도 희망이 무거웠던 적이 없었소! 희망이 겹겹이 쌓여 칸을 채워도 항상 그 틀은 절망이었단 말이오. 그래도 이들은 꿋꿋하게 세상을 지켜왔소. 당신의 조롱이 우주 성간을 울리고, 설령 깃털의 가벼움으로 무시한다 해도,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갑자기 걸음을 멈춰 하늘로 고함을 퍼부은 그는 잔떨림의 여운이 남은 두 주먹을 허공에 얹은 채였다.
늦가을 새벽 한기는 아직 여물지 않은 계절임에도 냉랭한 독기가 제법이었다.
또다시 마주한 갈림길에서 잠시 멈췄던 그는 효자동이 아닌 부암동 방향, 창가에 물방울이 붙은 가게를 향해 걸었다. 텅 빈 뱃속의 허기가 택한 김밥이란 작은 상호였다.
“삐이걱!”
습하고 뿌연 온기와 버무려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이고! 벌써 오셨어? 이걸 어째. 아직 다 못 쌌는데.”
얼핏 열댓 개 김밥이 가지런한 쟁반 위로 투명 비닐장갑을 낀 손의 부산함을 멈추지 않은 할머니가 난처한 눈치로 그를 맞이했다.
“네? 아니. 그게….”
“조금만 기다려요. 거의 다 쌌으니까.”
어색한 웃음의 그녀는 더욱 능숙하게 까만 김 위의 손가락을 다독여 흰밥을 다졌다.
“김밥 한 줄 먹을 수 있을까요?”
엉거주춤 의자에 걸친 그는 테이블 위 자잘한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치웠다. 협소한 내부의 테이블은 4개. 그마저 하나는 비닐에 쌓인 포장 용기와 나무젓가락 따위의 잡동사니가 제 편한 대로였다.
“드신다고요? 그럼, 단체 주문한 손님이 아니신가?”
다소 생뚱맞다는 할머니가 기름을 묻히던 솔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그 순간. 짙푸른 신광의 빛 번짐이 그녀에게 나타났다가 사그라졌다.
“아!”
옅은 탄성을 뱉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타깝게도….’
“아휴! 미안해요. 단체 주문 손님인 줄 알고. 갑자기 딸이 아픈 통에 마음만 바빠서.”
멋쩍게 웃은 그녀는 6시에 가까운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곤 김밥 한 줄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죠? 두 줄 아니고? 먼저 드릴게! 후딱 싸면 되니까.”
“감사합니다.”
“물은 손님이. 저기.”
그녀는 여전히 주름진 미소로 눈짓하고 쓱쓱 김밥을 썬 후, 두 걸음 곁 주방 화구에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밑면을 달군 누런 양은 주전자는 금세 달그락달그락 뚜껑을 들썩였다.
“입만 축여요. 따끈한 국물 드릴 테니. 쌀쌀하잖아.”
타원형 접시에 가지런한 김밥을 내 온 그녀에게 정수기 물을 받고 있던 남자가 한쪽으로 비켜설 때, 반쯤 열린 식당 방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그때 무심코 안쪽에 시선이 간 남자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다. 심장을 뒤흔드는 강렬한 기운. 순간 잘린 호흡을 파고든 상서로운 서기는 방에 가득한 정체불명의 신광이었다.
‘누구지? 누구길래 저토록….’
“손님! 어여 드셔. 늙은 여자 방에 뭐 볼 게 있다고?”
어느새 실눈을 뜨고 그의 앞을 막아선 그녀가 늘어진 줄을 당겨 방문을 닫고 있었다.
“아! 미. 미안합니다. 그게 아니고.”
“알아요. 그냥 한 소리예요. 방에 딸이 있는데, 그제부터 어디가 아픈지 도통 먹지도 않고 저렇게 늙은 에미 속만 태우고 있다우.”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닫힌 방문을 향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아…. 네, 그럼, 따님께서?”
