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운명의 가디언과 Mr. Ⅷ
겨우내 갇혔던 이른 봄기운이 온도감 좋은 해풍을 기압골로 풀어 놓자, 담청색 물결 청사포엔 뱃머리의 하얀 금이 어느 때보다 다채롭게 그어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지역 명소인 해변열차의 플랫폼에 길게 줄 선 모습은 오주희에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녀는 골목길을 나와 넓은 내리막길 좁은 철로를 건너며 중얼거렸다. 아직 운행하지 않기에 아마도 잠시 후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것이고, 대부분 그랬듯 카메라를 주면서 저마다의 포즈를 취할 거라고. 그녀가 찾은 곳은 등대였다. 청사포의 상징인 빨간 등대는 하루 두 번 그녀가 찾는 곳이기도 했다. 테트라포드에 부서진 걸쭉한 포말이 나비의 날갯짓으로 하늘로 떠 오르는 것에 미소 짓고 기지개를 켠 그녀는 눈부신 윤슬에 얼굴을 찡그리다가 갑자기 골똘해졌다. 그저께 밤, 도 민수가 선생님을 모시고 내려온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이었다. 신비한 인물. 오피스텔에서 그녀를 구해줬음에도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이었다. 도 민수는 그녀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의 배려라고 했다. 덕분에 비록 강압에 의한 중독이었지만, 마약에서 벗어났고, 갈 곳 없던 천애 고아인 그녀가 안정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야릇한 감정에 들떠 있었다. 도 민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닌,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수 세기. 어쩌면 그 이상을 이 땅에 존재하면서, 상처와 병을 스스로 치료하고 노화도 멈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을 보여줬었다. 어린 도 민수 옆엔 미소가 없는 김준석이 무미건조하게 서 있었다. 30대 중 후반의 호리호리한 남자. 지금도 그 모습이란 남자. 도 민수가 그를 언급할 때는 음성을 떨었고, 경외심에 벅찬 표정이었다.
“주희야! 뭐하노? 일루 온나, 날이 차구로. 감기 든 데이.”
그녀가 망연한 수평선에 넋을 놓은 것으로 보였는지, 통발을 걸친 늙은 뱃사람이 혀를 끌끌 대며 물었던 담배를 뱉었다.
“안녕하세요?”
“니, 거서 뭐 하는데? 아침부터 청승 맞구로”
“에이, 청승은 무슨 청승? 사색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저런 감정을 풍부하게 하는 고상한 취미. 히!”
“뭐라꼬? 사색? 우얐든 간에 보기 안 좋다. 딱, 서방 죽은 뱃놈 마누라 얼굴이래이. 멍청히, 매가리도 엄꼬, 할라면 예쁘게 하그래이. 팔자는 표정대로 가는 기라.”
“아…. 그렇게 보였어요? 그럼 안 되는데? 오케이! 담부턴 예쁘게. 히히!”
“그래. 그라고 니 좋아하는 그거 사 놨다. 가 한 잔 묵어 봐라.”
그는 기울어진 통발을 어깨에 둘러메고 성큼성큼 정박 된 연안 통발어선들을 지나, 움막으로 향했다. 대략 5평 남짓한 천막은 어부들의 쉼터와 간단한 조리, 보관을 겸한 곳이었다.
“코코아? 어머! 코코아를 다 사 오셨네?”
움막에 들어선 늙은 어부는 메었던 통발을 대충 던져놓고 낡은 테이블 위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의외로 깔끔한 테이블엔 커피 믹스와 함께 코코아가 담긴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제까진 없었던 것이었다.
“주희 왔나? 할망구들 데불고 다니느라 고생 했제? 욕봤다.”
때마침 움막으로 들어온 다른 어부가 굵은 밧줄을 구석에 급히 던지고 나가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 깊이 팬 주름과 거무튀튀한 피부, 누런 이가 유독 돋보였다.
“고생은요? 할머니들하고 다니면 얼마나 재밌는데요.”
“인자, 다 간기가?”
늙은 어부는 그녀에게 김이 모락모락한 머그잔을 건네고, 커피 믹스 봉지로 종이컵을 저으며 물었다.
