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재생 인간과 의문의 사건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건 파일에서는 예고한 대로 최근 1년간 벌어진 반인륜적 사건들을 심층 분석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스튜디오에는 사회 심리와 정신분석 전문가이신 황 철용 박사와 범죄분석가 김두수 원장, 직접 사건 현장을 취재한 사회부 나 종규 기자가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 다룰 세 가지 범죄 유형은 그야말로 현 사회를 극심한 좌절감에 빠뜨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장기 밀매 조직에 팔아넘긴 사건, 바뀐 신호에도 횡단보도를 빨리 건너지 않는다며 차에서 흉기를 꺼내 노부부를 살해한 사건. 중학교 1학년 다섯 명의 친구가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 친구를 1년이 넘게 괴롭혀, 결국 두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하나같이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끔찍하고 참담한 사건들입니다. 특히 노부부 살해 사건은 동기가 극히 사소하다는 점에서 경악스럽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의 진단은 팬데믹의 자발적 고립이 키운 우울증세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잠재적 피의자들이 주변과 곳곳에 평범한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건데, 우선은 마약 문제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원장님!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가 팔아넘긴 아이는 중국으로 간 것까지 확인됐지만, 그다음은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고요?”
“네, 과연 인간의 탈을 쓴 그들을 다시 언급해야 하는지?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도 이 자리의 참석을 고민했습니다. 경찰이 총력을 기울여 아이의 행방을 쫓고 있으나, 중국과 필리핀 등에서 은밀한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특성상….”
“틱!”
소파에 앉은 남자의 손가락이 리모컨을 누르자, 불편한 표정의 패널이 검은 화면 속으로 꺼졌다. 어그러진 창틀엔 뿌옇게 쌓인 먼지가 이끼로 굳어 금 간 유리를 겨우 지탱하였고, 물 때가 누렇다 못해 산화로 부식된 바닥은 지저분하게 말라 있었다.
“인간들에게 때와 장소 없이 불안과 공포를 주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보다, 더!”
어두운 실내의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의 음산한 음성이 웅웅거렸다. 한 발만 딛고 문가에 선 남자들을 쏘아본 눈동자는 놀랍게도 파충류의 세로 동공으로, 그것도 각기 다른 푸른색과 붉은색인 두 개의 눈동자였다.
“말씀을 전하겠다!”
괴이한 동공을 번뜩인 자의 낮고 쉰 목소리가 짧게 울리자, 문 가의 남자들이 재빠르게 움푹한 타일 바닥에 엎드려 그를 올려봤다. 눈동자. 세 남자 모두 인간의 것이 아닌, 세로 형태인 동시에 거친 피부의 창백한 낯빛이었다.
“나와 너희는 악몽이 되어 인간들의 꿈속까지 공포를 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절망으로 눈 뜨게 할 것이야! 그 시작은 의심과 두려움이다. 너희 둘은 여수와 구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세상과 인간 사이를 불신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리고 너!”
남자가 몇 걸음을 나와 타일 턱의 커다란 수도꼭지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짙은 어둠 결에서 어긋난 모습이 차갑게 드러났다. 다른 남자들관 달리 두텁게 죽어있는 피부는 흡사 고목이었고, 유독 움푹한 안면은 양쪽 눈두덩이의 대칭이 깨져 함몰돼 있었다. 장. 인. 옥. 그였다. 인천 체육관에서 함 사익과 일행이 떠난 뒤, 검은 기체의 끈적함이 사체 주위를 맴도는 기이한 현상이 일었었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사투리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과 낮고 굵직했던 목소리가 시종일관 가래 끓는 역겨운 소리로 변해있다는 점도 달라졌다.
“너는 나와 움직인다. 잡아 올 인간들이 있으니, 승합차를 준비해라.”
장인옥의 지시가 끝나자, 남자들은 마치 허공을 지르밟는 고양이의 날랜 동작으로 신속히 벗어 나 1층의 찌그러진 셔터 밑에서 잠깐의 눈짓을 교환하고 골목길을 달리해 빠져나갔다. 휘익,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돌개바람이 일어 낡은 목제 간판을 덜거덕거렸다. 음각된 ‘목욕탕’이란 글자에 페인트가 희미했다. 이곳은 청계천 뒷골목으로서, 도시재개발 계획 확정으로 대부분의 업장이 이전해, 밤에도 가로등이 죽은 공가들만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외지고 행인도 끊긴 골목. 인천 출신인 그가 부활해 서울 중심의 청계천에 숨어든 까닭이 무엇일까?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더럽고 인기척도 끊긴 음산한 골목에. 다만 무언지 모를 의심되는 향후의 시작점인 것은 분명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곧 지옥을 선물해 주마. 카카카! 으 카카카!”