그때였다. 축 처진 문고리 종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산복 차림의 사십 초반 남자가 머리를 디밀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또박또박한 인사완 달리 냉큼 안으로 들지 않고 서서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였다.
“김밥 주문하신 손님? 여기, 금방 싸서 맛있을 거예요. 근데 따뜻한 국물이라도 주려고 해도 마땅한 것이 없네요. 혹시 보온병 있으면 주세요. 쌀쌀해서 체 할라.”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는 냉큼 들어와 바스락거리는 포장 봉지를 받아 들고 멈칫하더니 슬며시 봉투를 꺼냈다. 그러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웃고는 있지만 어색함이 가득한 그에게 탁자를 짚고 선 그녀가 빤히 쳐다봤다.
“글쎄…. 단골손님은 아니고. 미안해요. 늙으면 나이가 기억력도 먹어버린다우, 좀 전 일도 까맣게 잊어요. 애먼 몸이 그래서 더 고달프고.”
잠깐 머릿속을 되짚는가 싶던 그녀가 털썩하고 의자에 앉으며 손사래 쳤다.
“할머니.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 뭘 죄송하단….”
“그때는 제가 3일을 굶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냅다 도망을 쳤으니, 차라리 사정이라도 하는 염치가 있어야 했는데.”
“도망? 먹고 도망...갔어요? 그래. 한 2년 전쯤? 그럼. 그 양반?”
“네, 그 못된 놈이 접니다. 그때 그러셨죠? 도망가는 제게 뛰지 말라고. 넘어진다고.”
어느새 그의 눈가는 불그스레 충혈돼 있었다.
“죽기로 작정하고 북한산을 찾았다가 용기가 없어 내려온 길이었는데 할머님의 그 말씀이 정신없이 도망치는 제게 왠지 모르지만, 희망을 주셨습니다. 도둑놈이 다칠까, 오히려 걱정해 주시는 분도 계시는데 그깟 사업 한번 망했다고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니. 더구나 누구한테 당한 게 아니고 순전히 저의 잘못으로 실패한 일이었는데.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남자는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니. 아니, 아냐. 그까짓 김밥 몇 줄이 얼마나 한다고.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정신이 있겠어요. 오죽했으면 그랬을라.”
테이블을 짚고 일어선 그녀가 애틋한 얼굴로 남자의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내 김밥을 먹고 다시 살 생각을 했다니. 고마워요. 내가 되레 고마워요.”
그녀는 불편한 다리를 힘겹게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하부 장을 들추어 큼지막한 보온병 하나를 꺼내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여기다 국물을 담아 줄 테니 나중에 갖다줘요. 아까는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라 이따 우리 애 병원에 갈 때 필요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물도 있고, 저희가 둘레길로 산을 넘거든요. 그리고 여기. 김밥값. 잘 먹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 건강하시고요.”
들고 있던 작은 봉투를 서둘러 탁자에 놓은 남자는, 문이 닫힐 때까지도 연신 감사의 말을 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요.”
급히 나간 남자의 걸음을 쫒기에는 불편한 다리인 그녀가 붙잡고 싶은 손을 앞세워 따라 나왔지만, 그새 어디로 갔는지, 남자도 있을법한 일행도 보이지 않았다.
“쯧쯧!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챙겨 줄걸.”
못내 아쉬운지, 보온병을 쓰다듬던 그녀는 무심히 탁자의 봉투를 집어 들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에구머니! 이게 뭐야? 이를 어째. 김밥값을 잘 못 주고 간 거 아니야?”
그녀가 꺼낸 봉투에선 족히 수십 장이 넘는 5만 원권이 들어있었다. 분명 착오일 것이란 생각에 안절부절 한 그녀가 김밥을 먹는 남자를 쳐다봤다. 봉투의 겉면에 쓰인 글자를 본 것은 이후였다. 염치없이 이제야 김밥값을 드리는 걸 용서해 달라고. 감사하고 고맙고 덕분에 다시 용기를 얻어 이제는 잘살고 있노라고. 자기도 할머님처럼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겠다며, 가끔 찾아뵙겠다는 글이었다.
