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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1. 2024

벅수 4화 천년의 고대가 깨어났다.

4. 천년의 고대가 깨어났다.    

 

   그 후 2년이 지난, 경기도 포천 인근.

계절은 또다시 가을의 찬란함을 호수의 심연에 그림자로 가두고, 독이 오른 냉기를 칼바람에 실어 곳곳을 후려치고 있었다.

“선생님 어디 계셔?”

서걱거리는 갈대 사이로 두꺼운 패딩을 입은 남자가 무언가를 수첩에 기록 중인 이에게 물으며 다가섰다.

“저기.”

그는 도톰하게 낀 장갑을 좀 더 깊숙한 갈대 너머를 가리켰다. 키를 훌쩍 넘은 메마른 갈대숲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따로 없어, 헤치고 나갈 때마다 종잇장 구기는 소리로 바스락거렸다.

“근데. 형님?”

“...”

반보 앞선 그가 수월하도록 남자는 한 무더기의 갈대를 밀치며 어깨를 맞췄다.

“전부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분이 김준석 씨잖아요?”

“그런데?”

그는 살짝 늦춘 걸음으로 눈을 맞췄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분 사진에 쓴 이름을 봤어요. 훔쳐본 건 아니고.”

순간 난감했던 남자의 변명은 곧바로 하려던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이가 불과 두 살 찬데, 형님도 아니고,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도무지 이해되질 않아서요. 형님이 서른다섯. 저분이 서른일곱. 누가 봐도 이상하니까.”

“춘호야.”

줄였던 보폭을 완전히 멈춘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보였다. 사사삭, 바람에 고개를 가누지 못한 갈대의 은빛 깃털이 어깨에 닿아 휘청이자, 얕은 언덕 너머에 시선을 두고 나직이 물었다.

“나하고 안 지가 얼마나 됐지?”

“같이 일한 지요?”

“그래. 거의 같은 시기니까.”

“5년이죠. 군 제대하고 일했으니까.”

“5년? 그래. 그쯤 됐겠다. 그러면 그때와 지금 내 얼굴이 어때. 그대론가?”

“모습이요? 에이, 아주는 아니어도, 그때하곤 좀.”

“선생님을 만난 지 20년쯤 전이니까, 15살 전후였을 거야. 여드름투성이던 내가 이렇게 변했는데도, 저분은 그때와 똑같아. 변함없이 그 얼굴 이시지. 불우한 환경에 절망스러웠던 어린 나를 구제해 주시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그는 멋쩍게 웃고는 장춘호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나중에 말해주마. 너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는 어리둥절해진 춘호의 시선이 등 뒤에 있는 것을 느끼며 갈대 속으로 걸어갔다.

‘20년 전과 지금이 같은 얼굴이라고? 안 늙는다고? 진짜야? 표정이 농담은 아닌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처구니가 없는 궤변이었지만 도 민수였기에 실없이 웃어넘기지 못한 춘호의 골똘한 얼굴이 느릿하게 뒤따랐다.


   그는 호수의 반대편을 응시하며 우뚝 서 있었다. 민수는 그런 그에게 천년의 풍파를 넘긴 주목의 거룩함을 느꼈다. 그가 손을 넣은 비둘기색 헤링본 코트의 질감은 겨울 삭풍에 거칠어진 호수 주변의 갈참나무 껍질과 다를 바 없이 칙칙했지만, 왠지 모를 은은한 윤기가 있는 듯했다. 민수는 그 느낌을 부정하지 않았다. 김준석.

그는 신성했고, 위대했고. 고고했다. 역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은 먼 옛날부터 희망을 수호하는 숭고한 고독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차분한 음성에 뒤돌아선 김준석의 뒤, 허연 얼음판에 투명한 돌기가 바람결로 돋아나 있었다.

“아들의 소행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노모를 먼저, 노부는 마루에서 난도질하고. 방에 있는 아이까지.”

도 민수는 전해 들은 그날의 사건을 말하면서 진저리를 쳤다. 멀쩡하던 40대 남자가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칼로 난도질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갈수록 흉포한 사건이 빈번해졌다지만, 근래 들어 유독 반인륜적인 끔찍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 김준석은 일주일 전 온 나라를 들썩인 포천 일가족 존속살해 사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것은 전에 없는 극도의 경계심이었다.


   “아이고! 말도 말아유. 그이 하고 눈이 마주쳤을 땐, 오줌을 다 지렸다니께요. 아침꺼정 인사도 하고 그랬는데. 아이구야! 담 구멍으로 보는 디, 칼로 막 파더라니께요? 가슴팍에 똥그랗게 파고 가위표를 긋고. 피가 엄청나는 데도 웃고 있었다니께. 그다음에 꽥하고 소리 한번 지르더니 칼로 자기 배를 기냥. 으. 으.”

도 민수가 꿈에서도 무서워 경기를 일으킨다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보약값을 쥐여주고 겨우 들은 이야기였다.

“그래… 분명 그자 스스로 자해한 것이란 말이지? 그 문양을?”

“네, 분명히 봤답니다. 동그랗게, 그리고 원과 엑스자를 파고 자결했다고.”

“끄으. 응”

김준석의 저도 모르는 신음은 안색이 어두워진 민수에게도 또렷이 들렸다.

“그가 온 건가? 그가 다시 나타났단 말이지?”

도 민수는 온 가족을 학살하고 자결한 남자가 안치된 시체공시소를 이틀 전에 찾아가서 확인했었다. 뉴스에선 가슴의 상처를 가볍게 터치하고 잔혹한 존속살해에 집중했지만, 김준석은 우연일지 모를 문양에 집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 민수가 확인한 문양은 우려했던 원안의 엑스 표가 선명했다. 그렇기에 타인의 훼손인지, 아니면 자해 행위로 남긴 문양인지의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었다. 주체에 따라 심각성은 천양지차였기에 누군가에 의한 상흔이라면 대리인의 출현이었고. 만약, 만약에 스스로였다면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가 지배한 영혼의 광기로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뒤, 부활의 상징 표식으로 죽은 것이었다. 뒤흔들었던 불안이 명확해졌다.

   700여 년 전. 유럽을 휩쓴 감염병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거둔 대재앙의 시기를 역사는 불과 3년으로 기록했다. 김준석은 그 당시의 참상을 똑똑히 보았었다. 처음엔 감염병에 맞서 서로 돕고 보살폈던 이들에게 공포의 잠식은 오래지 않아 퍼졌다. 그로 인해 만연해진 이기심은 절망이 되었고, 급기야 변질된 공격성으로 발현한 방치와 외면은 도움이 절실했던 약자들의 숱한 주검을 탑처럼 쌓아 놓았다. 하루, 일 년. 그 후로 오랫동안 희망은 숙주인 인간성이 말살하여 변이한 절망의 탄생을 지켜보았었다. 혼돈과 자멸.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 그때와 비슷한 시기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각 나라의 국경이 봉쇄되고, 서로가 두려워 접촉을 꺼리고 있다. 사소한 실수나 범칙 행위도 극도의 난도질을 겸한 경멸과 조소가 정의가 된 사회. 그에 방책으로 제시해 권장하는 외부와의 단절은 철저한 개인주의로 표출되었다. 또다시 맞은 절호의 기회였다. 수 세기 전, 대 혼란의 유럽에서 인간의 희망과 선의 고리를 끊지 못했던 그에게 절망의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준석은 700년 만의 재출현을 그때와 견줄만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그라뇨? 선생님. 혹시. 그….”

