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키장의 추억 1편
따뜻하게 데운 브라우니 위에 풍미가 진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디저트.
나는 이 디저트를 약 18년 전, 미국에서 처음 맛보았다.
지금은 브라우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브라우니 하면 으레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18년 전 내가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브라우니라는 디저트 자체가 생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생이라면 캔모아 그네 의자에 앉아 과일 주스를 빨고 생크림 얹은 토스트를 먹거나, 예쁜 학생들만 알바로 받는다는 신촌 민들레 영토에서 커피와 떡볶이와 까르보나라를 동시에 시켜 먹으면서 ‘이것이 진정한 퓨전’이라고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돈이 없어서 교환학생은 못 가겠는데 이대로 졸업해서 무작정 사회에 뛰어들기에는 아쉬웠던 나는 미국 국무성에서 하는 ‘Work & Travel’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리조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이 외국물을 먹어보기 위해 자주 이용했던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Working Holiday’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에는 괴소문에 가까운 경험담들이 난무해 꺼려지던 차였다. (갔더니 두 달 동안 오렌지 농장에서 주야장천 오렌지만 따고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나서, 영어라고는 ‘오렌지’가 ‘어륀지’라는 것만 배우고 돌아왔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나름 꼼꼼하게 설명회를 다니며 결정한 프로그램이 바로 ‘Work & Travel’이었다.
하지만 출발할 때부터 에이전시에서 내 이름의 영문자를 잘못 보내는 바람에 첫날 비행기를 못 탔고, 다음 날 뒤늦게 미국에 도착했는데 공항에 나를 픽업하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내가 지내게 될 셰어하우스에 도착해보니, 먼저 도착한 한국인 친구와 남아공에서 온 말 많은 여자애 하나, 호주에서 온 우리 오빠보다 등치가 큰 여자애 하나, 영국에서 온 우리 아빠보다 키 큰 여자애 하나, 미국에서 알바하러 온 눈치 없는 남자애가 하나 있었다.
모두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백인이었고, 모두 뚱하고 불친절했으며, 동양에서 온 여자애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내심 당시 핫한 패션 브랜드였던 ‘후아유’의 모델 같은 남자애들이 기다릴 줄 알았던 나와 한국인 친구는 실망했지만, 내일 스키장에 가면 같이 일하는 애들은 친절하고 멋질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다음 날 스키장에 가보니 집에서 만난 애들이 전부 그대로 유니폼을 입고 서 있었다.
그곳은 스키장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일하는 직원은 몇 안 되는 최적의 효율을 자랑하는 스키장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뚱하고 불친절한 애들과 시간이 지나니 그런대로 친해진 것과, 그 뒤로 합류하게 된 남아공 남자애 둘과는 핑크빛 기류가 오갈 정도의 사이가 된 것이었다.
허허벌판인 스키장에서 시내로 나가기 위해서는 회사에 붙어 있는 신청 종이에 이름을 적어 넣어야 했고, 셔틀은 일주일에 딱 한 번 마트에 들렀다.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은 원래 살던 곳이 비슷한 환경이라 적응하는데 무리가 없었지만, 서울에서 자란 나와 친구는 압도하는 자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문명의 냄새를 맡기 위해 매주 셔틀버스 종이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스키를 타러 온 사람들은 매표소에 앉아서 패스에 펀치로 구멍을 뚫고 있는 나를 보고 이 시골구석을 어떻게 알고 한국에서 날아왔느냐고 물었고, 스키장 입구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나를 보고 세상이 이렇게 좋은 알바를 어떻게 구했느냐고 웃었다.
“하루 종일 눈사람을 만들고 돈을 받다니! 이거 진짜 좋은 일자리 아냐?”
우리가 일하는 스키장은 우리나라에 있는 다운 힐 스키장이 아니라 크로스컨트리 스키만 타는 곳이어서 거대한 산이었다. 속도감을 즐기는 스키라기 보단 스키를 신고 눈 산을 넘는 하이킹에 가까웠다. 어두워지면 위험했고, 실제로 코스를 이탈하거나 제시간에 못 들어와서 당신이 죽더라도 우리는 책임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스키장 패스에 쓰여 있었다.