“아뇨? 모레 한들 할머니하고 영천 할머니 두 분. 그러면 이번 달 병원 진료는 끝!”
두 손으로 쥔 머그잔을 호호하고 분 그녀가 진한 코코아 향에 기분이 좋은 듯 코끝을 움찔거렸다.
“참말로. 니, 아니면 깝깝시럽다 안 하나. 새끼들도 니캉 비하면 남이라 카이. 욕 본데이. 그라고 이따 내랑 자갈치 갔다가 깡통 시장 좀 가자.”
“네? 거긴 왜요?”
호로록. 한 모금의 코코아를 넘긴 주희가 땡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영덕 아지매 딸 아가 그러던데. 젊은 아들이 거서 옷도 신발도 마이 산다 카더라. 니, 옷 좀 사줄라 칸다. 신발도.”
“네에? 또요? 작년에도 사 주셨잖아요. 아저씨. 저 옷 충분해요.”
“어데? 그건 가을이고. 이젠 봄 아이가? 잔말 말고 따라온 나. 작년 맹키로 설렁설렁 고르지 말고, 이쁘고 좋은 거. 알긋나? 그라는 기다?”
그는 꾸깃꾸깃 뭉갠 종이컵을 화목난로 뚜껑을 열어 던져 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거절을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니는 내 딸로 되고. 우리 마을 딸내미인 기라. 다 늙어가 괴기 잡고 짱어 잡아 그런데 안 쓰면 뭐에 쓰겠노?”
움막 입구의 뚝배기 재떨이를 발로 밀어낸 그가 담배를 물고 포구에 정박 된 어선들을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그와 뱃사람들은 그녀가 움막에 있을 때는 담배를 밖으로 나가서 피웠다.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봉지가 아닌 나무젓가락으로 저어주었다. 최소한 그녀에겐 모두가 그렇게 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누가 온다고 해서 안 되는데?”
“누가 온다꼬?”
그는 의외란 표정으로 잠시 갸우뚱거리다가 되물었다.
“그 총각 오나?”
총각은 도 민수를 일컬었고, 이따금 찾아와 그녀를 돌봐주던 이었기에 알고 있었다.
“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분과 함께 온다고 특별히 신신당부하셨어요.”
“글나? 그럼, 우야면 좋겠노?”
“오늘 말고 아무 때나 아저씨 편한 날에 가요. 군소리 없이 따라갈게요. 히히!”
오주희는 어느새 비운 머그잔을 테이블에 놓고, 난로 옆에 다가서 불을 쬐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여기 들어오니까 쌀쌀하네, 근데 아저씨? 어떻게 코코아를 다 살 생각을 하셨어요?”
“할매들이 그카데? 니, 코코아 좋아한다꼬. 집에서 몇 잔씩 마신다 카기에 안사왔나? 무거보니 달달 한 거이 맛나네.”
“그쵸? 달달하고 진해서, 마시면 그냥 마음도 따뜻하고 행복해지거든요.”
“글나? 앞으론 여 와서도 마시거래이. 넉넉히 사둘 꾸마. 그라면 내일 바다 나갔다 와서, 모레 가자. 총각한테도 저녁때 볼 수 있으면 내 좀 보자 카고.”
“네, 그럴게요.”
그녀는 움막을 나와 걸었다. 바닷가 마을 특유의 파란 지붕들 넘어 얕은 산머리 소나무 군락이 일출의 여운을 황금빛 두건으로 쓰고 있었다. 평소라면 평온한 이 순간 미소가 번졌어야 했다. 하지만 뜻 모를 한숨이 폭하고 새 나온 건, 이틀 밤잠을 설치게 한 도 민수의 한마디가 명치끝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주희야,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하셔도 놀라지 마.”
약속보다 훨씬 늦은 시각, 오주희를 태운 도 민수가 청사포를 벗어 나 어디론가 운전하고 있었다. 집 앞의 간단한 인사 뒤로 지금껏 대화가 없었다. 왜 혼자 왔는지, 어디로 가는 건지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도심을 주행한 차는 와본 적 없는 제법 큰 병원 앞에서 멈추었다. 그때 주희는 생각했다. 같이 오지 못한 이유가 혹시? 그러나 도 민수의 긴장된 표정은 다른 말을 꺼냈다.