“돌아가자!”

말보다 빠른 걸음을 뗀 그에게선 무거운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때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장춘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면에 얼어붙은 나룻배에 기대있었다.

준석은 한차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신음을 섞어 입을 열었다.

“흠. 오주희. 오주희를 만나야겠어.”

     

   “실장님. 조금 전, 세종으로 물건이 출발했습니다.”

확 트인 삼면의 유리창에 여과된 오후 햇살이 양옆에 소파를 둔 1인용 가죽 의자에 앉은 남자의 구두에서 반짝였다. 그는 회색 겨울과는 동떨어진, 고급스러운 감귤 색 재킷에 검은 바지가 칼주름이었다.

“그래요? 그럼, 부산 다음에 두 번짼가요? B등급이?”

흡족한 표정을 짓고 가볍게 손뼉 친 그가 팔걸이를 밀고 가볍게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진 부산을 제외하고 목포, 거제, 마산, 광주, 강릉에는 C등급을 보냈습니다. 이번 세종이 두 번 째죠. 다음 B등급 고려 대상은 대구와 인천입니다. C등급 수요가 업그레이드했는지, 이전부터 상위 등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공장 지붕은 신경 쓰고 있는 거죠? 겨울엔 풀도 꽃도, 덮어줄 낙엽도 없는데 어떻게 하고 계실까? 우리…. 겨울은 처음이잖아요?”

다양한 장식용 자동차가 즐비한 진열대 앞에 선 그가 검지를 입술에 대고 물었다.

그가 일컫는 지붕이란 대마초를 재배하는 지표면을 말하는 것으로, 대지 이천 평인 곳에 2층 누각을 갖춘 한옥 지하 시설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제없습니다. 애초부터 지면의 복토 층을 3중 공간으로 설계했고, 독일제 대형 청정기 다섯 대가 일곱 단계 여과를 거치기에 냄새는커녕, 오히려 신선할 지경입니다.”

“아, 참! 그랬었죠? 맞아. 하하! 그리고. 공 이사님, 그 친군 어때요? 신뢰할 수 있겠어요? 2주가 넘었죠?”

“그러지 않아도 다음 주부터 실장님 경호원으로 발령하라 지시해 놨습니다. 이미 입증된 실력이어서 침묵의 충성 테스트만 통과하면 됐습니다. 첫날부터 공장을 데리고 갔었죠. 감추었지만, 놀라는 눈치였고요. 신뢰해도 좋을 듯합니다.”

공 만호 이사는 안 주머니에서 덜덜거리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다시 넣었다.

“곁에 두시면 든든하실 겁니다. 입과 표정이 무겁고, 무엇보다 눈빛이 남다릅니다. 그리고 이참에 운전기사도 빼겠습니다. 그가 소개한 자 역시나 흡족합니다. 실장님 운전을 맡길 생각입니다.”

“그래요? 한 명 더? 그걸 다 언제? 하하하! 우리 공 이사님이 그렇다면 좋습니다.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그의 지시로 스카우트한 경호원의 평가가 기대 이상이라는 보고를 듣자, 만족한 그는 살짝 들떠있었다,

“우 상길입니다. 나이는 29세. 특전사 제대. 고향은 군산이고, 부모 형제 없는 사고무친입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이혼으로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아버지는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 주변 조건 역시 완벽합니다. 그리고 같이 채용될 차민주는 나이 26세. 우 상길의 특전사 후배로서 경남 남해 출신입니다. 가족은….”

공 만호의 보고는 휴대폰의 정보가 바닥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족히 20여 분으로 그들의 불법적인 대마초 사업을 의식한 철저한 조사 내용이었다.

“우 상길이라….”

함 사익은 어느새 뉘엿뉘엿 힘을 잃어 붉어지는 태양 빛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기억은 2달 전 새벽 워커힐 카지노 현관에서 벌어진 소란에 있었다.

과잉 의전에 경직된 경호원이 휠체어 노인을 거칠게 밀친 일은, 마침 가방을 들고 현관 회전문을 나오던 남자가 득달같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 던지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빙그르르, 노인의 짧은 비명이 벽면 전광판에 충돌하기 직전, 남자는 그사이에 가방을 정확히 던져 충격을 방지한 후, 차례로 덤벼든 서너 명의 경호원을 잇달아 쭉정이로 날려버렸다. 찰나로 느낄 만큼의 전광석화는 예술의 잔영을 남길 정도였다. 엘리베이터에서 함께한 잠시 전도, 로비를 나올 때 한발 앞서 잰걸음 하던 아주 평범한 남자가 말이다.

“허! 저, 저. 저런. 병신들.”

블랙잭 테이블에서 손을 털 때보다 낯빛이 붉어진 함 사익의 어이없는 웃음은 곁의 공 만호에게 별도의 지시로 떨어졌다.

“공 이사님. 이 새끼들이 사깁니까? 저자가 센 겁니까? 그렇죠? 사기로 만든 더 센 놈이죠? 씨발! 저 새끼한텐 다 사기겠는데? 저것들 치우고, 쟤 데려오세요.”

그렇게 우 상길은 함 사익의 경호원으로 스카우트 된 것이었다.  

   

   “인천! 다음 주로 잡아.”

“장인옥 사장을 직접 만나려고요?”

“사장은 무슨? 뼛속까지 양아치 새끼지.”

“그래도 인천은 제가 몇 번 더 정리한 뒤에 보시는 게.”

“아냐! 공 이사가 믿음이 간다니까, 우 상길이 담력과 단독 경호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어졌어. 그게 아니라면 필요 없잖아? 주렁주렁 물러터진 포도 보단, 짱돌 하나를 바란 거니까. 아! 차민주. 우 상길이가 추천했다면 기본은 한다고 봐야지? 둘로 하지. 둘 다 가 보면 알겠지. 근데, 여자 이름 같지 않아? 설마 꼬붕 삼아 데려온 고양이 새끼는 아니겠지? 뭐? 그렇더라도 입증되면 넘어가자고, 깍두기로. 하하하!”

재미없었다. 잔망스럽다고 할 만큼 생소한 모습은 그닥 탐탁지 않은 유쾌함이었다. 15층 사무실에서 내려보는 퇴근 시간대의 도심은 긴 꼬리의 행렬이었다. 차량도 사람들도 그랬다. 함 사익은 책상 위의 명패를 감상하듯 집어 들었다.

-HAM'S 리테일 실장 함 사익-

투명한 크리스털에 새긴 검은색 음각 체. 그는 측량 도구를 다루듯 명패를 창 쪽으로 들고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삐긋이 올린 입꼬리로 중얼거렸다.

“영혼을 지배한다는 게 얼마나 짜릿해. 크크. 난 재익이가 아니잖아. 저 푸른 초원이면 뭐 하냐고? 노인네 손바닥인데. 풀만 뜯다 죽을 꼭두각시. 크크!”  

   

   그들은 사무실이라지만, 적절한 표현은 창고였다. 덧칠의 흔적마저 빛바랜 2층 건물은 인천 체육관이란 들뜬 간판 글씨와 구식 쇠 창틀로 한층 흉물스러웠다.