봄 햇살로 제법 나른해진 서해안 고속도로를 검은색 마이바흐가 매끈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냥 호텔로 부르시지, 굳이 군산까지 직접 갈 필요까진.”
크림색 시트 뒷자리의 공 만호가 태블릿을 보면서 시큰둥 하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함 사익이 질겅질겅 씹던 껌을 풍선으로 터트리고 웃었다.
“이것 봐요. 공 만호 이사님? 자고로 군주는 장수를 맞이하는데 아내를 얻는 것보다 정성을 쏟으라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누가요? 공자님이?”
“공자는 무슨? 내 마음이 그럽니다. 그렇게 해야 한답니다.”
“끄응!”
“우 부장 식구들이 누굽니까? 옛날로 따지자면 도독 밑의 장수들이 아닙니까? 더욱이 이제 곧 천하에 출사표를 던질 내가 소홀이 맞이한다면, 어디 뜻을 제대로 펼칠 수나 있겠습니까? 공 만호 이사님! 내가 이사님한테 제갈량을 바란답니까? 그냥 술에 취한 방통 흉내라도 어찌 안 되겠습니까?”
그는 체념과 조롱을 섞은 한숨으로 입속의 껌을 창문에 짓이겼다. 뽀드득! 뽀드득! 껌은 수제비만큼 면적을 넓히고 나서야, 그의 일그러진 미간과 엄지손가락을 본래로 돌려놓았다.
“그나저나, 우 부장! 군산엔 맛집들이 많다던데. 아는 데 있어요? 기왕 가는 김에.”
이내 콧노래를 부르던 모습으로 돌아간 그가 조수석의 우 상길에게 음식에 관해 물었다. 시선은 창문에 붙은 껌딱지를 향한 채였다.
“맛있다고 하는 집들은 꽤 있긴 한데. 워낙 서민적이어서 우리는 모를까, 입맛에 맞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싱거운 미소로 전방을 주시하는 우 상길에게 차민주가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그러지 말라는 눈치였다.
“우선 갑시다! 설마 서민들이라고 똥을 맛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이 먹는 건데, 먹을 만하니까 찾겠지요. 가서 영 아니면 호텔로 가면 되니까. 안내해요. 우 부장이 군산에 오면 꼭 들르는 집으로.”
함 사익은 할 말을 다 한 듯, 엉덩이를 시트에서 떼었다 붙인 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설정한 각도에 따른 등받이가 부드럽게 뉘어지면서 다리 받침대가 펼쳐졌다.
“공 이사님. 강릉 일정 다시 확인하세요. 변명은 일전의 한 번이 끝입니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함 사익이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네, 내일 오후 군산 출발에 맞춰 차질 없게 지시해 놨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 하셔도 가 아니라, 없습니다! 하세요. 매사 그렇게 미온적인 태도는 언젠간 크게 후회할 일을 만든다고 안 그랬습니까? 내가 아는 어떤 작가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기대하는 건 내 목숨을 남에게 맡기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 좋아 기대지, 달리 말하면 운이라고 하더군요. 난 그 말에 아주 격하게 공감합니다. 아시겠어요?”
그는 귀찮다는 듯, 잔망스럽게 다리를 털고는 수면 자세로 입을 닫았다. 세단은 행담도 휴게소를 그대로 지나 고속으로 내달렸다. 부드러운 엔진음과 진동이 거의 없는 차체는 달리는 침대였다. 우 상길은 룸 밀러를 통해 공 만호의 얼굴을 훔쳐봤다.
감정적인 질책을 당한 이치고는 의외로 평온했다. 상길은 그의 내공에 감탄했다. 비록 겁많은 조심성이 소심해 보이는 면은 있지만, 좀처럼 심경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표정 관리 능력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우 상길은 차민주에게 생수 뚜껑을 따 주고, 자기도 한 모금 가득 머금었다가 넘겼다. 그리고 능숙하게 문자를 찍었다. 두 군데로 발송한 문자는 숙소로 예약한 일본식 가옥 여미랑과 단골로 방문하는 생선 뚝배기집. 일명 생 뚝 집이었다. 여미랑은 작은 다다미방이 대부분인 게스트하우스였지만, 독채 펜션 또한 같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청소 상태와 물품 배치를 재차 확인하는 문자였다. 생 뚝 집은, 당연히 질 좋은 재료를 부탁하는 문자였다. 그것으로 우 상길은 더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로 했다. 숙소나 음식점은 본인이 원했으니, 불만은 감수할 것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참에 주종의 관계로 정립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 감정을 접기로 했다. 어쨌든 그를 경호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심중에 걸린 의심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단은 그가 바란 군산 팀의 합류였다.