“후!”
도 민수의 시작이 마치 숨비소리와 같았다. 그 또한 긴장한 상태임을 직감했다.
“저 앞 언덕길을 넘으면 감천 문화 마을이야. 선생님은 그곳에 계신다. 지금껏 근 20년을 뵈었지만, 이번처럼 긴장하신 모습은 처음이야. 네게도 말했지만 정확한 건 아직 나도 몰라. 다만…. 아니다, 여하튼 가 보면 알겠지.”
도 민수는 지긋한 눈길을 거두고 방향지시등을 작동했다. 늦은 밤, 좁고 가파른 도로에는 갓길 따라 즐비한 주차 말고는 통행이 뜸했다. 급격한 경사와 구불구불한 도로는 도 민수의 운전대를 숨 가쁘게 하길 반복하다가, 올라온 길만큼의 내리막으로 차의 숨통을 틔워줬다. 여전히 주희는 어떤 질문도 하질 않았다. 그저 평온한 여행자인 것처럼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내리자.”
도로 축대 아래 주차한 도 민수가 리모컨으로 차 문을 걸고 한 발짝 앞서 걸었다.
늦은 밤 시멘트 도로의 잔돌이 두 사람의 걸음에 맞춰 야무지게 바삭거렸다. 주희는 걷는 동안 길가의 가로등은 보름달이고, 멀리 다닥다닥 집들 창문에는 별이 박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오 분쯤을 걸어 감천문화마을의 상징 조형물인 어린 왕자 동상 앞에 다다랐다. 한 남자가 분지 마을의 촘촘한 지붕과 멀리 감천항의 아스라한 불빛을 난간 위에 걸터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주희는 가만히 조형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 도 민수가 내려간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선생님. 오주희 씨를 데려왔습니다.”
어린 왕자와 같은 방향의 시선으로 장춘호와 얘기 중이던 김준석은 가만히 끄덕이며 손짓했다. 한 걸음 물러선 장춘호와 돌아선 도 민수의 사이로 이미 계단을 내려선 그녀가 멈칫했다. 영문 모를 엄숙한 기운 탓이었다.
“춘호도 있어라.”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자리를 피하려는 장춘호를 김준석이 제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주희와 마주했다. 그녀의 광배는 이전보다 한층 강하고 깊게 변해있었다. 그 현상은 오직 김준석에게만 보이는 성스러운 아우라였다.
“오느라 수고했어요. 우리 처음 보지요?”
“네.”
“도 군을 통해서 주희 양의 근황은 수시로 듣고 있었습니다.”
“...”
“놀랐죠? 그럴 겁니다. 워낙 급작스러웠으니까.”
‘도군?’
또래의 남자를 거리낌 없이 아이 취급하듯 하대하고 있는 그였다.
“주희 양! 집중했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김준석의 눈길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기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주희 양. 당혹스럽겠지만 내 질문에 조금의 가식 없는 답변을 바랍니다.”
도 민수와 장춘호를 곁에 둔 김준석은 오주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순간 김준석의 눈동자에서 그윽한 서기를 느낀 그녀가 흠칫하고 침을 삼켰다.
“주희 양은 선이 무어라 생각합니까?”
“...선이요?”
“그렇소. 흔히 착하다고 말하는 그 선 말이오.”
“음….”
그녀는 대답하기 전, 어두운 마을의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밝았던 집들의 별들이 빛을 잃고 계단처럼 어긋나 밤의 장막에 흡수돼 있었다.
“제가 아는 선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 상처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생기는 것이니, 필요한 만큼을 아는 거로 생각합니다.”
“그럼. 희망은 어떻소?”
“희망…?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죠. 꺾여도 넘어지지 않을 버팀목이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잠시라는 위로가 되어 다시 안간힘을 모을 수 있는 근원이 아닐까요?”