“아이고. 그게 뭐라고 인적까지 마음이 불편했던 거야. 너무 많아. 이걸 어쩌지?”
얼핏 백만 원가량의 큰돈이 난감한 그녀가 아무 관련 없는 테이블의 남자를 또 한 번 쳐다보자, 그는 싱긋 웃으면서 젓가락을 놓았다.
“편하게 받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할머니 덕에 다시 살 용기를 얻은 그분의 성의니까 기분 좋게 생각하세요. 도망가는 사람이 되레 다칠까 봐 걱정해 주신 거나,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고 고마움을 갚는 분이나. 이래서 제가 아직 포기 못 하는 세상입니다.”
남자는 크게 숨을 내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무심코 뱉은 그의 말 중, 지금 상황과 동떨어진 한마디가 있었다. 아직 포기 못 하는 세상이라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큰돈을….”
그때였다. 머뭇거리며 편치 않은 내색이 역력한 그녀가 할 수 없이 주방으로 돌아설 무렵, 고역스러운 헛구역질이 얇은 방 문짝을 뚫고 나왔다.
“웩! 우웩!”
“아이고! 쟤가 또 그러네. 진즉 병원에 가 보자니까 왜 고집을 부리고.”
딸의 성난 구역질에 그녀는 들고 있던 봉투를 주방 선반에 대충 던지고, 기우뚱 넘어질 듯 꼬질꼬질한 방문의 줄을 잡아당겼다.
“손님. 드시고 가요.”
“네! 네, 다 먹었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돈은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남자의 말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닫힌 방문에 퉁겨졌고, 방안에선 할머니의 안쓰러운 걱정이 낮은 꾸중으로 새어 나왔다.
“에고. 이것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 말을. 그래야 알 것 아니야? 에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인나! 당장 병원에 가자. 어서 일어나!”
가만히 정수기 옆에 서서 안의 사정을 짐작한 남자는, 문득. 방을 엿본다는 할머니의 핀잔이 떠 오르자, 냉큼 만 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에 놓고 물러섰다.
“그럼, 그 말은 뭐여? 왜, 학교도 안 간다는 거냐고? 의사 된다고 그래 죽을 둥 살 둥 공부하고선 이제 1년도 안 남았는데, 도대체가 말이 돼야지. 말이.”
괜스레 조심스러워 조용히 연 문의 손끝이 떨어지기 직전, 할머니의 울먹임은 그의 내딛는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녀에게 풍기는 짙푸른 신광이 겹친 것이다.
죽음의 빛이 감싼 얼마 남지 않은 생명. 곧 있을 영원한 이별을 모른 채 딸 걱정으로 행복하지 않은 그녀. 못내 안타깝고 가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밥집을 나온 걸음은 무거웠다. 그사이 먼동이 희붐한 거리엔 어둠에 찬란했던 가로등이 희미하게 존재감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방 안의 밝았던 빛을 되짚었다. 그것은 할머니완 달리 희망과 사랑. 생명의 힘이 특별한 신광이었다.
‘확인 해 볼 것을 그랬나? 비록 찰나이긴 했지만….’
망설임은 마을버스 두 대가 지나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 재차 걷기 시작한 건 몹시 거슬리는 굉음의 오토바이가 지날 때였다. 하지만 결코 그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다. 간혹 그렇듯 특별한 신광을 가진 사람을 만났었고, 그들은 기대한 대로 세상에 선량한 기운을 펴고 아우르는 삶을 살아가고, 살다 갔었다. 그러나 확인 않은 불찰은 훗날 인간의 미래를 좌우할 거대한 변수로 작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런 중에도 시간은 째깍거리며 계절을 바꿔, 해를 갈아치우는 본능적인 성실함을 수행하며 틀어쥔 인간의 운명을 변화 속으로 이끌었다.
부암동 백사실 계곡과 맞닿은 후미진 곳.