어느새 군산 요금소 하이패스를 통과한 세단이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이대로라면 팀원들과의 약속 시간보다 다소 이른 도착이 예상됐다. 점심을 겸한 친견 장소인 영화동 생선 뚝배기집은 15분이면 도달할 거리. 우 상길은 차민주를 힐끗 쳐다보고 삐긋이 웃었다. -생 뚝- 입구에서 함 사익의 난감한 표정이 상상되었다. 50년 동안 검증받은 주인의 자부심보다 분명 선입견에 먼저 구겨진 인상이 뻔히 보였다. 과연 격조 있는 음식점에서 유명 쉐프들의 요리에 젖은 미각이 생 뚝 집의 탕이나 찜 종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 상길은 은근히 그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차 팀장. 아직 시간이 이르니, 우선 여미랑으로 가자.”
우 상길은 뒷좌석 공 만호에게 손목시계를 가리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트 속 깊숙한 함 사익은 잠을 자는 모습이었지만, 우 상길은 눈꺼풀 속에서 움직이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서울 종로 5가.
대형 약국이 즐비한 뒷골목의 후미진 식당 겸 선술집에서 두 남자가 소주잔을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초췌한 몰골로 연거푸 3잔을 비운 남자는 상대의 반쯤 남은 소주잔이 테이블 모서리에 놓인 것을 보며 제 잔을 채웠다.
“이그. 천천히 마셔라! 그러면 속 버린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누? 우선 이걸로 먹고 있어. 금방 안주 내 올 테니.”
칠순은 됨직한 할머니가 내민 접시엔 노른자가 탱탱한 계란프라이 네 개가 있었다.
“선배! 뉴스 봐서 알겠지만, 요즘은 전국이 화약고와 다름없어요. 게다가 묻지마가 뻑하면 터지고, 세상이 어떻게 미치려고 그러는지.”
그는 대충 쥔 젓가락을 모아 후루룩하고 프라이 하나를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아니? 그게. 내가 회사 밥 먹은 지 10년인데, 도대체가 어디까지 사건인지, 그냥 사곤지를 모르겠다니까? 와이프 출산이 오늘, 내일 하는데 도무지 얼굴을 디밀 짬이 없어요. 여수 산단 폭발 사고, 구미 가스 분출 사고. 거기다 낚싯배 침몰까지. 그것도 3건이 이틀 간격으로 대형 사고가 터진 겁니다. 공식적인 사상자가 27명이 죽고 70명 가까이 중 경상이니까 말 그대로 그 지역이 아주 초토화가 된 거나 다름없죠.”
그는 소주잔을 한 차례 더 꺾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아이고야! 니, 혼자서 나쁜 놈 다 잡나? 마누라 병원은 데려간 적은 있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생각해 봐라, 첫 얼라 밴 엄마가 을메나 무섭 것노? 그런데 신랑 니는 잘 드가도 않고, 오죽하겠나? 쯧쯧! 거저 신랑 되고, 부모 되는 줄 알지. 쯧쯧!”
그의 사건은 곱창전골 냄비에 불을 붙이는 할머니의 핀잔이 잠시 끊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게 미심쩍은 거야? 사곤지 사건인지 모르겠다며?”
할머니의 핀잔에 살짝 풀이 죽은 그에게, 도 민수가 반 남은 소주를 넘기고 물었다.
“아? 그게…. 여수 폭발 때나 구미 가스 분출 사고 때, 생존자들 말로는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데 신원 파악이 안 돼요. 사고 당시 낯선 사람이 있었다고 하거든요? 복장도 그렇고 외견상 작업자인 건 분명한데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럼, 죽었든지. 아니면 다쳐서 병원에 있어야 아귀가 맞는데? 없어요. 낚싯배도 비슷합니다. 선장이 해경에 보고한 인원과 실제 승선 인원이 차이가 있어요. 구조된 사람들 말로도 한 명이 더 있었대요. 어디 갔을까요? 역시. 뿅! 하고 사라졌단 말입니다.”
“뉴스 속보입니다. 조금 전 1시 20분경, 경기도 광주의 간선 도로에서 5명이 사망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앞서가던 승용차 운전석에서 다량의 금속 물체를 도로에 뿌려, 뒤따르던 차량의 타이어 파손으로 연쇄 추돌이 발생해 일가족 3명이 탄 차가 전복되어 전원이 사망하고,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은 5대의 차량 탑승자 중 2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목격자의 진술과 인근을 지나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토대로 문제의 차를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이후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씨팔!”
주먹을 내리친 그가 욕설을 씹는 도끼눈으로 한마디 덧붙었다.
“분명히 뭐가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루가 멀다고 이 난리냐고? 아무리 세상이 험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깡패 새끼들도 분위기를 봐 가면서 사고를 치는데, 이건 뭐? 나라가 온통 지뢰밭이니.”
