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당신목과 드므 그리고 벅수의 도박.
“벗겨낼 만큼 다했는데도 상태가 이래요. 이쪽 구미와 여수, 그리고 이건 부암동. 보시다시피 완전히 찌그러져서 아무것도 건질 게 없어요.”
온갖 잡다한 전자 기기와 부품이 제멋대로 쌓인 비좁은 공간에서 부동길이 두 개의 화면을 번갈아 짚으며 난색을 보였다.
“사실 복원이 아닌, 보정이라고 해야 맞아요. 원본이 손상된 게 아니니까.”
부동길의 턱밑 의자에 등을 보이고 앉아 화면 이곳저곳 클릭을 반복하는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책상과 의자에 손을 짚고 화면을 주시하던 부동길이 뒤에서 묵묵히 있는 도 민수를 돌아봤다.
“비유하자면 구겨진 천 위에 빔프로젝터를 쏜 거라고나 할까? 영상은 제대로 송출된 건데 형체 구현이 안 된 거죠. 이 자체가 원본이란 말입니다.”
“흠.”
세 곳의 CCTV 화면은 복사라도 한 듯, 화질이 극도로 불량했다. 사람은커녕, 주변의 집이나 구조물조차 가려낼 수 없는 동영상이었다.
“가자!”
도 민수를 재촉한 이는 김준석이었다. 그는 부동길이 확보한 CCTV를 직접 보기 위해 이례적으로 이곳까지 동행했다. 그만큼 다급한 마음이었다.
“땡그랑! 땡그랑!”
허접한 문을 열고 나온 김준석에게 문틀에 걸린 풍경이 낭창대며 청음을 울렸다.
-영진 전자- 풍경이 걸린 볼품없는 상호가 뒤따라 나온 도 민수의 머리에 닿자, 곧이어 나온 부동길이 작은 푯말을 신경질적으로 쳐올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쟤가 과학수사대와 협업하는 놈인데, 선배.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쉿!”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해 짜증이 난 부동길을 도 민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눈짓했다.
“가만? 그럼, 저 양반이 그?”
처음 도 민수가 영진 전자로 들어설 때 조용히 뒤따른 그를 누군가 했지만, 신경이 온통 CCTV에 쏠린 탓에 무시했던 남자였다. 또한 지금껏 10여 년 넘게 말로만 듣던 신비한 존재가 이렇듯 불쑥 나타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근데, 이 자식이!”
“헉!”
서릿발 냉기를 쏜 도 민수의 눈빛에 부동길이 흠칫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머릿속을 맴도는 낯선 단어. 그가 욕을 했다. 그의 입이 거칠었다.
“보는 눈이 아둔하면 입을 조심해라. 나오는 대로 뱉지 말고. 감히?”
“아니. 그. 그. 그게….”
“다시 한번 그따위 저급한 호칭을 쓰면 나완 끝인 줄 알고.”
싸늘한 눈빛. 부동길은 그의 매서움에 반감조차 일지 않았다. 늘 친절하고 사려깊은 그가 일순간 돌변하다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김준석은 청계천 세운 상가 3층 난간에 서서 너른 흙길 끝 종묘의 대문인 창엽문을 응시한 채, 조선의 위패를 지키는 장승처럼 오래도록 그 자리에 박혀있었다. 햇살의 기울기에 그림자가 바뀌고, 시간의 골에 따라 풍향도 바뀌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사이 부동길을 돌려보낸 도 민수가 그의 등 뒤를 하염없이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고 인적이 끊긴 낡은 건물의 흐릿한 조명이 몇 뼘 더 밝아지자, 박혀있던 장승의 다리가 움직여 낮은 목소리가 되었다.
“당신목(堂神木) 아래 드므를 준비해야겠다.”
“선생님! 그렇게까지, 아직 시간이.”
“그 자리에 가디언도 있어야 한다, 더는 주저할 수가 없구나.”
도 민수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가 지시한 드므란, 알려진 것처럼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 목제 건물의 화재를 막고자 놓인 커다란 물그릇이 아니었다. 비록 주술적 의미는 비슷할지언정, 김준석의 드므는 벅수의 실체를 투영하는 기물이었다. 그러나 기겁한 까닭은 당신목이란 특별한 장소라는 이유다. 우두 군장 앞에서의 의식 행위는 벅수의 기운을 물의 입자로 화하는 기구로 사용돼, 내재한 에너지를 감소시켜 수명 단축을 의미했고, 소멸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김준석의 시간은 ‘4분 39초’였다. 그 점이 도 민수의 두려움이었다. 급격히 소진될 기운이 회복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난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차질 없게 준비하거라.”