오주희는 갑자기 목멘 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반짝인 눈물을 또르르 떨궜다. 불법 대부업체에 오십만 원의 빚이 화근이 돼 성매매 업소에서 무려 3년 넘게 구속되었던 지난날. 조직원과 손님들의 욕정받이로 수치심을 못 견뎌 실행한 극단적 선택이 실패하자, 그녀에게 돌아온 건 마약이었다. 약기운은 거의 온종일 지속됐다. 그러다가 간혹 약해질라치면 스멀스멀 지옥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무엇인지도 모를 틈만 있으면 손톱이 빠지도록 후벼파 입을 처박았다. 절망조차 죽어버린 영혼의 괴이한 숨소리. 그런 그녀를 김준석이 구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유 없이 극심한 통증이나 호흡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까?”
“...있어요. 특히 요즘 들어서 자주.”
“요즘이라면?”
김준석의 안색이 무겁게 변했다.
“한 6개월? 아니, 1년쯤 된 것 같아요. 자다가도, 얘기하는 중에도. 때 없이 기절할 만큼 아프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속옷까지 식은땀에 젖어있었어요. 병원에도 갔었지만, 특별한 점이 없다기에 마약 후유증이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셨죠?”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1년이라 했지만, 마약중독 치료 중에도 분명 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단지 치료 과정 중의 금단 현상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김준석도 마찬가지였다 근래 들어 더욱 잔악해진 사건과 반인륜적인 악행이 빈번하게 늘면서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깊은숨에 이어 가는 실 숨을 두 번째로 내쉬었다. 그러고는 멀리 감천항의 가물거리는 불빛을 응시하고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반드시 확인이 필요한 질문이었소.”
그 순간. 도 민수를 비롯한 이들은 싸늘한 밤공기에 오싹한 등골을 느꼈다.
“오주희 씨! 당신은 가디언의 운명으로 태어났소. 당신이 말한 고통의 원인은 단 하나. 인간애가 말살되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가벼운 감기처럼, 때론 중병을 겪은 것이오. 당신은 모든 인간의 영혼과 순수하게 닿아있소. 쉽게 말하자면 오염되지 않은 초순수의 물과 같아서 아픈 영혼과 섞이면 주희 양에겐 고통이지만, 흡수된 영혼은 정화로 치유되는 것이오. 물론 치유된 영혼이 누군지 주희 양이 알 길은 없소. 하지만 그 능력도 주희 양이 수호해야 할 존재와 연결되기 위한 예비일 뿐이오. 즉. 절대 선을 만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맞을 것이오.”
“영혼이 연결돼요? 내가 수호자? 절대 선?”
너무 놀라운 김준석의 괴변은 그녀의 동공을 더 할 수 없는 크기로 확장 시켰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유하고 영혼을 구한다는 거죠? 전 한낱 성매매했던 여자라고요. 부모 형제도 없고, 얼마 전까진 마약 중독자였는데, 또, 절대 선이요? 그런 건 영화에서나 있는 캐릭터잖아요.”
“놀랍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운명, 바로 그겁니다. 나란 존재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죠. 민수나 춘호도 짐작만 했던 나의 실체를.”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틀렸음을 반드시 증명 하겠소. 비록 인간은 나약할지언정, 끝내 절망에 굴하지 않은 희망으로. 선 악이 혼탁할 때가 있다 해도 결국 선으로 정화되는 것을.”
어느덧 감천 마을의 창문들이 완연히 까맣게 도배 된 깊은 밤이 되었다. 누런 가로등을 쓴 어린 왕자의 그림자 속 그들은, 어림만으로 가늠되는 심야임에도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도 민수는 유독 긴장하고 있었다. 그를 따른 지 십수 년 만에야 완전한 실체를 직접 듣는 옅은 흥분 때문이었다.
“아주 까마득한 오래전 인간들은 우리를 ‘벅수’라고 불렀소.”