“부동길! 잘 들어라,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쩜 서막에 불과할지 몰라. 요즘 유독 긴장하고 계신 선생님을 보면 두려울 정도야. 지금껏 이런 적이 없으셨거든. 전국 각지의 사고도 그렇지만, 변이 바이러스의 3차 팬데믹에 이어, 유럽의 전쟁 발발에 극도로 예민하신 상태야.”
“엥? 그게 무슨 말? 팬데믹하고 유럽 전쟁이라고 하면?”
“그래. 지금 전쟁 말야.”
“그게 왜? 지금 일어나는 일 하고 무슨?”
도 민수는 이참에 캐이런을 알리려다 참기로 했다. 그는 김준석을 소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특별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는 혜화 경찰서 강력계에 근무하는 경사로서, 도 민수가 말하는 선생님. 즉 김준석을 실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선생님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도 민수의 엄청난 능력을 몇 번이나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도 민수를 만나 아내와 함께 식사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수배자를 검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 민수가 도주하던 범인을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목덜미를 낚아채고 기다렸었다. 그 당시 그는, 그 높은 곳을 계단 하나를 뛴 것처럼 손쉽게 행동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등산 중에 일어났고, 그것이 특별함으로 각인되었다. 함께 등산 도중 실종된 남편 때문에 정신 줄을 놓은 아내와 몇 마디를 나눈 그가 배낭을 내던지고 가파른 산길을 뛰어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발 끈을 다시 매고 따라온다던 남편이 한참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찾아보았지만, 종족이 묘연했다. 그런데 도 민수는 엉뚱한 곳으로 실족해 벼랑 아래 바위틈에 낀 남편을 구한 것이다. 그때 부동길은 일종의 경외심을 느꼈다. 어찌어찌 3층은 신체 단련으로 그럴 수 있다 쳐도, 실족한 남편을 찾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것도 아내의 눈을 통해 남편의 위치를 알았다는 황당무계한 답변에 소름이 돋기까지 했었다. 그 밖의 소소한 것들도 많았다. 장모님이 집에 왔다는 것과 계장이 급히 찾을 테니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 역시 1분도 지나지 않고 걸려 온 계장에게 어이없이 웃었다가 한 소리 듣기도 했었다. 도 민수는 선생님이 주신 능력 중 미미한 것이라고 했었다. 촛불과 태양, 자기와 선생님의 차이라고 하면서.
“일일이 설명할 순 없지만, 역사는 때론 시기를 역순으로 재현한다고 하셨다. 1300년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흑사병. 그리고 1200년대 말까지 치열했던 십자군 전쟁은 인류의 참혹한 역사로 남지 않고, 자칫 멸망까지 초래할 뻔한 이전에 없었던 재앙이었다고 하셨지. 당시에 누군가가 그 틈을 타, 인간성 말살을 시도해 세상의 선과 희망을 절멸시킬 마지막 단계까지 갔었다고 하시더군. 그 시대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까진 몰랐었고. 선생님께선 그때의 누군가였던 그가 얼마 전에 다시 출현했음을 확인하셨다.”
도 민수는 어느새 비장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흡사 칼집을 내던진 장군이 마지막 결전을 치를 칼날을 응시하는 것과 비슷했다. 섣불리 그의 감정을 깨지 못한 부동길은 조심스레 마지막 술잔을 채우면서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휴. 수수께끼도 아니고. 그는 또 누구길래.”
“미안하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구나. 그나저나, 이상하다는 게 정체불명의 사람들이란 거지?”
도 민수는 맥없는 한숨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에게 닿지 않은 이야기를 후회했다. 어차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이었고, 설사 동조한다고 해도 그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렇지? 그게, 그러니까.”
“부 형사야! 집에 안 가나? 한참 만에 가는데 뻘겋게 술 냄새 풍기고 가면 마누라가 좋다고 하겠다. 인자, 그만 먹고 언능 인나라. 이것도 가져가고.”
“네, 술은 이제 그만하고, 잠깐만 얘기하고 갈게요. 근데, 그게 뭐예요?”
거듭된 할머니의 핀잔에 머리를 긁적인 부동길이 해죽거리며 계산대의 잘 포장된 뭉치를 쳐다봤다.
“동글이 엄마 주려고 어제 마장동에 좀 다녀왔다. 소꼬리, 암소 꼬리야. 애 낳기 전에 푹 고아 영양 보충하라고, 너도 좀 먹고. 거울로 니 꼴을 좀 봐라. 이제 애 아빠 될 놈이 쭈그리 오십은 안 돼 보이나? 그렇게 겉늙으면 속도 병 생긴 거, 내 나이 되면 다 보인다. 젊었을 때 늙은이 말뜻을 알아채면 복 받는다. 내 말 명심해라.”
“네! 고맙습니다. 잘 고아서 먹일게요. 그리고 우리 동글이 할머니가 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금방 갈게요.”
