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날 미국의 바에서 벌어졌던 로맨스에 대해 얘기하려면,
우선 12월 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와 사건에 얽힌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 (한국. 여. 21세)
여고를 졸업해 여대를 다니다 와서 연애세포가 덜 발달했음. 영어 실력 중.
피터 (남아공. 남. 20세)
꽃보다 남자 구준표처럼 심한 곱슬머리. 금발. 183cm의 키.
유머와 다정함을 동시에 지님.
요리 잘함. 영어 실력 중상.
제이제이 (남아공. 남. 20세)
배우처럼 잘 생김. 금발. 피터와 불알친구. 180cm의 키.
우수에 찬 표정에 저음의 목소리. 약간 의뭉스러운 성격. 영어 실력 중상.
타미 (남아공. 여. 18세)
160cm가 안 되는 작은 키와 예쁘지는 않지만 귀여운 얼굴.
감정이 풍부. 프리섹스 지향. 영어 실력 상.
샐리 (미국. 여. 40대)
남편과 함께 스키장 정직원으로 일하는 아줌마.
오지랖이 넓어서 알바생들에게 관심이 많고, 술 마시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춤을 추다가 사라져서 남편이 매일 찾으러 다님.
스키장에는 이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그 날 벌어진 사건의 주요 인물은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피터와 제이제이는 남아공에서 온 친구들로 나보다 며칠 늦게 스키장에 도착한 걸로 기억한다. 우리와는 다른 셰어하우스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친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미국, 호주, 영국 출신으로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였고, 나와 한국에서 함께 온 친구 M과 남아공에서 온 아이들만 영어가 세컨드 랭귀지였다.
함께 일하는 아이들은 영어가 부족한 우리를 위해 평소에는 조금 느리게 얘기해줬지만 술에 취하면 우리가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이 속사포처럼 영어를 쏟아내곤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어가 중과 중상이었던 우리는 따로 얘기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제이제이는 누가 보기에도 잘 생긴 배우 얼굴로, 처음 스키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여자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잘 생긴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인생의 슬픔을 한 번 겪어봤을 것 같은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소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여자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얼굴이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왕좌의 게임에서 제이미 라니스터 역을 맡은 니콜라스 코스터-왈도의 어린 시절을 닮은 게 아닌가 싶다.
그에 비해 제이제이의 불알친구였던 피터는 구준표처럼 곱실거리는 머리에, 영어 발음도 조금 이상했고 사람들을 웃기는 재미에 사는 것처럼 가볍게 굴어서 처음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이 온 이후로 눈이 온 날에는 30분 먼저 출근해서 데크에 30cm 넘게 쌓인 눈을 삽으로 퍼내야 하는 스키장 일이 고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리고 힘이 넘쳤던 우리는 삽질을 하다가도 제이제이가 던진 눈덩이 하나를 계기로 눈싸움을 벌이며 눈밭에 뒹굴었고, 온 머리에 눈을 뒤집어쓰고 스키장에서 알바생 대상으로 무료 제공해주는 유통기한 지난 에너지바를 먹으면서도 피터가 던진 농담에 좋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제이, 피터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는 나와 M을 보고, 하루는 샐리 아줌마가 우리에게 와서 물었다.
“제이제이랑 피터 중에 누가 좋아?”
그때는 그들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제이제이의 배우상에 홀려 있던 때라 우리는 동시에 “제이제이!”라고 외쳤다. 알바생 러브라인 줄 긋기를 여러 번 해본 듯 아줌마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는 사라졌다.
아... 그때 그 대답이 나중에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그 대답을 하고 나서 얼마 뒤, 우리는 피터와 제이제이가 사는 셰어하우스에 초대를 받았다.
피터가 이번에 시내에 나간 김에 커다란 돼지고기를 샀는데 같이 요리해서 먹자고 했다. 당시에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밥 짓기와 레토르트 식품 데우기 정도가 다 였던 나는 돼지고기를 통으로 사서 요리를 하겠다는 20살짜리 남자애가 신기하기만 했다.
남아공에서는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요리법을 아빠에게 배웠다는 피터.