드디어 김준석의 목소리가 낮지만, 어둠 속을 공명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승과 뜻이 가장 유사할 거요. 지금의 장승은 대부분 나무를 깎아 세운 것이지만, 고대에는 재질과 형태를 가리지 않았소. 또한 우리라 함은 내가 유일하지 않단 뜻이기도 하오. 지금의 샤먼과 흡사한 존재의 선택으로 인간 세계에 현신한 벅수들은 대략 1,000년에서 1,500년 주기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지만, 때론 그보다 길거나 짧게. 하지만 벅수는 인간들이 추앙하는 종교의 절대자나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고 수백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간들의 지극한 염원이 쌓인 결정체의 현신으로서, 선과 희망을 수호하는 영성이라 보는 것이 적합할 것 같소.”
침조차 넘기지 않고 듣고 있던 그들의 표정은 침묵의 경악, 아마도 뭉크의 절규가 지금 그들의 내면의 모습이었을지도 몰랐다. 예상과 실제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헛웃음도 아까운 황당한 그의 말이 진실로 믿긴다는 것이 놀라웠다.
실로 전설 같은 김준석의 이야기는 옷깃을 펄럭인 바람이 지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주희 양, 나는 인간의 나이로 치면 구백 살이 넘은, 확실친 않지만 아마 그럴 거요. 벅수에게 나이란 아무 의미 없는 그저 세월이니까. 우리의 사명은 생성되고 소멸하기 전까지 그 시대의 선과 희망을 존속시키는 것이오. 그런데 어느 시대부터 절대 선이란 인간이 탄생하기 시작했소. 비록 주기는 불규칙했지만, 벅수에겐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바로 사랑이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의 생명을 포용하는 성스러운 감정인 사랑을 갖추질 못했소. 선과 희망의 본질은 사랑이란 건 알 것이오. 당신이 예비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절대 선이 출현해야 할 만큼 급격하게 악의 기운이 확산하였음을 뜻하기도 하오. 이젠 내가 오주희 양을 급히 찾은 이유를 말하겠소.”
김준석은 도 민수와 장춘호를 대하는 것과 달리 끝까지 그녀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은연중 그런 김준석이 의아하긴 했지만, 잠깐의 의문만 가졌을 뿐이다.
그들의 머리 위 좁은 도로에 걸걸대는 트럭이 한쪽 눈만 밝히고 지나갔다.
그새 새벽에 닿은 시간임이 직감됐다. 풀썩풀썩 던져 넣은 쓰레기봉투의 푸석이는 소리가 청소차였기 때문이다.
“벅수는 인간으로 현신하는 대신 예지 능력을 잃었소. 감지력 또한 직접 봐야만 하오. 그것이 영상이든 사진이든 실물이든 말이오. 그러지 않고는 가까운 거리에서만 통할 정도요. 내가 주희 양을 감지한 것도 한 남자의 여동생 사진을 통해서였소. 하지만 가디언은 다르오. 비록 절대 선엔 못 미치긴 하나, 상상을 초월한 예지력과 감지력을 갖고 태어난 존재요.”
“만약 선생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왜 지금까지 느낌이 전혀 없던 거죠? 그리고 이젠 그 예지력이 필요하시단 말씀으로 들리는데, 갑자기. 왜?”
오주희는 김준석 스스로가 해소한 의문에 포개어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직접적인 답을 원했다. 가디언이란 단어도 생경한 그녀에게 운명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벅수의 도움이 필요하오. 능력을 발현시키려면 주희 양의 뉴런과 시냅스, 아미그달라등을 자극해 새로운 영역을 활성화하는 의식과 신체 감각 세포의 극한 분열을 유도해야 하는데, 벅수만이 가능하오. 그리고. 예지력은 캐이런. 캐이런 때문이오.”
“캐이런?”
“그렇소, 벅수는 염원으로 생성된다고 했소. 염원을 선과 악으로 분리해 우리라 표현한 것이오. 캐이런은 악의 염원이 발현한 별종의 벅수요. 고대 인간은 선한 자와 조금 덜한 자였을 뿐, 악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은 시대일 만큼 단순했소. 무엇이든 골고루 나누는, 음식이나 남녀도 마찬가지였소. 누구의 남편도 아내도 아닌 공동체 형태. 그러던 중, 힘에 의한 군림이 권력과 지배로 변질되어 탐욕에 중독되기 시작했소. 건강치 못한 중독. 악은 선에 비해 자극적이면서 즉각적이오. 강한 유혹의 빠른 확산이 거듭된 결과는 선의 벅수들이 몇 번의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악의 벅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소, 캐이런이 바로 그요.”