부동길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동글이가 태명이거든요. 그리고 와이프나 저나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요? 첫 데이트부터 결혼하면 엄마가 돼주신다면서, 정말 저희가 운이 좋아요. 하하! 참. 그건 그렇고 선배한테 말할 게 뭐냐면.”
그가 가방에서 꺼낸 흰 봉투는 겉면이 서울혜화경찰서가 인쇄된 서류용 봉투였다.
“선배, 그게? 전에 나한테 몇 가지 조사해 보라는 케이스 중에서 영 이상한 게 나왔단 말이죠.”
부동길이 그 앞으로 얇은 파일을 펼치며 바짝 얼굴을 디밀었다.
“영아나 임신부 사건만 따로 챙겨보라고 해서, 이게 그겁니다. 요즘 대형 사건, 사고에 묻혀 각 관할에서 별건 처리된 건데, 선배 말이 있어서 들여다보니까 좀 특이하면서도 수상하더라고요?”
동길의 낮춘 음성에 귀를 쫑긋한 도 민수는 정갈하게 작성된 사건 기록과 첨부된 여러 장의 사진을 훑었다.
-정신 분열, 실종, 실종, 실종.- 서류 하단에 찍힌 검은 도장은 복사본을 의미한 것으로써, 서류 속 인물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은 그 중의 남편이었다.
“거기. 남편이 정신 분열, 아내가 실종된 곳이 여숩니다. 사건 날짜 옆에 써 놓은 걸 보세요. 여수 산업단지 폭발 사고가 2월 11일. 실종이 2월 12일. 다음 날이죠? 다음 장. 구미 가스 분출 사고가 2월 17일. 임신부 실종 날이 2월 18일. 공교롭게도 대형 사고가 있는 다음 날에 두 임신부가 실종됩니다. 그리고 2월 마지막 날, 그러니까 28일에 종로 경찰서에 다급한 임신부 납치 신고가 접수됐어요. 그런데 급파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긴 전, 신고자인 임신부 엄마가 사망했습니다. 부검 결과 사인이 기막힙니다. 장기가 녹았다니, 당최 믿기지 않아서.”
“청와대와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에 있는 작은 김밥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과 2킬로 정도 떨어진.”
백사실 계곡의 여름은 서울의 어느 곳보다 울창한 녹음으로 짙게 와 있었다. 그러나 도심을 녹이며 한껏 불쾌지수를 게우는 더위도, 우거진 수풀과 나뭇잎. 쉴 새 없이 졸졸거리는 청량한 계곡물엔 기세가 꺾여, 수면 위 잔 햇살 신세로 전락했다. 김준석은 집이 아닌, 계곡의 오솔길을 도 민수와 걷고 있었다. 그는 도 민수가 보여준 여러 파일 중, 부암동 파일에 흠칫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몇 년 전 아침, 그 집이었다. 사진 속 사망자는 분명 그때의 할머니였다.
“제가 부동길에 전화를 받고 곧바로 현장에 가 봤지만, 다른 흔적은 없었고. 아직 새것인 유아용품과 산모 수첩이 있었는데, 이겁니다. 출산 예정일이 9월 9일입니다.”
그렇다면 실종된 임신부는 그 당시 아프다던 딸이란 말이었다. 잠시, 잠깐. 문틈으로 보였던 휘황한 광채의 소유자. 그가 주시한 것은 할머니의 열상이었다. 둥근 원 밖까지 가로세로 십자가 형태로 흉측한 자국이 앞가슴과 등까지 나 있는 것이, 포천과 같은 표식이 부암동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부암동 할머니의 표식과 포천의 것은 상징하는 바가 전혀 달랐다. 바로 자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한 것이었고. 그 누군가는 캐이런의 하수인을 뜻했다. 김준석이 포천 사건 이후 급히 오주희를 찾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캐이런의 출현은 어디의 누군가에서 절대 선이 잉태됐음의 동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수야! 이 여자의 태아가 절대 선이다!”
“네?”
“틀림없어! 예전에 그녀의 놀라운 광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임신부가 아니었기에 강력한 선의 존재로 알았지만, 죽은 엄마에게 남겨진 표식으로 보면 분명하다.
캐이런 부하의 소행이야. 그자는 내가 너에게 주었듯,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얻은 자 일 게다. 여기, 이 표식이 그자를 말해주고 있으니까.”
김준석은 그날 아침, 할머니의 짙푸른 신광을 떠올렸다. 그러자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을 안타까워했던 감정이 되살아난 듯, 연민 어린 눈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임신부들은 왜?”
“혼선을 노린 것이겠지.”
“혼선이요? 동종의 사건이 연이으면 되레 관심을 집중시킬 텐데?”