김준석은 그 말을 뒤로하고 깃털처럼 허공을 디뎌 난간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망연자실, 넋이 나가버린 도 민수의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신목’은 우두머리 벅수와 교감이 필요할 때만 찾는 곳이라 들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교감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드므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드므. 드므. 드므. 이제는 도 민수가 장승처럼 박혀 눈을 감고 말았다.
백사실 계곡 깊숙한 장소. 형체를 감추고 소리로만 흐르는 계곡물과 개구리울음이 어두운 숲속 구석구석으로 종잡을 수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숲에 진짜 당신목이 있어요?”
도 민수가 비추는 플래시 불빛을 따라 걷는 오주희가 달빛에 어른거리는 나무들을 지나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에는 기껏해야 백년도 되지 않은 수종과 잡나무들만 빽빽했기에 상상 속의 당신목은 소설 같았다.
“이쪽!”
걸음을 멈춘 도 민수가 플래시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엔 달빛 윤슬을 찰랑이는 몽환적인 연못이 반짝였다.
“어머! 세상에?”
플래시 반경을 가로질러 총총거린 그녀가 멈춘 곳은 석제 돌층계와 여섯 개의 작은 돌기둥이 있었다.
“옛날에 정자가 있던 곳이야.”
도 민수는 호기심에 찬 그녀가 묻지 않은 걸 말하고, 곧장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다 왔어.”
언뜻 그녀를 당신목으로 재촉하는 듯했지만, 그는 갈등과 두려움에 짓눌린 표정이었다. 9월 9일. 절대 선이 탄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이 캐이런에게서 반드시 구해야 했지만, 이 밤의 의식만큼은 절대 말리고 싶은 그였다. 달빛이 물든 수면을 점 찍는 소금쟁이가 수풀 밑에 숨을 때, 연못 둘레를 걷던 도 민수가 오주희에게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잠시 밤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이어 거슬리는 옅은 신음이 나왔다.
“오늘 이상한 거 알죠? 선생님이 절 부른 것과 관계있어요? 그리고 여긴 그냥 연못인데, 당신목이 어딨다는 거죠?”
그를 따라오는 내내 별 내색하지 않았던 그녀가 결국 참았던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
왠지 모를 도 민수의 침울한 얼굴도, 김준석의 당신목 호출도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차마 묻지를 못했었다.
“주희 씨! 가 보면 알 거야.”
그는 풀에 덮여 반쯤 드러난 화강암 계단 위로 그녀를 이끌었다.
“나는 여기까지.”
도 민수는 긴장한 그녀를 다독이는 미소를 보인 뒤, 두어 발짝 물러서 천천히 손가락을 연못 중심으로 향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한 그때. 달빛 수면에 때아닌 잔잔한 파문이 일어 곳곳에서 동심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생성된 원들은 파장이 되어 수면에 닿았고, 접점에선 응결된 금빛 물방울이 달빛의 테를 이뤄 아롱지듯 피어올랐다.
“아!”
몽환에 빠진 오주희의 탄성이 나왔다. 그러나 정점의 황홀한 광경은 그 뒤에 일어났다. 모여든 물방울들이 둥근 원이 되어 품었던 달을 그녀 머리 위로 터뜨린 것이다. 어둠 속 연못의 달빛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벅수와 가디언만이 갈 수 있는 염원의 공간인 저 안에 당신목이 있어요.”
“흐흡!”
잔뜩 긴장된 호흡을 한 오주희가 용기를 내어 걸음을 떼었지만, 허공을 디뎌야 할 두려움에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러자 휘황한 입구에서 황금빛 나무줄기가 뻗어 나와 크게 뒤틀더니, 그녀를 감싸서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일순간에 여닫힌 차원의 공간은 신비한 광채만 도 민수의 동공에 잔상으로 남겨졌다. 휘 잉!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지고, 다시 잔잔해진 연못의 수면은 찰라 간 뒤틀렸던 시공(時空)이 어색함을 감추고 느긋한 소금쟁이의 발끝에 총총히 달빛을 찍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지? 술잔에 뜬 달을 마신다고 한들, 뱃속에 달빛이 채워지겠느냐고. 정직한 건 오직 자연뿐, 위선과 위악에 능숙한 생명체가 인간인 걸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우리 벅수들은 그런 그들의 염원으로 생성됐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 악을 판단하지도, 희망과 절망에 관여할 수도 없다. 캐이런 또한 염원의 벅수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가?”