“픽!”

함 사익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 나왔다. 외벽에 흐릿한 자국으로 남은 전화번호 때문이었다. T.62-5369. 그래서였는지, 그를 안내하던 건달이 떨떠름한 곁눈질로 계단을 올라갔다. 단 너비가 높고 좁은 계단은 전형적인 구식 건물의 형태로 가팔라 평소와 다른 근육 사용이 필요할 정도였다. 공 만호는 난간도 없는 계단을 오르면서 다락방을 떠 올렸다. 모서리의 뭉뚝한 마모는 자칫 실족할 수 있겠다는 염려까지도. 중심을 앞에 둔 상체를 펴게 한 것은 마지막 계단 끝의 밤색 알루미늄 문이었다. 불투명 유리창의 붉은 유성 페인트 글씨는 역시나 인천 체육관이었다. 땀, 훈련, 성공이란 가로 여백을 채운 문구에서 터진 한숨이 입 밖으로 나왔다.

“카! 땀과 훈련이라? 좋지. 성공은 모르겠지만 말야. 크.”

끼긱! 쇠 깎는 마찰음에 미닫이문이 열림과 동시에 반갑게 맞이하는 걸쭉한 남도 사투리가 들렸다.

“오매! 오매. 으짰스까 잉! 우리 함 실장이 이란 곳까지 다 와불고.”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곰 같은 덩치와 어울리는 우락부락한 손을 쑥 내밀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납작한 코. 째진 눈매와 더불어 큰 입을 가른 두툼한 입술.

인천 북항 파 보스인 장인옥이었다. 그는 권투선수였던 아버지가 조폭의 일원이 된 후의 영향을 받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폭력 계보를 이어오게 된 자였다.

내부는 외관상 추측과는 달리 의외로 널찍했다. 체육관답게 구색을 갖춘 운동기구 또한 제법이었다. 링 옆에 매달린 샌드백 2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누군가의 타격이 있었음을 짐작한 사익이 천천히 주변으로 눈길을 펼쳤다.

“흐미! 안적까정 날이 쪼가 쌀쌀헌디, 멋쟁이 함 실장의 빼숀은 못 막는 갑네. 하하!”

턱 근육을 밀어 올린 입술과 함께 엄지를 뻗어 보인 장인옥이 코를 찡긋하고 공 이사를 쳐다봤다.

“공 이사. 이러다 정들 것 소! 일 년 치 얼굴을 이달에 다 보요. 하하하!”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던데 딱 그 콘셉트네? 내부도, 사람들도. 후후!”

구석구석 살핀 뒤 뱉은 함 사익의 호기심은 미소의 말미에 조롱을 두었다.

“아따! 그라제! 나가 간난쟁이부터 여기서 운동 했은 게로. 이것이 좋아. 아그들 단련도 하고, 바로 도망가불지만서도 가끔 아줌시들도 오긴 허제. 하하하!”

장인옥은 듬성듬성 앉고 선 조직원들을 둘러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어디 보더라고? 첨 보는 얼굴인디? 누구 당가? 보디가드 바꿨는가?”

그의 눈빛이 조금 전관 다르게 날카로웠다. 여유롭게 뒷짐을 한 그의 뒤 두 남자에게 번뜩인 것이다.

“자! 인사는 이 정도로 끝내고 본론으로 가시죠?”

불필요한 긴장 조성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랴! 내 정신 좀 보소. 손님을 세워 놓고 시방 뭐 하고 있다냐? 들어 가드라고. 그라고, 커피 좀 가 오니라.”

그가 권한 서너 발짝 떨어진 관장실은 큼직한 내부를 유리로 덧댄 나무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관장실, 빨간 글씨.

   소파에 딸린 낡은 탁자에서 커피잔 김이 모락거렸다. 장인옥은 커피 두 숟가락, 프림 세 숟가락. 그리고 설탕, 네 숟가락이라고 굳이 묻지도 않는 조합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고 홀짝였다. 깊이 소파에 묻힌 두 사람관 다르게 엉덩이를 끄트머리에 걸친 공 만호는 내심의 긴장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간 몇 차례를 방문했건만 오늘처럼 다수의 부하가 진을 친 적은 없었다. 족히 20명이 넘어 보였다. 이 같은 세력 과시는 나름의 명백한 요구였다. 이익의 재분배. 장인옥은 기존 9%의 수수료를 20%로 상향해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구역 내 함 사익의 편의점에서 은밀히 판매되는 대마초를 묵인하는 조건의 대가였다. 그는 B등급으로 격상해 공급하려는 이때를 노렸고, 그것이 함 사익을 직접 인천으로 오게 한 동기로 작용했다.

“어째? 마실만 한가?”

실없는 미소로 관장실 내부만 살피는 함 사익이 신경전이라고 판단한 장인옥이 무릎에 턱 하니 다리를 걸치며 물었다. 부자연스러웠다. 슬개골에 간신히 걸친 종아리가 허벅지 근육의 저항에 밀리는 엉성한 모양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한 번쯤은 들어 봤겠죠?”

눈썹을 밀어 올린 함 사익의 이마에 엷은 주름살이 잡혔다. 해맑아 보였다.

“왐마? 그거이 뭔 말이당가?”

순간, 경직된 장인옥의 눈가에서 잔떨림이 일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식성이 돼지가 된 것 같아. 이젠 가리지 않고 다 먹겠대? 처먹는 것도 더 많이, 자주 바라고. 왜 그래요?”

“뭐시여? 돼지? 처먹어?”

발끈한 장인옥의 낮은 콧대 속 비강에서 거품 끓는 소리가 뿜어 나왔다.

공 만호는 심장이 철렁여 현기증이 일었다. 밑도 끝도 없이 너를 아냐는 것도 뜨끔했는데, 잇단 도발로 처먹는 돼지라니, 급격한 살기가 돌았다.

“너 자신을 알라! 이전부터 있던 아폴론 신전의 문구가 인용 한 번에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둔갑해 버렸으니, 원조가 알면 열 받지 않겠어요? 요즘처럼 저작권료도 없는데.”

고개를 한 번 갸웃했을 뿐, 분위기 따윈 개의치 않는 함 사익의 능청은 계속됐다.

“아무리 욕심나더라도 소화할 만큼. 응? 능력만큼! 처넣다가 뒈지면? 그냥 삼겹살이잖아요. 주는 걸로 고맙게 씹기나 하지, 꼭 씹혀야겠어요?”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훑는 눈초리가 돼먹지 않아 거슬렸었는데, 집돼지로 난도질당한 자존심이 얌전할 리가 없었다. 결국 장인옥의 안면 근육이 쌜룩쌜룩 경련을 일으킨 동시에 기도를 할퀸 고성이 관장실의 액자를 들썩였다.

“에라이! 씨벌 놈의 거. 주제를 모릉께 삼겹살로 구워 무거 분다고?”

역시 큰 북의 큰 소리였다. 장인옥의 찢긴 목청은 문밖의 우 상길을 비롯한 건달들의 시선을 일시에 관장실로 집중시켰다.

“어허! 잠깐! 잠깐, 장 사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실장님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

그러나 공 만호의 다급한 손사래는 살기 등등한 그의 눈초리에 밀려, 난감한 표정으로 함 사익을 보며 수그러들었다.