“아니. 경찰이 아니라, 우리의 혼선. 캐이런도 내가 자기의 출현을 눈치챘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서로 감응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허점이 노출되리란 걸 방심한 거야. 그의 부하는 아직 제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표식이란 흔적을 남긴 거고. 부 동길에게 납치 당일 전후로 부근의 CCTV를 넘겨 달라고 해. 그자를 추적해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혹시 그사이에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죠?”
도 민수가 극도의 불안한 표정으로 꺼낸 일이란, 태아의 죽음을 에두른 것이었다.
“그럴 순 없다. 절대 선은 태어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면, 즉시 다른 태아의 영혼을 갖고 잉태되는 걸 아는 이상, 출산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 캐이런이 절대 선을 소멸시킬 기회는 출생 후 24시간까지만 가능해. 그 전엔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24시간…?”
김준석은 오솔길 옆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 위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쥐었다. 그리고 잎새 틈의 흔들리는 햇살을 향해 뻗고 지그시 감은 눈으로 읊조렸다.
“그 하루는 절대 선이 태어나 세상의 모든 선의 영혼과 감응하여 절대의 존재로 재탄생하는 거룩한 시간이야.”
그 순간. 그가 뻗은 나뭇가지에서 순백의 광채가 해일처럼 솟구쳐 그들 주위에 투명한 막을 형성했다.
“헉!”
반구체의 거대한 외부와 분리된 공간에 놀란 도 민수가 비틀하며 헛숨을 토했다.
“이 공간은 다른 차원이다. 인간은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하는 허공인 셈이지. 하지만 안에 있는 우리는 그들을 보고 들을 수 있어. 현재의 절대 선도 마찬가지야. 태아인 그가 숨 쉬는 양수가 이곳과 같다. 가디언의 영혼과 감응은 하지만 전달하진 못해. 즉, 아직은 인간의 태아에 불과하다는 말. 따라서 오주희가 그의 위치를 알기엔 양수를 터뜨리고 태어나기 전까진 방법이 없다. 그건 나도 캐이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호막을 치게 되면 서로가 감지 불능이 되는거야.”
비장한 얼굴인 그가 쥐었던 나뭇가지를 던지자, 다시 들리는 새소리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가 찰나의 굉음으로 귀청을 찢은 뒤, 이내 본래의 옅은 어울림으로 차분해졌다.
“지금 가디언의 능력으로선 그들을 찾긴 어렵다. 절대 선과 직접 감응하기 전까지는 감지력과 예지력이 완전치 못해. 다만, CCTV 촬영본으로 캐이런의 하수인과 접촉할 수 있다면 감지력을 더욱 향상할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최대한 빨리!”
9월 9일이 출산 예정일이라면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기껏해야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짧은 기간에 어이없게도 70억 인류의 미래가 걸린 것이다. 임신부들 납치에 성공한 캐이런은 섣불리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어둡고 음습한 구석에 똬리를 튼 구렁이처럼 때를 기다리겠지만, 그의 하수인은 달랐다. 그는 케이런의 포자로 탄생 된 개체가 아닌, 본질이 인간이기에 감지 및 추적이 가능한 자였다. 운이 좋다면 그가 아닌, 그들일 수도 있다. 이제부턴 거의 모든 것이 오주희에게 달렸다. 도 민수와 장춘호. 부동길 및 여타 협조자들이 얼마나 많은 단서를 그녀에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인류의 존망이 걸려있다. 또한 벅수인 김준석의 운명 역시 처절한 변곡점을 준비해야 하는 결연함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녹색 잎사귀가 바람결에 나풀대는 샛길을 젊은 연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손을 꼭 잡고 웃는 그들에겐 이 더위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자박자박 흙 밟는 소리로 지나는 그들을 보며 김준석은 가만히 되뇌었다.
“비록 석양으로 밤이 된다 한들, 희망은 샛별로 영원한 빛이어야 한다.”
군산의 대낮은 한가했다. 특히 대로를 약간이라도 벗어난 길은 더욱 그랬다.
길 가 한쪽으로 세운 마이바흐의 유난히 세련된 검은 광택이 차체와 분리되자, 함 사익과 공 만호의 발이 땅을 디뎠다.
“주차장이 없나?”
양복 상의를 탄력 있게 잡아당겨 주름을 편 공 만호가 주위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리자, 허리를 펴 길게 기지개를 켠 함 사익이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넣었다.
“있으면 들어갔겠죠.”
“저기가 잡아놓은 숙솝니다.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우 상길은 트렁크에서 작은 여행용 가방을 챙겨 목조 건물 사잇길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짙은 갈색 나무 구조에 검은 기와를 얹힌 지붕이 이색적인 주택은, 겉보기보단 제법 널찍한 면적으로 작은 연못을 품고 있었다.
“엉? 뭐야, 저건?”
우 상길이 돌아오기 전, 주변을 살피든 함 사익이 묘한 웃음으로 한 곳을 바라봤다.