남자가 해 주는 요리를 처음 받아먹어 보는 나는 이미 그 포인트에서 피터에게 살짝 넘어갔던 것 같다.
피터는 팔을 걷어붙이고 요리를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감자를 숭덩숭덩 잘라서 냄비 안에 넣고, 통으로 된 돼지고기를 양념해서 그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돼지고기에서 나온 기름이 감자 안으로 스며들어 지글지글 대는 소리와 허브를 머금은 고기 향이 집안 가득 퍼졌다.
고기가 익는 동안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피터와 제이제이는 나와 M이 한국말로 대화할 때, 입을 다물고 “응”이라고 대답하는 게 웃기다고 했다.
“그게 말하는 거 맞아? 한국 사람들은 게으른가 봐. Yes라고 하기도 귀찮아서 입 다물고 대충 응- 이렇게 해 버리고.”
그러더니 둘 다, 입을 다물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던, “응.” “응.” 대답을 해대며 우리를 웃겼다. 한참을 응응 거리더니 피터가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근데... 나 진짜 궁금한 한국말이 있어.”
어깨에 얹어진 커다란 피터의 손이 은근히 신경 쓰였고, 걷어붙인 팔뚝에 솟아난 남자다운 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에 바짝 갖다 댄 반짝이는 피터의 눈빛만 본다면, “pretty가 한국말로 뭐야?”라고 묻고는 내 눈을 보며 “예쁘다,”라고 해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내 생각을 들킬까 봐 최대한 쿨하게 물어봤다.
"뭔데?"
피터가 소년미 넘치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fuck you가 한국말로 뭐야?”
아.. 피터.. 그래 너는 이런 애였지.
나는 예상 밖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런 나쁜 말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했다.
곧 고기가 익었고, 피터는 노련한 칼질로 고기를 썰어 내 앞에 있는 접시에 나눠줬다.
자고로 돼지고기는 타기 일보 직전으로 바짝 구워 먹는 것이 미덕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남아공에서는 붉은 기가 남아있을 정도로 설익게 구워 먹는다고 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여자애들 앞에서 요리를 해서 내놓는 남자애의 자존심에 의한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때 피터가 피가 뚝뚝 흐르는 생고기를 내민다 해도 나는 먹었으리라.
하지만 처음 입 안에 넣어 본 설익은 돼지고기는 소고기보다 야들야들하며 부드러웠고, 고기가 머금고 있던 육즙은 씹을 때마다 입 안에서 팡팡 폭죽을 터뜨렸다. 설익은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었다니. 기생충이고 뭐고 , 앞으로 돼지고기는 무조건 덜 익혀 먹어야겠어! 이 맛을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설익은 돼지고기를 전파하리라! 나는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을 하며 피터가 주는 대로 고기를 집어삼켰다.
피터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여자애를 흐뭇하다는 듯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저 의미 없는 다정함... 의미 없는 다정함은 죄라고!
피터는 내가 고기를 먹어치우는 족족 접시에 고기를 리필해줬다. 그러면서 끈질기게 ‘fuck you’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궁금해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양볼 가득 돼지고기를 넣은 채 짧게 말했다.
“씨발.”
그 말을 익히기 위한 잠시의 정적.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피터와 제이제이는 동시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뻗으며, 축구 공격수가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듯 외쳤다.
“씨이봐아알!!”
늦은 밤, 눈 쌓인 스키장 셰어하우스에서 자랑스럽게 울려 퍼진 한국어 욕과 웃음.
설익은 돼지고기와 겉바속촉의 감자구이. 약간의 맥주.
들뜬 분위기 탓인지 맥주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그날 밤 잠들기 전, 나는 입을 다문 채 ‘응’ 하는 피터의 입꼬리가 자꾸 생각났고, 피터가 손수 만든 돼지고기와 유례없이 유쾌했던 ‘씨발’의 잔상이 떠올라 키득키득 웃었다.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나는 피터와 제이제이도 참석하기로 한 New Year’s Party를 기다렸다.
타미 역시 피터 때문에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