형체 없는 괴기한 음성은 드므 앞 오주희를 적잖이 당혹하게 했다. 어디서 들리는지, 있다던 김준석은 어딨는지. 찬란한 금빛 물방울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그 공간에는 즐비한 생기 없는 나무들이 삭막하게 펼쳐있었다. 거대한 당신목의 우람한 줄기는 족히 수십 명이 에워싸도 모자랄 둘레로, 지면에 불거진 뿌리에선 그녀의 키를 훌쩍 넘은 자목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눈길을 잡은 건 특이한 줄기였다. 흡사 먹이 고치를 짓기 전, 대형 거미 다리처럼 세 갈래로 뻗은 굵은 나뭇가지가 중심에 잎사귀로 촘촘히 엮인 타원형 둥지였다. 설치된 드므와는 수직을 이룬 모양이었다.
“과연 캐이런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염원이 강해질수록, ‘한(hann)’ 너는 쇠하여 소멸할 운명. 고대의 벅수들 또한 어김없었음을 알고 있을 터!”
“그렇지 않소! 당신의 순리는 완고함에 사로잡힌 낡은 고유성일 뿐, 염원의 시대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오. 나의 본질은 모호해진 선의 기준에 유연함을 가졌소. 지금껏 나의 실존 근본은 좌절의 껍질 속 ‘희망’을 북돋는 것이었지만, 급변한 상황은 곧 세상에 출현할 –절대 선-을 위한 발아의 신성수로서 운명을 다할 것이오. 이 의식은 인간들의 희망이 점에서 면으로, 그렇게 세상이 되어 위대하고 거룩한 ‘사랑’을 완성 시킬 것이오. 캐이런과 나, 한(hann)의 운명은 그 후에 결정되오.”
형체는 보이지 않고 괴기한 음성에 맞선 목소리가 난데없이 들리자, 흠칫한 오주희가 돌아봤다. 그곳엔 회색빛 두꺼운 껍질로 골이 깊은 늙은 고목이 있었다. 그때, 고목의 나뭇가지가 뱀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싸 드므 위로 끌어 올렸다.
“가디언은 두려워 말고 모든 감각을 자유롭게 하시오.”
김준석이었다. 거친 나뭇가지가 억세지 않다고 생각한 동시였다.
‘그럼, 이 고목이?’
“맞소. 이것이 내 본 모습이오.”
그녀가 흠칫했다. 속마음이 꺼지기도 전, 의문이 답으로 옴에 놀란 것이다.
“지금의 의식은 내재 된 가디언을 깨운 일전과는 전혀 다르오. 이번엔 벅수의 염원이 당신의 세포와 결합하는 것이기에 불가분한 고통을 수반하오. 목적은 캐이런의 대리자를 감지하는 것. 드므 안에서 펼쳐질 현상에 집중하시오. 의식이 끝난 후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문득, 허리를 감싼 나뭇가지에서 온기를 느낀 순간, 고목의 머리끝 성긴 가지를 타원형 둥지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뿌리가 문어발처럼 지면을 더듬은 뒤, 육중한 몸통을 드므의 중심과 수직인 둥지에 서서히 고정해 갔다. 그리고 이어진 신기한 현상은 가디언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끓는 듯 들썩였던 거친 껍질에서 찬란한 광채의 빛기둥이 드므에 쏘아진 것이다. 그러자 좌우, 상하로 점차 팽창한 함지박만 했던 드므가 족히 세 길이 넘는 깊이와 높이로 확장됐다. 그런 뒤, 드므 속의 물이 들끓기 시작하는 때와 맞춰 가디언을 감쌌던 나뭇가지가 중심으로 이동해 갔다. 투명한 광채로 화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꼴이 된 가디언. 그녀는 발아래 드므 속의 격한 소용돌이가 정점에서 분리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차 사그라진 거품은 둥근 수막이 되는 것을 끝으로 안정되었고, 나뭇가지는 천천히 드므 속 중심으로 기울어져 그녀를 내려놓았다.