캐이런을 말한 그 순간, 그들은 김준석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해 가로등 빛을 흡수하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어, 하얀 동공에 갇힌 불빛이 마치 수조에 떨어진 물감처럼 흐물거리며 테두리를 핥듯이 유영하는 것도 보았다. 엄숙하긴 했지만, 정감 있었고. 사람이 아니라 했어도 두렵지 않았던 김준석이 문득 낯설고 두려워진 순간이었다.
그 감정은 경외나 시외가 복잡한 이질적인 경계심이었다.
“선, 선. 생님.”
“흠.”
“조금 전 눈빛이.”
“놀라지 마라. 순간, 캐이런을 강하게 의식해서 그런 것이니.”
“악의 벅수가 캐이런이라면 선의 벅수인 선생님의 이름도 따로 있지 않나요? 김준석 말고 원래의 이름?”
의외였다. 그의 괴기스러운 동공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도 민수나 장춘호완 달리 평정심을 잃지 않은 오주희가 태초부터 있었음 직한 이름을 물었다.
“이..름? 훗! 있소. 오랜 세월 지구의 곳곳에서 사용했던 수없이 많은 이름 말고 진짜 이름. 한이오.”
“한? 한이라면 인간의 염원인 한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 발음은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이오. 벅수의 생성 지역은 이미 언급한 샤먼과 같은 존재인 우두 군장에 의해 미리 정해집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미륵불처럼 때가 되면 세상에 현신하는 것과 비슷하오. 나는 동쪽의 염원을 담은 벅수였소. 따라서 지역의 인간들과 결속력 있는 이름인 한(hann)으로 불리게 된 거요. 환단고기의 몽고리한, 그대들의 신화에서 볼 수가 있을 거요. 이 땅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오.”
“아!”
짧은 탄성의 그녀는 생각했다. 무려 구백 년을 넘게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그 시대를 살던 그가 지금은 김준석이 되었으며, 애초의 그는 환단고기에 실재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실제의 역사이든 신화이든 중요치 않았다. 오주희의 감정은 그와 우리는 고대의 DNA로 엮인 운명체란 느낌에 격화된 감동이었다.
오랜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곳은, 비좁은 골목의 미로 속, 가파른 계단 아래 아홉 평 마당을 품은 집이었다. 낮은 담에 걸려 수십 년은 됨직한 낡은 철문과 작은 연못이 달빛을 담은 디귿 자형 이층집, 산복도로가 턱없는 고지대인 곳이었다.
“선생님. 이곳은 언제?”
오주희가 머물던 청사포와 남해 천왕산 인근의 거처만 알고 있었던 그로서도 처음 와 본 곳이었다.
“궁금해도, 당장은 가디언을 깨우는 것이 우선이다. 곧 있을 일출의 순수 광대한 기운으로 이 마을에 응축된 희망의 염원을 정화 시킬 지금부터 두 시간이 중요하니까. 내가 이곳 감천 마을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이 아니면 5년,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5년을 기다려야 해.”
김준석은 영문 모를 목욕을 마치고 아까부터 그만 보고 있는 오주희를 찾았다.
그리고 명령하듯 단호한 어조가 따랐다.
“주희 양! 옷을 모두 벗고 저 중심의 원반에 올라서시오!”
“네? 오, 옷을 벗고 서라고요?”
“그렇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벗어야 하오.”
그가 가리킨 곳은 하나의 큰 원안에 두 개의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고, 삼각 꼭짓점을 형성한 세 개의 나무 기둥 중심 아래 투명한 크리스털 원반이 놓여있었다.
김준석은 정중했지만, 대꾸를 허용치 않은 추상같은 지시였다. 당황한 오주희는 그저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민수, 춘호는 불을 끄고 1층에 가 있거라. 의식 중에 절대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춘호도 곧바로 의식을 치를 것이니, 심신을 청결히 하고 준비하거라.”