“풀때기 팔아 무꼬 사닝게 셋바닥에 근력이 없는가? 명줄 걸린 말을 거르지 못하는 구마잉! 어째? 삼겹살 오돌뼈에 이빨 한번 나가 볼란가?”

“...”

불끈, 힘줄이 꿈틀대는 양손이 탁자를 움켜쥔 험악함에도, 별반 표정 변화 없이 미소만 보이는 함 사익은 급기야 그의 심기를 뒤틀어 놓고 말았다.

“뭐 한다냐? 언능 문고리 걸어 부러라!”

관장실 문을 거칠게 젖힌 장인옥의 일그러진 고함이 들리자, 삽시간에 긴박해진 체육관은 철컥거린 문 앞을 서너 명의 건달이 막아서면서, 내부에 널린 운동기구를 집어 든 나머지 건달들이 슬금슬금 관장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 뒤, 링 사이드에 걸터앉은 장인옥의 입가엔 미소가, 우 상길과 차민주의 손에는 땀이 차고 있었다.

“장 사장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러지 말고 다시 앉읍시다. 사업은 소통 아닙니까? 오해와 화는 풀어야 이득이고.”

“뭐 하냐? 고시돕 순서 기다린다냐? 언능 시작혀!”

링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놓는 것으로 장인옥은 건달 셋을 우 상길에게 몰아냈다.

“휙!-휘-익!”

그러나 쇠몽둥이 역기 손잡이가 날아올 것을 대비한 우 상길은 가볍게 어깨를 틀어 상대의 정강이를 내리찍었다.

“우둑!”

그 순간, 뼈가 깨지는 묵직한 파열음이 건달의 비명을 덧대어 귀청을 울렸다.

“악! 으윽!”

차민주의 주먹이 완력기를 휘두르며 돌진한 상대를 한방에 꺾은 것도 동시였다. 주먹의 감각으론 최소 코뼈 함몰이었다. 순간 장내는 모든 것이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 뜻밖의 강력한 반격에 혼란스러워진 그들이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 상길은 차민주와 어깨 하나의 간격으로 그들을 경계했다.

두 사람의 생각은 본능적으로 일치했다. 월등한 다수의 제압은 치명적 한 방이 효과적임을, 반드시 첫 상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싸움의 법칙을. 그들이 노려보고 대치하는 사이, 함 사익과 공 만호가 두 사람의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 파워 풀 한데? 아주 섹시해.”

사태의 심각성을 아랑곳하지 않은 함 사익의 철없는 탄성이 터졌다.

“시. 실장님. 여기서 수습.”

“씨발! 공 이사야. 쫄리면 튀든가? 괜히 애들 파이팅 죽이지 말고.”

이빨을 앙다문 함 사익의 싸늘한 경고는 상황 전환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작정하고 온 것이었다. 비록 예상보다 큰 충돌이긴 했으나, 이일은 늘 변수에 적응해야 했고, 무엇보다 수수료 조정은 자존심이 허락지도 용납하지도 않았다, 성가신 버러지에겐 을도 과분한 권리였다. 오늘은 제멋대로 날뛰려는 돼지를 해체할 작심으로 우 상길이란 칼을 써볼 계획이다. 만약 그가 깨지면 버릴 기회를 미리 얻는 것이고, 그렇다 한들 안전이 위협되지 않는단 확신이었다. 재벌이란 갑옷을 뚫기엔 장인옥의 배포는 후환을 감당하지 못할 거란 판단이었다. 그사이, 대치하던 건달들이 칼을 빼 들었다. 번뜩이는 회칼을 비롯해 등산용, 호신용 등. 인원만큼 다양한 종류가 날을 번뜩였다. 꼴랑 두 명에게 일제히 칼을 뺀 것은, 벅찬 상대임을 의미한 동시에 지금부턴 부상으로 끝나지 않는, 목숨도 각오한 막장으로 치달은 것이었다.

“꼴깍!”

공 만호의 침 삼키는 소리에 우 상길이 뒤를 돌아봤다. 그때 함 사익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 없으면 접어. 우르르 빼든 걸 보니 작정한 모양인데,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능글맞은 웃음으로 바라보는 그에게선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한번 해 보던가. 쪽수가 많긴 많다. 거의 열 배니까. 이참에 칼? 히히!”

우 상길의 등을 가볍게 두들긴 함 사익은 구두 코로 공 만호의 발목을 건드렸다.

빠지자는 신호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물러지지 않았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차민주가 우 상길의 고갯짓에 끄덕이며 안 주머니에서 칼을 빼 들었다. 얼추 손잡이를 제외하고 10cm 남짓한 칼날에선 예리한 푸른 기가 감돌았다. 우 상길 역시 비슷한 칼을 꺼내 들었다. 위험의 최소화가 필요했다. 방법은 속전속결로 실질적인 칼의 공포를 체감케 하는 것이다.


   기어코 수십 개의 칼끝을 겨눈 험악한 광경은 함 사익 말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팽팽한 기 싸움의 불편함 정도를 각오했던 공 만호. 적당한 압박으로 심중의 상한선을 15%로 설정했던 장인옥. 그러나 노골적으로 의도된 조롱은 그들의 예상을 어이없게 뭉개버리고 사태를 확장 시켰다.

“획! 획!”

먼저 선수를 친 이는 뜻밖에도 차민주였다. 얼음판 스케이트를 지치듯 대담한 칼춤이 번뜩이자, 풀숲 메뚜기 흩어지듯 무너진 대열은 크고 작은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윽! 악! 으윽!”

드센 독기가 가득한 키 높이 허공에선 본격적으로 살기가 진득한 칼날이 난무했다. 정면을, 상하를. 좌우를 찌르고 긋고, 가르는 좁은 틈에서 고꾸라지는 이들은 건달들이었다. 차민주의 칼끝은 정확히 그들의 어깨와 허벅지만 찌르고 베었다. 일단의 건달들은 우 상길을 목표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차민주 뒤를 따른 그에게도 건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섀도복싱 움직임을 할 때마다 어깨를 찌르고, 상체를 굽혀 좌우로 틀면 상대의 허벅지에선 피 분수가 솟았다. 순식간에 체육관 바닥은 흥건해진 핏물로 넘어지고. 미끄러져 흡사 행위 예술가의 붓칠처럼 굵고 짧은 혈선이 피어났다.

비명과 신음은 절규와 닮아갔다. 미친 듯 현란한 두 사람에겐 망설임은 없었다. 순간과 찰나의 틈을 유영하는 빛살과 같이 찌르고 베는 연속일 뿐이었다. 월등한 세력에 초반 기세가 등등했던 그들의 섣부른 자신감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기가 막혔다. 너무 어이없어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초반부터 맥을 못 추고 당하는 부하들을 장인옥은 황당하게 직관하는 중이었다. 그만! 하고 외치려 할 때를 놓치니, 기회가 없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부하들은 심적으로 상황 종료였다. 충격은 함 사익도 매한가지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은 참극이 있기 전, 애써 태연했던 얼굴을 오히려 석고처럼 굳게 만들었다.

“고. 공 이사. 저게 가능해? 알고 있었어? 저, 저 미친놈들.”