절정에 치달은 여름이 연일 공포스런 폭염으로 세상을 뭉그러뜨리는 중임에도, 홀로 청량한 계곡 바람과 울창한 숲 그늘을 즐기는 새 둥지 닮은 아파트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결격 또한 그것이었으니, 사치일 법한 주변 경관과 상반된 들뜬 마른버짐의 페인트 표면이 그랬고, 추레한 외관은 시들시들한 담쟁이넝쿨인지, 더는 깁기를 단념한 넝마인지 모를 낡아빠진 골격으로 어쩌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회유하다 지친 유령이 음울하게 3층 허공을 터주로 잡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의 옷자락은 더욱 볼썽사나웠다. 입구의 문 유리는 벽에 기대 깨진 채 방치됐고, 독오른 짐승의 덧니처럼 날카롭게 파손된 PVC 오수관에 더께더께 제각각 테이프의 접착력은 줄기처럼 얽힌 전선들마저 가까스로 배겨내는 실정이어서 사뭇 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노쇠한 건물의 참담함은 그에 끝나지 않았다. 거무튀튀하게 뒤집힌 시멘트 속살에서 노출된 철근의 녹물은 긴 세월 야금야금 복도 천장은 물론 벽과 창틀까지 오염을 확장해, 빈약한 채광과 혼재한 복도의 잡동사니와 더불어 괴기함을 연출하는, 마치 누아르 영화의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다.
“으으. 으.”
문틈으로 새어 바닥과 공명하는 신음이 희미한 곳은 복도의 맨 끝, 307호였다.
환한 대낮임에도 두꺼운 암막이 허용한 한 치의 볕만 든 방안은, 크리스털 태양선이 곧게 그은 검선으로 양분해 있었다.
“으-으음- 끄으.”
자궁 속 태아의 웅크림을 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 걸친 것 없이 발가벗은 그는 희끗한 살결이 한기에 중독된 듯 심하게 떨다가도. 갈퀴가 된 손가락의 사나운 힘이 가슴에 상처를 냄에도 아랑곳없이 후비고 뜯으며 의문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진맥진하게 널브러진 그의 몰골은 흡사 벽에 박힌 박제처럼 메마르고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끄응. 헉!”
미처 회복하지 않은 기력을 간과한 그가 일어서기 위해 잡은 의자의 흔들린 중심에 쏠려 쿠당탕 구석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옆구리를 틀어 기어코 일어선 그가 넘어진 의자를 세워 의자에 앉았다. 태양선에 양분된 카펫의 짙은 전신의 땀자국도 반토막이었다. 한쪽 벽을 향한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했다. 근래 들어 가슴 압박으로 인한 통증이 빈번해졌다. 그것은 시간의 환원을 억제하는 일련의 추악한 사건들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극히 반인륜적이어서 희망의 영역을 급속히 잠식해 가는 절망의 넝쿨들. 그의 동공 속에서 빨간 숫자가 몇 번의 깜빡거림을 멈췄다. -6.45-
잠시, 벽의 숫자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가 틈새의 햇볕을 따라 들어간 욕실에서 힘주어 샤워기를 틀었다. 정수리에 부딪힌 물줄기가 욕실 밖으로 튀어 사방으로 흩어짐에도 무관심으로 하게 비누를 움켜쥐었다. 입가가 씁쓸하게 굳었다.
‘오만한 선택이었을까? 이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럴 순 없는데. 정녕 이들은 구제 불능의 타락한 영혼으로 전락해 버린 것인가?’
고뇌와 울분에 떠는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욕실을 한기로 채우고 입에선 허연 입자를 미세하게 분무하는 섬뜩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그에겐 이름이 없다. 아니, 때와 시기마다 불리고 사용한 이름은 셀 수없이 많았다. 단지 특정한 이름이 없을 뿐이었다.
30대 후반의 깊은 눈빛과 부드러운 인상의 그는 180가량의 키에 다소 마른 체구였다. 그가 이곳에 온 때는 90년 전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늙고 병들어 죽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