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밖으로 샙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서울역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 갔다. 이름부터 투영프로젝숀인 것이 왠지 힙해 보였다. 이 카페 역시 최근 을지로에 많이 생긴 여타 카페들처럼 꽤 낡은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힙함의 첫 번째 조건은 온고지신인 건가. "힙해지고 싶은 그대, 낡음도 어떻게 유용하느냐에 따라 없던 쓸모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 낡음 안에서 그대의 감각과 감성을 녹여 새로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글이 "네이버 카페 창업 성공하기 NO.1" 사이트에 조회수 100만 정도를 기록하며 구독되진 않겠지. 아무튼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당연히 없겠지만, 내가 요즘 좋아하는 카페가 이런 류이니,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고, 나에게만은 잘 통한 것 같다.
을지로 하면 할 말이 많다. 회사가 을지로이기도 하고, 요새 뜬다는 곳은 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선 을지로에 있는 카페들은 대부분 다 가본 편이다. 평소 길을 잘 찾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그런 나도 을지로만 가면 헤매기 일쑤이다. 이쯤 되면 분명 나와야 하는 카페들이 여전히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고, 간판은 당연히 없고, 모든 건물들이 엇비슷하게 생겨 건물 분간도 안되고, 이럴 때면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다음 로드뷰를 켜 정확한 건물 외관과 색, 다른 업체의 간판들을 나침반 삼아야만 한다. 가끔 이 방법마저 안 통할 때는, 진심으로 귀신에 홀린 걸까 싶기도 하다. 참고로 을지로 감각의 제국이란 술집을 2번 갔었는데, 두 번 다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같은 바퀴수를 돌며,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헤매었다. 헤매는 루트마저 비슷하다니 조금 소름 돋고, 아주 조금 자괴감이 들고, 아주 아주 조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동행에게 욕먹어가며 여길 찾고 있나 싶기도 했지만, 목적지를 찾았을 때의 그 희열과 가게 안에서의 경험이 만족스러우니 그것으로 됐다. 아니 넘치게 충분하다.
간혹 이런 가게들을 생각할 때 츤데레란 단어가 떠오른다. 스스로를 알리는 것이 귀찮아서인 지, 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인 지, 어찌 된 이유에서건 불특정 다수에게 시크하고 차가워 보인다. 그럼에도, 가게를 향한 철저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힘겹게 찾아오는 이들에겐 그 특유의 감각과 맛으로 아깝지 않게 보상해준다. 그런 보상심리 때문에, 오늘도 난 불특정 다수가 되기보다는 찾아가는 한 명이 된 것이겠지.
흔한 간판조차 거부하는 투철한 신념의 카페들을 찾아가는 것은 늘 신비롭다. 길을 걷다가 "우리 목도 마르고 다리가 살짝 아픈 거 같은데 잠깐 카페에서 쉬었다 갈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절대 모습을 안 내비치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카페를 가볼까?"란 부푼 기대를 한껏 안고, 미리 네이버에 검색을 하고, 헛걸음하지 않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켜 오늘의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네이버 지도를 켜 내가 있는 곳을 출발지로, 카페를 도착지로 넣어 정확한 시간을 확인한 후, 실시간 GPS를 보며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맞는지, 점점 가까워지는지, 다시 멀어지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에 확인을 더하는 노력이 있어야지만 찾을 수 있는 그곳들이 내가 가는 요즘의 카페였다.