자기도 모르게 나와 버린 욕지거리가 자신의 경호원에게 하는 것도 모를 만큼 넋이 나가 있는 그의 앞은 또 다른 대적자로 침묵이 생겼다. 장인옥이 나선 것이었다.

물러선 건달들은 움푹 팬 눈을 두 사람을 주시했다. 콧구멍을 벌렁이는 장인옥의 뻘건 안면은 금세라도 불이 붙을 것만 같았고, 그에 맞선 우 상길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음을 대비하는 호흡 중이었다.

“끙!”

피가 흠뻑 묻은 얼굴을 훔치는 차민주의 손이 잎새처럼 떨고 있었다. 피 묻은 옷에 가려진 상처가 있는 듯했다. 작은 부상이나 상처로의 신음은 그들에겐 금기였다. 실상은 우 상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뜨거운 열감이 후끈대는 등이나 어깨, 목 어딘가에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으로 미루어 두 군데 이상일 거란 짐작만 하고 있었다. 장인옥 곁에 멀쩡한 건달들은 겨우 4명. 나머지는 바닥과 구석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이대로 승패를 인정하고 끝나면 좋으련만, 상황은 장인옥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씨벌넘의 함 실장은 복도 많제! 물건 하나 제대로 차 불었네. 옆구리 땃땃하것어?”

짐짓 느물대는 여유를 부렸으나, 걸어 나오는 장인옥의 표정은 경직돼 있었다.

“콘셉트가 뭐다냐? 칼빵이여, 빤치여? 불알 찼응게 빤치 아니여?”

팔을 뻗어 손깍지를 끼고 흔드는 장인옥의 본능적 생존력은 우 상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단을 택했다. 현란함을 넘어 유려하기까지 한 칼을 놓지 않는다면 자신할 수 없었다. 맨주먹으론 승산이 충분했다. 상대는 치열한 싸움을 벌인 후였고, 감각적으로 부상을 알아차렸다. 이는 오랜 싸움으로 터득한 감각의 진화된 본능이었다.

“왜? 못 놓겄어? 그럼, 혀! 하기사. 나도 망치를 두 개나 들고 있응게 쌤쌤이것네! 붙어보자고!”

획획! 주먹을 휘둘러 자신감을 내비친 장인옥이 큰 콧김을 쏘고 목을 움츠렸다. 전형적인 복싱 자세였다. 비록 5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190cm의 신장과 그에 걸맞은 헤비급의 위압감은 실로 대단했다. 그때. 차민주 앞으로 칼을 던진 우 상길이 천천히 재킷을 벗었다.

“팀장님!”

순간적으로 다급한 제지가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음이었다. 현재의 상길은 맨손으로 장인옥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라 판단한 그가 칼끝을 세워 뛰어나갔다.

“멈춰!”

“팀장님?”

“물러서.”

단호한 그의 표정에 수그러진 그의 칼은 불안한 걸음에 딸려 물러섰다.

“시. 실장님. 좀 말리죠? 이러다 누구 하나 죽겠는데.”

잔뜩 움츠린 몸으로 사태의 확산이 두려운 공 만호의 걱정은 함 사익의 사악한 입꼬리만 부추기는 공염불이 되었다.

“이제 한계를 보고 싶어졌어. 휴! 여기서 장인옥마저 꺾어 버리면 경호원이 아니라, 수호신급이야.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 날 얼마나 안다고? 그깟 월급 몇 푼에? 아니? 아니지. 그러면 진짜 미친놈이지. 충성심에 실력까지 저 정도면.”

점차 고조된 감정이 함 사익을 뜻밖의 흥분으로 몰고 갈 그때, 타다닥거리며 스텝이 경쾌한 장인옥이 우 상길의 안면으로 묵직한 주먹을 뻗었다. 절대 빠르지 않은 스피드였지만, 쇠망치 같은 주먹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획! 획!”

하지만 번갈은 잽과 스트레이트로 파고든 주먹이 우 상길의 안면과 옆구리만 스치는 무위에 끝나자, 좀 더 깊이 밟아 근접한 목표물에 짧고 강한 훅이 찍혔다.

“퍽! 퍼벅! 파박!”

웅크려 가드를 친 우 상길의 상체가 파도를 맞은 뱃전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어땨? 맞을 만하제?”

흡족한 표정, 백 스텝을 밟은 장인옥의 자신감이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가드가 뚫려 귓등을 타격당한 상길은 윙윙거리는 이명 탓에 정확히 듣질 못했다.

“획!”

육중한 거구가 또다시 거리를 줄여 덮친 찰나였다. 그의 손아귀를 떨친 옷깃이 비명을 내고 찢겨 나가는 순간, 치솟은 우 상길의 주먹이 정통으로 그의 턱을 때렸다.

“억!”

중심이 엉킨 정강이에 곧바로 날아간 발길질은 둔탁한 타격음을 앞세우고 장인옥을 쓰러트렸다. 그러나 우 상길의 공격은 더는 연결이 없는 단발성이었다. 오히려 주춤하며 잠깐 휘청였다. 목에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싸움 도중에 칼에 베였던 상처를 장인옥의 억센 손가락이 헤집은 통증 탓이었다. 눈알이 빠질 듯 극심한 고통이었다.

“이런 씨벌 것!”

비릿한 피 맛이 자극한 혓바닥이 입꼬리에 흡착해 붉은 독기를 빨아들이는 장인옥의 눈빛이 변했다. 닭대가리처럼 잊은 고 있었다. 체육관에 들어설 때 느꼈던 바위의 기운을 칼 쓰는 솜씨에 현혹된 자만심을 후회했다. 비좁은 틈에서 날아온 펀치에 하마터면 턱관절이 깨질뻔한 상황은 급격한 태세 전환을 요구했다. 슈퍼헤비급과 미들급은 힘으로 틀어쥐면 끝나는 접근전이 그것이었다. 비록 상대보다 느리지만, 실전에서 잔뼈까지 감각된 전투력의 보스였다. 더욱이 그는 주춤거렸던 우 상길의 약점을 간파해, 속셈하고 계획하는 몇 호흡을 흘렸다. 이윽고 장인옥이 전신의 근육을 단단히 당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주시하는 건달들이나 함 사익, 공 만호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우 상길은 장인옥의 자세에 맞춰 어깨를 낮췄다. 차이라면 벌린 것과 좁힌 것이었다. 그들의 탐색은 지루했다. 실상 몇십 초에 불과한 시간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유도와 레슬링으로 대결하는 격투기 선수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한 판에 목심을 거는 것이 우덜 방식이란 말이여. 그래야 사니 께, 으잇!”

탐색을 끊는 짧은 호흡으로 득달같은 장인옥의 손이 상길의 목덜미를 틀어쥐기 위해 뻗쳤다. 방어가 무시된 매우 극단적이었다. 상길은 다급히 그의 뺨을 후려치며 어깨를 틀었으나, 손아귀는 저돌적인 멧돼지 엄니와 같이 기어코 옷자락을 잡아냈다.

‘걸려 부렀어!’

종소리가 골을 째는 충격은 일순 뇌진탕이 우려됐음에도 장인옥은 있는 힘껏 우 상길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어지러운 중심을 당기려는 자와 버티려는 안간힘이 뒤엉켜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초침의 한바퀴를 채우지 못하고 상길의 디딤발을 흩트렸다. 무자비한 완력에 피떡이 뭉친 상처에도 목깃이 조각도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버티던 상길이 끌리는 속도에 장인옥의 얼굴을 들이받는 동시에 그 틈을 회전해 팔꿈치로 재차 안면을 강타했다.