그렇기에 스키장은 아침 일찍 오픈했고 4시면 문을 닫았다.
4시부터 잠들기 전 11시까지 세계 각국에서 모인 20대의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초반에는 서로 각국 나라의 음식을 해주고 문화교류 비슷한 걸 하며 고상하게 지냈지만, 친해진 후에는 매일 밤 음악을 틀고 국적불명의 막춤을 춰댔다.
그것도 지겨워졌을 무렵, 우리는 근처에 근사한 바(Bar)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셰어하우스에서는 꽤 오래 걸어야 하지만, 펄펄 끓는 나이에 무료한 일상을 탈출할 수 있다는데 눈길을 한 시간씩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일이 끝나면 종종 그 바에 가서 복숭아 맛이 나는 ‘워워’라는 칵테일을 시켜 먹었고, 살짝 오른 술기운은 젊은이들의 러브라인에 불을 지폈다.
그 무렵 우리 스키장에는 로맨스가 피어나고 있었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인 20대 초반의 남녀들의 사랑의 짝대기가 여기저기 뻗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거다.
나는 그중 남아공에서 온 유머러스하고 재밌는 피터라는 남자애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날, 우리가 매번 가는 바에서는 New Year’s Eve Party가 열린다고 했다.
나는 그 날, 피터 옆에 앉아서 함께 브라우니를 먹다가 12시가 되면 그의 귀에 대고 Happy New Year!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를 처음 접한 건 New Year's Eve가 되기 며칠 전, 그 바에서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함께 일하는 여자애들과 함께 바에서 저녁을 때우는데 안쪽에서 셰프가 나와서 내가 시킨 메뉴를 가리키며 ‘이 메뉴를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나라고 했더니, 나를 훑어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매번 와서 술과 함께 키즈 메뉴를 시키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먹는 양이 미국인들보다 현저하게 적어서 어딜 가든 키즈 메뉴를 즐겨 시켰는데, 미국에서는 어른이 키즈 메뉴를 시키는 일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셰프는 나를 보고 껄껄 웃더니 키즈 메뉴를 시키는 너한테 딱 어울리는 달달한 디저트가 있는데 먹어보겠냐고 했다.
잠시 후, 셰프는 꾸덕한 브라우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잔뜩 얹은 접시를 가지고 나왔다.
데운 브라우니의 열기에 맞닿은 아이스크림은 그 위에 뿌린 초코시럽과 함께 멋스럽게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브라우니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온도 차이!
까맣고 무거운 브라우니와 하얗고 가벼운 아이스크림의 색감차이!
꾸덕한 브라우니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의 식감 차이!
어떻게 이토록 상극의 조화가 완벽할 수 있는지!
난생처음 먹어보는 브라우니를 입 안 가득 욱여넣고 나는 셰프를 향하여 쌍 엄지를 높게 쳐들며 당신은 천재라고 했고, 셰프는 자기가 처음 계발한 건 아니지만 자기 브라우니가 좀 맛있긴 하다며 웃었다.
내 옆에는 우리가 ‘타미’라고 부르는 18살짜리 여자애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브라우니를 셰프가 개발한 걸로 생각하는 걸 보고 살짝 비웃으며, 브라우니와 아이스크림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인데 이걸 이제야 먹어보았냐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나를 어린애 보듯 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녀가 나보다 브라우니를 먼저 먹어봤다는 이유로 살짝 주눅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어린 그 아이는 나보다 먼저 경험한 게 너무 많았다. 훨씬 어린 나이부터 혼자 해외에서 일을 했고, 술도 어릴 때부터 마셨고, 영어도 나보다 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나보다 먼저 피터와 키스를 할 줄은..
그래서 그 이후로 브라우니를 먹을 때마다 씁쓸한 짝사랑의 종말을 떠올릴 줄은... 그때는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