“뭐가?”
“너무 이질적이잖아요?”
“...?”
“대형 교회 앞에 점집 간판? 유일신이란 하느님 집 앞에 옥황상제를 모시는 점집이라. 왠지 두 양반의 기 싸움이 밤낮으로 피곤할 것 같지 않아요? 하하!”
그제야 그가 웃는 이유를 눈치챈 공 만호가 덩달아 삐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적색 벽돌 상단에 곧게 선 십자가 아래 알파, 오메가 기호와 대조되는 흰색 간판의 검은 필체가 초라한 점 집치곤 꽤 힘 있게 쓰여있었다. -옥 황 신 당-
“공 이사님! 하느님을 본 적 있어요?”
“네?”
“옥황상제는?”
“아...아..뇨?”
“그래요? 난 하느님은 못 봤지만, 옥황상제는 본 적 있는데.”
“그래요? 언제?”
“맞이 그림으로 본 적 있어요. 어렸을 때. 이모를 따라간 점집에서.”
“아? 그림?”
“그림? 그럼, 우리가 세종 대왕. 알렉산더. 이순신 장군을 그림에서나 보지, 실제로 보나? 그런데 난, 그림으로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단 말이죠.”
“그..건. 신 이시니까. 다른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들이고.”
대화의 유치함에 떨떠름해진 공 만호가 억지 미소를 피식거렸다.
“신. 신이라…. 그래서 아들들인 예수님과 단군의 초상화만? 옥황상제는 그럼 신이 아니란 거네?”
“스미마셍. 히로츠..카오쿠니 이쿠 미치와 도코데쓰카?”
팔짱을 끼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함 사익이 공 만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그때,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던 중년의 일본인 여성이 조심스럽게 관광 안내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머리를 꾸벅였다.
“아!”
순간 당황한 공 만호가 멋쩍게 웃자, 다른 일행인 여성이 그런 그에게 수줍은 눈웃음을 쳤다.
“히로츠카오쿠오 오사가시데스까?”
“하이, 하이. 쏘데스. 호호!”
그 순간 그녀들의 얼굴은 낯선 타국에서 친구를 만난 듯 환해졌다. 그만큼 함 사익의 유창한 일본어는 뜻밖이었다. 그녀들이나 공 만호에게도.
“히로스 가옥? 공 이사님 어딘지 알아요?”
그는 관광 안내도의 표기와 현재 위치를 비교하며 빙 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기 숙소가 여미랑이라고 했으니까. 여미랑에서….”
그는 관광 안내도의 여미랑을 손가락으로 찍고 예상되는 방향을 바라봤다. 낮은 집들과 일식 식당, 그리고 북 카페. 저쯤 어디선가 돌아서 가는 길 같았지만, 선뜻 그쪽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건가?”
몇 발짝 떨어져 주변을 살핀 공 만호가 이정표를 가리키며 함 사익을 쳐다봤다.
여러 갈래의 이정표에는 동국사, 말랭이 마을. 일본식 가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 거기네! 일본식 가옥. 그게 히로츠 가옥이네요.”
관광 안내도와 이정표를 비교해 본 함 사익이 환히 웃으며 그녀들의 시선을 자신의 손끝으로 모았다.
“맛스구잇떼 하타리니 와카리마시타까?”
“하이! 하이! 와카리마시타. 혼또니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연신 머리를 꾸벅여 감사를 표한 그녀들은 십여 미터를 가다가 돌아서, 또 한 번의 인사를 한 후에야 그들과 멀어졌다.
“실장님! 언제 일본어까지?”
“일본어요? 큭큭.”
사뭇 달라진 공 만호의 눈길이 어이없는지, 코웃음을 친 그가 빈정거렸다.
“재벌 아들로 사육되는 게 쉬운 줄 알았어요? 재익이를 봐요. 그 순둥이는 5개 국어에 박사 학위만 두 갠 거 알죠? 그게 사는 겁니까? 완전 그룹에 맞게 조립된 로봇이지. 몇 년 전부턴 양자 컴퓨터 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반쯤 죽어있는 멍청한 놈. 그러고 보면 평창동 늙은이는 자기가 신인 줄 알아요. 새끼 인생 조지는 건 뒷전이고 충실한 개로만 세뇌하니. 씨발! 진짜 하느님이나 옥황상제한테 기도발이 서면 헌금을 존나 해서 딱 하나만 빌 텐데. 평창동 이교도 신전을 개 박살 내 달라고.”