“억!”

짧은 외마디 비명에 고스란히 전달된 감각.

‘끝났다!’

“끄으윽! 끄극!”

그러나 숨통은 예상을 깨고 더욱 옥죄었다. 눈두덩이가 함몰돼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다시피 하는 장인옥의 사력이었다. 대롱대롱 들린 상길의 발과 무릎이 그의 정강이와 허벅지를 사정없이 가격해도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쇠사슬이 된 손아귀는 터질 듯 힘줄이 부풀었다.

“끄윽! 풉!”

깨진 코와 입안의 핏물이 기도를 막는지, 상길의 얼굴에 한차례 피를 뿜은 장인옥의 호흡이 거칠었다. 놓지 않는 목 죔으로 힘쓰는 자와 정수리에 한 줌 호흡만 남은 자의 낯빛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던 그때, 쿨럭하며 재차 피를 토한 손아귀가 느슨해진 사이, 상길의 오므린 손끝이 창날처럼 그의 늑골 아래로 깊숙이 박혔다.

“흡!”

단발의 신음, 장인옥의 무릎이 비틀하고 꺾였다.

“쿵!”

절굿공이 찧는 울림은 거구의 침몰로 이내 눈동자가 허망해졌다. 가르랑가르랑. 아슬아슬한 숨을 가까스로 붙잡은 표정에선 인정할 수 없단 경악 속에 갇힌 듯했다.

“아이구야! 끝났나? 끝난 거 맞죠? 와! 내가 이런 걸 다보다니. 이건 완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써야 할 것 같아. 엄청 리얼리티하잖아? 안 그래요, 공 이사님? 휴우!”

손바닥을 비비며 관장실을 나온 함 사익이 들뜬 기분을 뿌리며 장인옥에게 걸어갔다.

“오! 솔직히 좀 쫄렸어요. 이렇게 무식하고 사나운 돼지 새끼를 과연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이죽거리며 다가선 함 사익의 손에는 어느샌가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쯧쯧! 아작이 났네. 하지만 이 판이 원래 그렇잖아? 상대가 이길 만 하면 쪽팔린 게 아니죠. 하지만, 촉이 무뎌진 객기는 어떡할 거야? 아니. 그걸 왜 모를 수 있지? 사느냐 죽느냐인데. 더 센 놈! 더 강한 놈! 그러고도 아직 이 판 떼기에서 버텼어?”

“아 악!”

차가운 미소가 순간 지나가고, 함 사익의 무덤덤한 칼끝이 장인옥의 허벅지를 힘껏 쑤시고 들었다. 그는 칼날의 반이 박혔음에도 두어 번을 틀었다. 잔인은 이럴 때 쓰는 말임을 일깨우는 듯이.

“아아악! 악!”

고통으로 악에 받친 그가 머리를 낚아채려 하자, 함 사익은 슬쩍 턱을 당겨 피하고는 그의 안면을 걷어찼다.

“불알 달고 인정을 안 하네? 몰라? 전쟁은 진 뒤가 더욱 무서운걸? 이긴 사람 맘대로. 그게 룰이잖아요. 고거 한 번 찔렸다고 성깔 부리는 큰 돼지 새끼한테는 객기만 있지 용기가 없네? 상대를 몰라본 잘못을 비는 용기가 없어. 못하겠어요?”

상실되지 않은 전의의 눈빛관 달리 간신히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장인옥의 몸뚱어리는 타작이 끝난 볏짚단과 다름없는 만신창이었다. 심지어 함몰된 콧잔등이 부어올라 흐릿한 시야에선 함 사익의 모습보단 목소리가 더 또렷했다.

“그러니까 주는 물로 얌전한 화초로 있을 것이지, 왜, 가시를 돋아서 도끼로 처맞고 그래요. 혹시? 가시 주엽나무를 따라 한 거예요? 안 먹히려고? 아! 참, 참! 돼지 새끼가 그게 뭔지 알 턱이 없지? 그걸 알면 진즉 깡패 새끼로 격을 높여줬지.”

끔찍한 치욕에 경련하는 상대를 쭈그려 앉아 철저히 조롱한 그가, 피 묻은 칼을 내던지고 링 주변에 무릎을 꿇은 건달들을 둘러봤다.

“사는 게 참 재밌었겠어? 우르르 가서 때리고 욕하면 얻었으니까. 뭐? 그것도 사실 재밌긴 하지. 크크. 겁먹은 꼴을 보면 우쭐한 기분에 어깨가 대갈통 위로 솟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죠. 때렸는데? 그, 는데가 알는지 모르지만, 연결어미거든? 그다음을 만드는 사람이 누가 될 줄 알고?”

말끝을 흐리는 함 사익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장인옥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의 여백을 채우려는 듯, 시퍼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살면서 한 번 무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게 뭘까요?”

“....”

살기 등등했던 장인옥은 그사이 한풀 꺾여 있었다. 함 사익은 그런 그에게 삐긋이 웃으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그냥 부자도 좋겠죠? 그런데 재벌은 격 자체가 한참 달라요. 내가 누구예요? 재벌 아들이잖아요. 또, 한 기업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니까 나를 맞이한 처음을 바꿔야죠. 재벌 앞에선 제발, 했어야지. 어쭙잖게 푼돈 욕심에 삥 뜯는 짓거리 말고. 제발, 하고 기질 않으니까 이 꼴이 되잖아. 알량한 두목질도 쫑치고.”

함 사익은 구두코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장을 바닥에 던졌다.

“저, 저. 쟤네들은 무슨 죄야? 치료비로 충분할 거야. 에이! 아프겠다.”

몹시 속이 쓰린 표정으로 쓰러진 건달들을 동정한 그는 깊게 찌푸린 미간으로 턱 끝을 관장실에 가리켰다.

“공 이사님! 아까 보니 저 안에 술 한 병 있던데? 가져오세요.”

함 사익은 관장실로 들어간 공 이사가 술병을 찾은 것을 보고, 차민주의 부축을 받은 우 상길에게 대견한 눈길을 주었다. 그의 입꼬리는 금방이라도 째질 것 같았다.

“다들 아파서 정신이 없겠지만, 잘 들어요. 이 순간 이후 대가리 체인지! 그건 술 한잔으로 조문하고 알아서들 정하세요. 돼지 새, 아니. 아니지, 그래도 마지막인데. 장인옥 사장의 사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론 인한 쇼크사입니다. 음주 운전 사고도 좋겠지만, 지금은 번거로우니까 아쉬운 대로 그렇게 하죠. 자존심이 상한 겁니다. 그래서 관장실에서 병나발 불다 간 걸로.”

소름이 돋았다. 태연스럽게 사람 목숨을 끊으려는 함 사익의 잔혹성도 그렇거니와 사건의 뒷수습을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배짱은 처리가 부실할 경우 각오하라는 공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 실장님. 그렇게까지.”