“흡!”
당혹한 그녀가 헛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발끝이 닿은 곳이 수면 위였기 때문이다. U자형의 드므 중심엔 사방에 둘린 수막과 더불어 거울이 된 물이 바닥에 찰랑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물 위의 그녀는 어느 것도 젖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부레옥잠이라도 된 것이었을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겨내겠소!”
김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빙벽처럼 둘렀던 수막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가 입은 옷을 영롱한 빛으로 녹여냈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의 나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감천마을에서 가디언을 깨울 때의 모습이 되었다.
“이번 의식으로 내 시간의 단축은 불가피하오. 어쩌면 아주 심각해질 수도 있소.”
김준석은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선택해만 했던 이유를 간단히 말해줬다. 왜 자기의 생명시간을 태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오주희의 감지력을 키우는 도박을 감행하는지, 시간의 촉박함이 부른 절박한 결심임을. 그리고 가장 큰 심중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의식을 시작했다.
“만약에. 절대 선을 구하기 전, 시간이 급격히 감소해 소멸한다면 선과 희망의 염원이 사라진 인간은 몇 세대를 지나지 않아 종말을 맞을 것이오. 다행히 소멸 전, 절대 선을 구한다면 그대 가디언이 있기에 웃을 수 있겠지만….”
그의 예단은 가뜩이나 불안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희망의 염원인 벅수가 하는 부정의 기운은 더욱 참담하게 들렸다. 정말 그의 우려대로 그 전에 소멸한다면? 감정이 그쯤 되자, 위기감이 극에 달한 감각기관은 혈관과 맥박을 격정적으로 피아니스트의 건반처럼 요동쳤다.
“그러지 마시오! 내 말은 벅수의 소명에서 비롯된 안타까움일 뿐, 그대 가디언은 다르지 않소? 선의 본질이 사랑이란 걸 결코 잊어선 안 되오. 분자가 제아무리 큰들 분모를 넘어설 수 없듯이, 사랑. 모든 것은 그 안에 있소. 그대는 나와 다른 운명의 소유자요. 당신을 존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럼 시작하겠소!”
“우우웅....우웅.”
이윽고 거대한 당신목 내부의 기이한 울림이 부유하는 금빛 입자를 진동해 타원형 둥지로 응축하기 시작하자, 이내 투명해진 고목 표면 위로 나선의 띠를 이룬 금가루가 드므로 흘러내렸다.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곧게 뻗은 그녀의 입속에 빨려 들어가는 가루는 신체를 덮는 밝은색과는 달리, 미세하게 붉은 기를 띄었다. 그리고 투명한 고목에서 드므로 동시에 터진 백색 섬광은 그녀를 중심으로 파노라마의 수막을 헤집어 소용돌이쳤다.
“커걱! 컥!”
목 조임을 당하는 듯한 그녀의 단말마는 소용돌이가 거세질수록 극심한 경련을 수반하여 갈기갈기 찢기는 비명을 더했다.
“으아악! 컥! 으아아악!”
가슴이 터질 듯 부풀고, 금가루를 덧칠한 음모와 머릿결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지길 반복하는 현상은, 피부가 들끓는 마그마로, 북풍의 석류알갱이처럼 냉각되길 정확히 아홉 번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찰나의 정적이 장악한 공간은 마치 블랙홀 심연을 연상케 했다. 사건의 지평선, 그 찰나는 영원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투명한 고목이었던 김준석이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드므 곁에 서 있었고, 철제였던 드므 벽은 가디언이 선명히 보일 만큼 맑아 있었다. 드므를 투과한 그녀와 벅수의 눈빛이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수막은 느릿느릿 사람의 형체와 주변의 모습이 검게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공 이사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뭐가 말입니까?”
“설마. 나를 좀스럽게 만든 건 아니죠?”
늦은 오후. 마이바흐가 막 제천 나들목을 통과할 무렵, 뒷좌석에서 괜히 실실거리던 함 사익이 애매한 눈동자를 굴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게네들에게 준 봉투가 생각나서.”
“그런데요?”
답변을 떨떠름하게 비꼰 공 만호가 기분이 상했음을 드러낸 입을 비쭉였다.
“잘했죠?”
“얇아도 무거울 겁니다.”
“그쵸? 그래야지. 하하! 워낙 투자 개념이 희박한 분이라서.”