잘못 들은 것도 어쩌다 지껄인 것도 아니었다. 공 만호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은 적 있었다. 그에게는 첩실인 어머니를 모질고 야멸찬 핍박으로 철저히 무시했던 아버지의 횡포를 뼛속의 문신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결과, 본래 어머니의 온순한 성향을 닮았던 그에게 잔혹성과 공격성. 그리고 지독한 이기심까지 삶의 무기로 장착하게 한 근원으로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부턴가 평창동 집을 신전이라 비꽜고, 그것을 파괴하는 거추장스러운 요소를 차근차근 시간이 걸려도 무자비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알았어. 우 부장. 곧 모시고 가지.”
동공의 이글거리는 초점이 어디를 향 한지 모를 그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한 공 만호가 공연한 헛기침으로 머뭇거리자, 눈치를 챈 함 사익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숙소인 여미랑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식당에 도착한 그의 표정은 불편, 그 자체였다. 길가에 바로 접한 허접한 입구부터 못마땅한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너저분한 홍보 문구가 다닥다닥 붙은 식당 유리문이었다. 접착 인쇄로 출력한 군청색 바탕엔 ‘생선 뚝배기’란 흰색 궁서체가 촌스러웠고, 그마저도 음식 사진도 함께 붙어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문고리에 대롱대롱 걸린 ‘임시 휴업’이란 팻말.
“그래도 50년 전통이라니 뭔가 있지 않을까요?”
“흠!”
마뜩잖은 함 사익의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거부 의사를 우 상길에게 표하는 것이었다.
“불편하시면 다른 곳으로 옮기시죠? 말씀드렸다시피 서민들이 찾는 식당이기에.”
“아닙니다. 솔직히 조금 놀라긴 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러자고 했으니 우 부장이 곤란할 필욘 없어요. 들어갑시다.”
공 만호가 잡아준 문안으로 들어선 그가 몇 걸음도 못 가서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밖에서 맡았던 꾸리함의 정체가 막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40대 초반의 여주인이 반갑게 맞이하여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들고 온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우 상길에 배시시 웃었다.
“전부 아침 배에 들어온 것들이어서 아주 싱싱해요. 그리고 저 홍어는 흑산도에서 어제 받은 거고,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벨 누르시고.”
“자! 앉읍시다, 앉아요. 우 부장도 앉고.”
일곱 명의 범상치 않은 남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자, 겸연쩍은 함 사익이 우 상길을 제 곁에 앉히고 면면을 훑었다. 한결같이 다부지고 강해 보이는 사내들. 딱히 격식을 갖춘 복장은 아니었다.
‘충직해, 부럽구먼.’
우 상길에 야릇한 질투심이 발한 함 사익이 소주잔을 집어 그에게 주었다.
“받아, 우 부장! 저 친구들 왠지 첫눈에 정이 가는데? 느낌이 좋아!”
쪼르륵 따르는 술은 우 상길을 거쳐 차민주, 그리고 나머지 일곱의 소주잔을 채우고 마지막은 우 상길에게 자신의 잔을 채우게 했다. 그때 함 사익은 잔을 들지 않았다. 바닥의 소주잔을 가리킨 손가락만 까딱였을 뿐이었다.
“자! 마십시다. 우리 우 부장이 추천한 50년 전통 식당 음식도 궁금하고, 오늘 만난 여러분 마음도 궁금하니 먹고 마셔야 알고 듣질 않겠습니까? 하하하!”
느닷없는 호탕한 웃음이 홀 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누군가 깜짝 놀라 항의할 만했지만, 식당은 그들 이외 손님이 아무도 없는 임시 휴업일이었다. 공 만호가 선지급한 금액은 신선한 재룟값과 식당의 이틀 치 매상이었다. 단지 주방에서 분주했던 부부가 흠칫 놀라기는 했다. 그때 유리문 밖에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을 본 여주인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자,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홀 안을 살폈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가족 모임이라서 장사 안 해요.”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입장을 거부한 그녀의 미소는 그 남자의 어떤 반응도 얻지 못했다. 그는 애초부터 들어올 생각이 없던 것처럼, 그저 식당 안을 살피기만 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울리는 방을 유심히 살펴보곤 문을 닫고 사라졌다.
“누구야? 손님 아니었어?”
“글쎄요? 누가 됐든 참 기분 나쁘게 보고 가네? 괜히 섬찟해요.”
“허어! 이 사람, 말이 왜 이렇게 사나워?”
“그러게요,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여하튼 그래요.”
“복 찜도 다 됐어, 거기 접시 두 개. 그리고 민어 불 좀 줄여.”
불과 세 테이블, 열한 명 손님을 위한 조리임에도 주방의 분주함은 점심시간을 방불케 했다. 한 번 크게 웃음이 터진 방안은 그 후론 조용했다. 누군가의 말은 계속된 것 같았지만, 방안을 새어 나오지 않고 차분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음식들이 오가면서 군산을 찾은 함 사익이 바라던 하루가 완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군산 방문은 그의 일생일대 또 다른 변곡점이 될 날로, 그 기운은 이미 뻗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