이런 까닭에, 요즘 들어 카페를 찾는다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정성이 필요한 일 같단 생각이 든다. 점점 편한 것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우리지만,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마라.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라는 신조로 이토록 지조 있고, 강단 있고, 자존심 있는 카페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그곳을 찾아갈 정도의 관심과 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수요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니까 유동인구가 적은 외곽에, 마음을 먹어야지만 올 수 있는 공간에 카페를 몰래 차려도 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매번 자의가 아닌 부주의로 인해 을지로 골목을 몇 바퀴씩 누비는 나로서는, 이 곳을 목적지로 삼고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긴장한 것과 달리, 다행히 여기는 바닥에 입간판이 있어 생각보다 잘 찾을 수 있었다. 2층에는 부부가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탁소가 있고,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과장이 아니라 발을 헛디디면 정말 목숨이 위협될 치만큼 높았고, 그마저도 곡선으로 나있어 정신 꽉 붙들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난 손잡이를 잡으며 계단을 다 오르자 카페로 입성하는 철문이 보였다. "그래, 이제 미션 완수가 눈 앞에!!!"라는 마음으로 철문을 힘껏 여니, 그리 넓지 않은 규모에,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의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 끝나고 일부러 찾아온 정성을 아시는지, 초행길이라 버스정류장을 하나 앞서 내린 탓에 5분 이상 오르막길을 더 걸어야 했던 수고를 아시는지, 주인장분은 날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메뉴판을 보니 초콜릿 커피라는 것이 있었다. 카페모카 같은 건가. 오래 걷기도 했고, 하루 종일 일하느라 당 충전이 시급한 나는 초콜릿을 직접 녹여 만들었다는 주인장 말에, 망설임 없이 이 메뉴를 시켰다. 일단 비주얼 합격이고요, 티스푼을 저어 한 모금 마셔보니 초콜릿이 매우 진한 게 오늘 한 선택 중에 가장 잘한 일 같았다. 아, 오늘 일한 것이 이렇게 보상받는구나. 뿌듯했다.
그 카페에는 나 말고도 일행처럼 보이는 두 남자가 진작부터 바 테이블 쪽에 앉아 있었다. 20대 초중반처럼 보였는데 그들은 내가 오기도 전부터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았다. 워낙 좁고 조용한 가게라 엿들을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얘기가 다 들려오니 어쩔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중간중간 들리는 얘기를 듣자니, 서로 전공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님이 주인장분께 전공을 묻자, 주인장분은 사진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사진에 대한 어록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포토그래피"의 뜻을 아느냐는 말부터 시작해 사진은 빛에 관한 것이다, 빛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사진을 좋아한다, 고 말하기도 했다. 점차 청자의 반응이 사라지고, 화자의 목소리만이 공기 중을 어색하게 맴돌 때 그는 역시 힙한 카페의 주인답게 말을 끊어야 할 때임을 알고 "여기까지만 할게요"라는 수줍은 한 마디로 긴 대화를 끝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하염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애정을 갖고 말할 대상이 있다는 것, 타인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아낌없이 알려주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을 가진 사람이라니 내심 부러워졌다. 자신이 애정을 품고 있는 대상이 타인에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배려심, 눈치, 이해, 자존감까지. 그가 못다 한, 뒤에 이어 나올 말들이 궁금했지만 어차피 내 시선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줄곧 책에만 가있었으니 내 궁금증 같은 건 그들에게 절대 가닿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정적 이후, 주인장분은 그에게도 전공을 물었고, 그는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주인장분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오만과 편견이라고 말했다. 주인장분은 "아.. 엄청 현실적인 스토리잖아요"라고 했고, 학생은 "그런가요? 전 엄청 비현실적인 스토리라 좋아하는데.."라고 했는데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같은 서사를 두고도 이렇게 의견이 양극단으로 갈릴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듣고 싶었지만 내가 갑자기 저 멀리서 "아, 왜 여기서 얘기를 끝내시는 거죠? 에이, 이건 아니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 분. 냉큼 말하시죠."라고 물을 자격도 없을뿐더러, 내가 엿듣는 것이 범죄는 아니지만 대놓고 티 내기엔 낯부끄러운 일이라서 아쉬움을 속으로 삼켰다. 쓰읍.
그렇게 사십여분을 앉아있다가 나왔다. 보통 내가 가는 시간대는 사람이 별로 없는 때라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왠지 반갑고 즐거웠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닌 이상, 누군가의 소소한 의견을 들을 기회는 일상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생각거리를 덤으로 얻었으니 뜻하지 않은 선물을 얻은 셈이기도 하고.
아침부터 미생으로 산 하루였지만 카페에서의 시간은 날 다시 내 삶의 주체자로 만들어 준다. 카페는 매번 내게 정화이자 감화의 작용을 도와준다. 그것이 나를 매번 카페로 유인하는 동기이다. 내 삶의 주인 자리로 차츰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 때면 "이 정도면 네가 할 일은 충분히 했어. 고마워"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카페를 지그시 바라본 후, 미련 없이 나설 채비를 한다. 처음 카페를 들어섰던 좀 전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도 퇴근 후 밖으로 샜고요, 그래도 될 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