안도한 함 사익이 눈을 찡긋하고, 앞 좌석의 우 상길을 불렀다.
“우 부장님. 어제 그 친구들 다음 주, 문제없죠?”
콘솔박스에서 꺼낸 사탕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틈으로 우 상길이 밋밋하게 답했다.
“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본사로 집결할 겁니다.”
“좋아요! 들었죠? 숙소 서두르시고, 그리고 이참에 좀 더 보강했으면 하는데. 많잖아요? 똥개들은 밥 주면 주인이듯, 돈에 살랑대는 인간들. 우 부장이라면 잡종과 덜 잡종을 거를 겁니다. 어차피 장인옥의 소뿔도 뽑았으니, 다음을 정리해 가야죠. 후후!”
그는 휴대폰에 띄운 전국 지도에서 편의점이 운영되고 있는 도시를 줌아웃시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선 빵으로 끝내면 어설퍼. 나, 함 사익이 언제까지 네놈들과 겸상할 줄 알았더냐. 이참에 장악이란 게 뭔질 보여주마. 흐흐흐.’
“별장에 대표님이 와 계신답니다.”
그때. 전국 장악을 그리는 상상 속에서 흐뭇한 함 사익의 눈앞으로 공 만호의 휴대폰이 어른거렸다.
“대표님? 누구? 설마, 재익이?”
“네, 속초 점장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조금 전 도착하셨다고.”
“그 인간이 연락도 없이 별장까지 웬일이지? 내가 속초 별장에 가는 걸 알고 왔다는 건가? 어떻게 알았지?”
순간, 함 사익의 매서운 눈초리가 공 만호를 스쳤다.
“동선 노출에 관해선 나중에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그나저나 열 시가 하루 두 번인 줄도 모르고 사는 인간이 속초까지 올 이유가 뭘까?”
그는 의구심이 번진 눈동자를 몇 차례 굴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 인간. 설마 파스? 얼마나 됐다고? 이것 봐라? 그럼, 역치가 깨졌단 말인데?”
그는 콘솔 위 휴대폰을 집어 일정표를 확인했다. 불과 10일 전이었다. 함 재익은 20개짜리 한 박스를 가져갔었다. 그 순간 함 사익의 입가에서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말한 파스는 대마 성분을 농축해 피부에 붙이는 것을 일컫는 은어였다. 대마는 다양한 형태의 제품으로 그가 소유한 -HAM’S 리테일- 전국의 편의점을 통해 은밀히 유통되고 있었다. 파스, 사탕, 필름, 알약, 음료, 립스틱형 등등 다양했다. 그러나 진짜는 따로 있었다. 멕시코 선인장 빼요떼의 추출물과 양귀비 성분의 혼합물인 그것은 즉각적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면서도, 24시간 후엔 혈액과 모발, 피부 조직에서도 잔여 성분이 검출되지 않는 획기적인 신종 마약이었다. 그는 그것을 일컬어 –인샬라-라고 명명하고 특정 VVIP에게만 한정적으로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공급했다. 당연히 중독된 부유층은 단속의 불안을 회피한 제품이었기에 폭발적인 수요로 환호했다.
“그래, 사는 게 쉽지 않지. 재벌 총수면 뭘 하나? 제 몸뚱어리 지탱하는 건 성과가 아니라 밥숟가락인데. 양자 컴퓨터는 개뿔! 양기가 빨려 뒈지기 직전인 판에.”
혀를 끌끌했지만, 일순 연민의 감정이 스친 그가 나직이 차민주를 찾았다.
“차 팀장, 속초에서 누가 기다린다네?”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시트에 묻히자, 차민주의 발끝이 움찔거려 정숙했던 마이바흐의 엔진에서 괴성을 끌어냈다.
“부웅! 부우웅!”
최고급 세단이 반짝이는 햇살을 끌고 힘차게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정글 숲을 달리는 흑표범이 연상되는 날렵함의 극치였다. 흑표범은 순식간에 170km의 숫자에 진입했어도 성에 차지 않은지 연신 으르렁거렸다. 곧게 뻗은 차선을 빠르게 삼키며 내달리는 마이바흐. 그런 그들을 후방을 따르던 차 한 대가 뒤늦은 가속으로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강! 가강! 가아앙!”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자. 군산에서도 그들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였다.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감시를 군산에 이어 확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