김준석은 도 민수가 불을 끄고 나가는 사이, 아무것도 없는 휑한 실내의 창가를 등지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는 나지막이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시작했다. 덩그러니 혼자가 된 오주희는 차츰 수치심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낯선 공간보다 더 어색한 남자 앞에 나신이 돼야 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이 그녀의 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기포로 이는 것을 느꼈다. 경험상 비교되는 기분은 현기증과 유사했다. 투둑. 그녀의 점퍼 단추가 풀리고 여몄던 바지 끈이 느슨해지면서, 감쌌던 옷가지가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남았다. 그녀의 눈가는 어느새 눈물로 습해졌다.
“주희 양! 보이는 것을 떨치고 내면에 집중하시오.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엔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기운과 합체하는 정신을 유지해야만 하오. 그럼, 눈을 감고.”
깊은 새벽. 감천 마을 가장 아래쪽 평범한 어느 집에서 행해진 의식은, 향후 인류의 존립을 좌우할 극적인 현장이었음에도 초라하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준석은 천제를 올리는 제사장의 엄숙함으로, 시작 전과 다른 또렷한 주문을 읊으며 의식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오주희도 놀라웠다. 어느 순간 처짐 없이 중력이 무시된 허공에서 양팔이 편안했고, 근력을 이완시켜 맥없을 허리와 다리가 마치 투명한 버팀목을 지탱한 것인 양, 꼿꼿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벅수와 가디언의 무아지경은 불과 2미터 남짓 거리를 두고 무려 1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 창가의 달빛이 기울어 청아하게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양 엄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짚고 검지와 중지를 이마에 놓은 김준석의 가부좌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주희를 뚫어지게 주시한 채 더욱더 강하게 주문을 읊었다. 순간, 오주희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백옥의 발가락이 바닥과 분리돼 부드러운 입김에 너울대는 깃털로 두둥실 떠 올랐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둠과 달빛의 음영이 드리운 굴곡진 나신이 허공에서 윤기 있는 선이 되어 유영하는 장면은 지독한 아름다움이었다.
“우랄칸트비즈마르하! 크랏나흐르이낫사 므치우랄칸트 르사비즈마르하!...르리닛카….”
그녀의 공간 유영이 촉발한 벅수의 주문은 더욱 격렬하게 실내를 공진했다.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를 치켜뜬 상기된 얼굴에서 포도주 땀이 턱 끝에 고여 떨어지는 중에도 김준석의 오묘한 주문은 장중하게 계속됐다.
“우랄칸트비즈마르하! 우랄칸트비즈마르하! 우랄칸트비즈마르하!”
“즈으으!”
그 순간, 세 개의 삼각형 꼭짓점을 맴돌았던 크리스털 원반에 강한 진동이 일었다. 동시에 순백의 강렬한 빛이 부유하는 가디언에 쏘아졌다. 빛줄기는 너무도 휘황찬란해서 두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광채에 갇혔다. 그리고 찰나에 투명해진 신체는 장기마저 훤히 보여, 마치 안데스의 유리 개구리를 연상케 했다.
크리스털 원반이 쏘아 올린 순백의 기운은 가디언을 완성 시키는 마지막 절차로서, 인간 오주희가 탈바꿈해 절대 선의 시대를 예비하는 자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그녀의 재탄생은 벅수인 김준석에 새로운 사명을 제시하는 영자의 출현이기도 했다. 이렇게 벅수와 가디언은 감천 마을 가장 낮은 곳에서 여명이 트기 직전, 운명적 만남을 이뤄냈다.
실내의 공기는 가지런히 본래의 공간을 채운 뒤, 조용히 누워있는 그녀의 폐로 걸러졌고, 처연하리만치 투명했던 그녀의 신체는 서서히 본연의 혈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김준석은 가부좌인 채로, 누워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그녀는 가디언에 수반 된 수백 년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과연 축복인지 형벌일는지는 앞으로의 역사가 알려 줄 것이다. 김준석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