안경테가 걸린 코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공 만호가 술병 넘기길 주저하는 눈치이자, 순간 번뜩인 살기로 술병을 잡아챈 함 사익이 마개를 비틀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오게 하지 말았어야지. 오면 끝장 볼 걸 몰랐어? 그깟 푼돈 덜 주려고 직접 왔겠냐고? 벌레가 자꾸 신경을 건드리니까 찍어 죽여야지. 등으로 목으로 이젠 머리까지 기어오른다는데, 씨팔! 웃어주니까 아주, 동급이야. 그치?”

화살은 엉뚱한 공 만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천성화 된 우월 의식을 최측근인 그에게도 여과하는 법이 없었다. 대략 인간 체중의 1/12 정도의 혈액 중에 20% 이상을 손실하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가정하에 장인옥은 가망이 없음이 짐작됐다. 과다 출혈을 일으킨 부위는 함 사익이 칼을 꽂은 허벅지였다, 아마 동맥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장인옥 씨. 다음 생엔 만나지 말죠. 억울하단 생각은 마시고. 만약 당신이 이겼으면 내가 이 꼴이 됐을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한 잔 쭉 마시고 기분 좋게 가기?”

그러고는 가랑가랑 숨을 앓는 장인옥의 가슴에 올라타, 주저 없이 술병 주둥이를 입에 쑤셔 넣었다.

“커! 커걱!”

“허! 아까운 술. 배, 뱉지 말고. 삼.켜..야”

끝끝내 쑤셔 박은 술병은 그를 신경이 끊긴 생선회로 만들었다. 파닥파닥! 팔과 다리는 일견 저항이었다. 그러나 우 상길에겐 극심한 괴로움에 치는 홰로 보였다.

“끄. 끅!”

병목에서 꿀렁인 액체는 끝내 목젖의 본능 반응에 따라 기도를 따라 흘러들었다. 반의반, 그리고 그에 반이 줄어들고. 술병의 라벨 끝에 잔량을 출렁거릴 때쯤, 더는 삼키지 못한 목젖은 술을 입 밖으로 흘려냈다. 그 뒤로 멈춘 경련에 더불어 가랑가랑 앓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반응이 정지된 장인옥을 내려보는 함 사익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해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한 공 만호도 처음 보는 미묘한 모습이었다.

‘헉! 저. 저건?’

함 사익의 잔혹한 짓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우 상길이 갑자기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렸다. 아버지. 비 오는 날 밤의 사고. 부상으로 꼼짝없이 지켜만 봤던 검은 그림자가 한동안 가동하지 않던 시냅스를 자극해 악몽을 재현한 순간이었다.

“쿵!”

망연자실한 우 상길이 무릎을 꺾자, 바닥 매트에 흡수되지 않은 충격으로 관장실 유리가 간지럽게 울렸다.

“팀장님!”

놀란 차민주의 외침에 시선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의 이질적인 감정은 각자의 뇌리를 전류로 자극했다. 한때 참담했던 시절을 복각하려는 기억의 실마리고, 다른 하나는 이번 일을 기점으로 전국 유통망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였다.

“오늘 일을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난 기억력이 아주 좋습니다. 내가 다시 오면 우리 양아치 졸병들은 차라리 이참에 죽었을 걸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질 겁니다! 오케이?”

냉랭하게 거의 넋이 나간 건달들을 훑은 함 사익은 느긋한 걸음으로 눈짓을 깜빡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 만호의 휴대폰 화면에 멀찍한 그들의 면면이 당겨졌다.

“영정 사진으로 쓸 생각 아니면 잘 하자고요? 다 됐으면 갑시다!”

마지막으로 체육관 전체를 크게 둘러본 함 사익이 소름 돋는 미소로 걸음을 떼자, 알루미늄 문의 철판 긁는 소리에 이은 구둣발이 계단의 울림으로 점차 멀어졌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활기가 돌던 체육관에 남겨진 건, 비릿한 피 내음과 곳곳의 신음. 그리고 장인옥의 죽음으로 말살된 의식과 공간이었다. 초점을 잃은 자들의 눈동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에게 다음을 바라는 무의식의 강제가 제멋대로인 골목길의 과일 장수 스피커 소음과 맞물려 겉돌았다. 지금이 없는 곳은 다음도 없다. 이해되지 않은 상황은 대처가 되질 않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력감이 지속됐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절제한 신음이 흐느낌으로 바뀌려는 그때, 뻗어있는 장인옥의 가슴 위로 섬뜩한 기체가 몽글거렸다. 흡사 망토를 연상케 하는 검은 기운은 수조의 물고기처럼 전신을 유영하고는, 심장 위로 낮게 머물러 맴돌았다. 그러길 잠시, 검은 운무는 일순 원형의 고리로 응집해 전신을 돌며 그래픽 이퀄라이저의 파동을 닮은 맹렬한 섬광을 일으켰다. 사체는 달군 프라이팬의 소금 튀듯 솟았다 꺼지고, 꺾였다가 펴지길 되풀이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기한 장면은 건달들은 공포의 패닉에 빠뜨렸다. 수십 개의 동공이 터진 핏줄로 숨을 꺽꺽거렸다.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깊은 구석을 찾아 웅크려 쇼크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체 위의 연속된 섬광과 점멸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장인옥의 사체가 더는 반응하지 않자 갑자기 사그라졌다. 그리고 가슴 위에서 물결을 타는 듯 부드러운 검은 기운은 서서히 동심원을 형성해 하나의 구 모양으로 응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일종의 정제 작업이 끝난 것이었을까? 탁구공 크기의 칠흑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사체는 냉기에 휩싸여 갈라진 피부를 터트려 죽은 장인옥을 깨웠다.

“꺽! 꺼! 꺼억!”

솟구친 가슴만큼 긴 숨통이 트인 장인옥은 이마에 독특한 문양이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불꽃 안광을 뿜은 뒤 의식을 잃었다. 검게 죽은 살점이 도드라진 양각은 장인옥에겐 없던 것이었다. 이후로는 모든 게 잠잠했다. 하지만 팽배해진 두려움에 갇혀 숨소리마저 자유롭지 않은 그들은 그저 침묵 속 경악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때가 된 것 같아. 조직을 만들어야겠어. 오늘처럼 깨버리든지. 접수하든지, 이젠 전국이야. 양아치 새끼들을 싹 걷어버리고 고급지게 가는 거야. 천성부터가 기생충인 놈들하곤, 더는 신경이 거슬려 못하겠어.”

뒷좌석에 깊숙한 함 사익이 콘솔박스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공 이사님! 가능한 한 빨리. 그런 족속들은 돈이 충성이니까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는 음흉한 미소로 나직이 공 만호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대꾸가 없었다. 그의 뇌리엔 되살아난 함 사익의 잔혹한 성격이 차후 가져올 모든 것들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었다. 십수 년 중, 조용했던 시기는 근래 몇 년에 불과했었다. 그전까진 차마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심심하단 이유로 불특정인을 폭행해 불구로 만들어 놓은 일이며, 마약에 취해 룸살롱 파트너가 성에 안 찬다고 술잔을 깨 얼굴을 그어 버린 잔인한 짓거리의 변명은, 아예 이런 일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마약을 흡입하고 벌인 사고가 가장 빈번하고 잔인했다. 다량의 마약을 파트너에게 주입해 사망케 한 사건은 재벌의 힘으로 피해자를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로 둔갑시켜 무마했고, 파티의 성격을 몰랐던 여성이 그룹 스와핑을 저항하자, 집단 성폭행으로 결국엔 사망으로 이르게 했던 끔찍한 사고도 마약에 취해 벌인 일이다. 그처럼 재벌이란 배경은 무소불위의 신처럼 전방위적이었다.

“끄응.”

“뭡니까? 공 이사!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예요?”

마뜩잖은 눈초리가 죽은 안색의 공 만호를 더듬다가 옅은 한숨이 되었다.

“쯧! 쯧! 간덩이하곤. 그냥 돼지 한 마리 잡은 겁니다. 주는 거나 얌전히 먹을 일이지, 감히 겸상하려고 덤비니 그 꼴 난 것 아닙니까? 안 그래요? 그리고. 술병은 챙겼죠?”

“....네.”

“젠장!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찝찝해. 어디 적당한 곳에 세워봐요.”

그가 눈꼬리를 치켜뜨고 옷을 탈탈거린 위치는, 어스름이 찬 경인 고속도로 부평 표지판을 막 지난 때였다.

“참! 아까 팀장님이라고 하던데? 무슨 팀장?”

함 사익은 재킷을 벗어 바닥에 쑤셔 넣다가 공 만호에게 물었다.

“아니. 그게….”

“팀장이 뭐예요? 내 경호원 직급이 고작 팀장이라고?”

“그게, 제가 정한 것이 아니라.”

“그럼?”

미간을 찌푸린 함 사익이 때마침 룸 밀러로 마주친 차민주에게 질문을 돌렸다.

“그럼 두 사람이 편한 데 정한 건가?”

그 순간 난처한 차민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냐, 괜찮아요. 진즉 정해 줬어야 했는데. 미처 신경을 못 썼네. 그렇다고 팀장은 아니지, 그래. 이제 조직을 갖출 거니까 부장이 좋겠어요. 실장이 둘이면 헛갈리잖아? 차민주 경호 팀장하고. 그 정돈 돼야지. 측근 중의 최측근이니까. 팀장 실력도 증명이 됐고. 근데. 왜? 팀장님이라고 부른 거지?”

여전히 남은 의문에 그의 가는 눈이 풀어진 것은, 차민주를 대신한 우 상길의 답변 때문이었다.

“우리가 속한 사조직에서의 호칭입니다.”

목의 상처에 손수건을 대고 있던 우 상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술병을 꽂아 장인옥의 숨을 끊은 이후 단 한마디도 없는 그는, 악몽이 투영된 트라우마를 호되게 겪는 중이었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어처구니없게 재현된 살인 방법은 가히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단정할 순 없었다. 단지 실낱같이 불거진 꼬투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좀 더 확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신뢰를 다질 필요가 있었는데, 때마침 최대한 빠른 조직을 원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사조직? 우 부장님이?”

함 사익의 처세는 기가 막혔다. 우 상길의 사조직에서 순간적으로 그가 바라는 조직을 연상한 것이다. 그렇기에 부장이란 호칭을 자연스럽게 붙였다.

“네.”

“조직이라고 할 정도면 인원이 꽤 되나 봅니다?”

“많다고 하긴 그렇고. 저 포함해서 아홉 명입니다. 군산을 기반으로”

“아홉 명이 군산? 그렇긴요? 난 세 명이잖아? 공 이사, 우 부장. 차 팀장. 이렇게.”

사뭇 기대가 담긴 그의 속내는 다음 질문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팀장이라면, 리더?”

“그렇습니다.”

“우 부장의 사조직이라면 당연히 같은 과겠고요?”

“....?”

“한마디로 경호나 뭐, 이런 친구들이겠단 말이죠.”

“맞습니다. 전부 경호원이나 전문 경비 같은.”

“실력은? 차 팀장 정도?”

함 사익의 부푼 관심은 어두운 차내에서도 확연했다. 점차 변해가는 표정에 따라 부산해진 손짓과 답할 틈 없이 퍼붓는 질문은 듣는 공 만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엇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들끼리 그런 것이지, 동일 업종과 비교하면 월등합니다.”

“하하! 멋지다. 월등이라는데 왜, 오만하게 안 들릴까? 좋네요, 아주 좋아. 군산이라고요? 전라….”

“북도. 전라북도입니다.” 공 만호가 곧바로 거들었다.

“전북 군산…. 거기란 말이죠?”

골똘한 생각에 굴림을 맞춘 눈동자가 차창 밖 스치는 전조등을 담아 반짝였다.

“차 팀장! 차 좀 세워요. 옷을 마저 갈아입어야겠습니다. 공 이사님은 술병을 박살 내시고, 나중에 증거로 튀어나오면 귀찮아지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속력을 줄인 세단은 갓길의 넉넉한 공간을 찾아 진입했다. 차가 완전히 멈추자 잽싸게 트렁크에서 옷을 꺼낸 공 만호가 술병을 나무 뒤로 내던지고 그가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팀장님. 아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함 사익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갓길 옹벽을 마주 보고 섰다.

“저렇게 악독한 인간을 경호해야 합니.”

“민주야. 경호원에겐 선 악이 아닌 대상만 있을 뿐이다. 그게 경호원의 자세고.”

“그렇지만….”

“그래. 바꾸면 되는거지. 그런데…. 내가 저 사람의 경호를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아까 체육관에서 한 행동 때문에.”

“네? 그게 무슨?”

“차차 말해주마. 그리고, 우리 조직이 통째로 와야겠다. 답답하겠지만 그 또한 묻지 말아다오. 나중에 설명할 테니.”

뿌옇게 흩어진 가로등 불빛에서도 상기된 얼굴이 역력한 우 상길에게, 크게 숨을 뱉은 차민주가 미소를 띠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팀원들에게 통지하겠습니다.”

“차 팀장. 갑시다!”

몇 걸음 떨어진 차 트렁크에 피 묻은 옷을 챙겨 넣은 공 만호가 차 문을 열고 그들을 불렀다.


   “우 상길 부장님.”

상길은 함 사익의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살면서 특권이란 걸 가져본 적 있습니까?”

“...”

왠지 끈적함이 담긴 음성은 차민주의 눈길도 룸 밀러 속으로 끌어당겼다.

“남들이 갖지 못해 안달인 특권을 우 부장에게 준다면 어떨까, 궁금한데 말입니다.”

그의 뜬금없는 말이 내포한 의미를 알아차린 이는 우 상길뿐이었다.

“실장님께 누가 되질 않는 선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그 마음 아주 좋습니다. 내가 주지요. 우 부장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특권을 주겠습니다. 때론 겸상도 나눌 특별한 권리를 말입니다. 하하하!”

경인 고속도로가 여의도로 쭉 뻗은 지하차도만큼 시원한 웃음소리가 차체에 부딪혀 공간을 울렸다. 사실 말을 꺼낸 건 오늘이었지만, 조직 구성에 대한 갈증과 고심이 오래전부터였던 함 사익에게는 뜻밖의 귀인이었다. 더불어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건 충성스러운 자의 조직이었다. 제아무리 욕심이 많은 그로서도 더는 바라면 안 된다고 할 만한 만족의 극치였다.

‘크크크. 센 놈들이 평준화된 일명 센 라인. 그래. 그런 조직이 절실했어. 어스래기 백 명이면 뭐 해. 센 라인에 막강한 자금력. 그거면 끝이야.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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