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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Dec 04. 2020

칠리수프 Chili Soup

미국 스키장의 추억 3편

각종 콩과 토마토, 칠리 페퍼, 버섯, 양파, 샐러리. 피망. 마늘 등의 야채와 향신료를 함께 넣어 푹 끓여낸 칠리수프.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감자 수프나 양송이 수프처럼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지만, 내가 일했던 미국 스키 리조트 카페테리아에서는 가장 인기 많은 메뉴 중 하나였다.     


추운 곳에서 스키 여정을 마치고 들어온 사람들은 칠리 수프와 감자튀김을 시켜서 언 몸을 녹이고 떨어진 열량을 채웠다.     


손님들이 칠리수프를 한 볼 가득 담아 후루룩 대며 먹을 때는 꽤 맛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나에게 칠리수프는 전날 김치부침개를 먹고 토한 것 같은 비주얼처럼 보였고 냄새와 맛마저 위산 넘어온 듯 시큼해서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카페테리아에서 일할 때는 배달된 칠리 수프를 맛보고는 매니저한테 수프가 상한 것 같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매니저는 수프가 이상하다는 내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내려와 칠리수프를 맛보더니, “이상하긴 하네. 이상할 정도로 아주 맛있어.”라며 웃고는 다시 올라갔다.      


이 시큼하고 텁텁하고 짠 게 맛있다고?

아니, 것보다 상한 게 아니란 말이야? 원래 이런 맛이라고?

칠리수프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일하는 나의 낯선 감정만큼 낯설었다.


카페테리아에서 일할 땐 그곳에 있는 모든 음식이 공짜였지만 나는 칠리수프는 먹지 않았다.       

하지만 스키 대여소에서 일했던 피터와 제이제이는 종종 칠리수프를 먹기 위해 카페테리아에 들렀다. 카페테리아와 스키 대여소는 같은 건물의 한층 차이여서,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서로 왔다 갔다 하며 무료한 시간을 때웠다.     


카페테리아는 모든 음식이 공짜인 특혜가 있는 반면 혼자 일해야 해서 너무 심심했고, 스키 대여소는 일은 힘들어도 여럿이 일해서 재미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같은 알바인데도 대여소에서 일하던 아이들은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했기 때문에 대여소에서 일하던 아이들이 오면 나는 내가 먹으려고 빼놓은 음료를 주거나, 내 팁에서 돈을 빼서 수프를 사줬다. 내가 대여소로 내려가면 아이들과 고무줄 총놀이를 하거나 스키를 갈아 신는 벤치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했다.      


새해를 하루 앞둔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기 위해 대여소로 내려갔다.      


때마침 다른 사람들 없이 피터만 혼자 앉아있었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녁에 있을 파티를 기대하며 피터 옆에 앉아서 평소처럼 얘기를 꺼냈는데, 그 날 따라 피터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항상 내가 말 걸기도 전에 먼저 농담을 던지고 장난을 걸던 피터였는데, 그 날은 내가 묻는 말에도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더니 금방 자리를 피해 버렸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나? 매니저한테 한 소리 들었나?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자리를 피해버린 피터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이 끝나고 함께 대여소에서 일하는 M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지만, 별 일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찜찜한 마음도 잠시, 그 날 저녁에는 New Year’s Party 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해 전날 다 같이 모여 카운트다운을 하고, 12시가 되는 순간 샴페인을 터뜨리며 “Happy New Year!”라고 외치는, 그 미국 영화에서만 보던 일을 직접 경험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름 한국에서 가져온 옷 중에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고, (그래 봤자 청바지에 니트였지만) 시린 눈밭에 태닝 되어 버린 얼굴에도 화장을 하고 나의 추억의 현장이 될, (될 거라고 믿었던) 바(Bar)로 향했다.      


항상 한가했던 바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스키장 근처의 집들은 대부분 잘 사는 사람들의 별장으로, 여름에는 비어 있다가 겨울에 하나둘씩 차기 시작한다더니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즌을 즐기러 온 것 같았다.      


바를 가득 채운 크리스마스 장식과 새해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찬 사람들.

그 사이에서 우리끼리 모였을 때의 묘한 동질감, 바를 가득 채운 흥겨운 팝송과 맛있는 음식과 술이 주는 가벼운 흥분까지 겹쳐 그 날의 바는 달뜬 열기로 자욱했다.


함께 일하던 친구들이 모두 도착하고, 우리 지점 아닌 다른 지점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와서 인사를 나눴다. 우리 지점에는 동양인이라고는 나와 M 밖에 없었는데, 다른 지점에는 또래의 동양인 여자애들이 있어서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시작이 지나자 처음에 북적북적하던 흥분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삼삼오오 친한 사람들끼리 여기저기 흩어져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됐다.      


12시가 되는 순간 피터 옆에 앉아서 새해를 함께 맞이하고 싶다는 흐뭇한 계획(?)을 세운 나는 인파 속에서 피터를 찾기 시작했는데, 피터는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몇 분을 헤매고 다니던 와중에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 돌아보니, 제이제이였다.

안 그래도 잘 생긴 배우 같은 얼굴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조명이 반짝이는 배경 속에서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제이제이는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으니 잠깐 같이 나가서 바람을 쐬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드에서 남녀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장면은 항상 복잡한 파티에서 벗어나 테라스에 바람을 쐬러 나온 남녀에서 시작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나는 마지막까지 눈으로는 피터를 찾으며 제이제이를 따라나섰다.      


제이제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Listen.”     


제이제이는 항상 말을 꺼낼 때, 이렇게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꽤 매력적인 말투였던 것도 같지만 고딩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Listen and repeat.” 하는 영어 테이프가 생각났었다.


그날도 속으로 ‘Listen and repeat.’을 되뇌고 있는데, 제이제이가 말했다.      


“I want you to take care of me, tonight.”     


머릿속에서 빠르게 해석이 이루어졌다.      


* 주어 want 목적어 to V : 주어는 목적어가 V를 해줬으면 좋겠다.    

* take care of : 보살피다      


“오늘 밤 니가 날 보살펴줬으면 좋겠어.”     


지금 생각하면 그 문장의 의미는 빼박 남녀상열지사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여고, 여대를 다니다 미국으로 와서 연애세포의 활성화가 덜 된 데다 눈치마저 더럽게 없었던 나는 문장을 직역했다.     


‘보살펴 달라고? -> 왜? -> 어디 아픈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의식의 흐름이지만, 정말 솔직하게 저 때는 저렇게 생각했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이제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아프냐고 물어봤다.     


제이제이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고, 그게 아니라, 지금 니가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자기를 take care of 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해서 얘기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자기와 함께 지금 집에 가자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니네 집에 가자고? 나 카운트다운해야 되는데? 피터는 어쩌고?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안 돼. 나 태어나서 처음 하는 카운트다운이란 말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라며 단호박으로 대답했다.     


제이제이 얼굴을 스치던 그 복잡 미묘한 표정.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 해석이 되던 그 표정. 아... 미안하다. 제이제이... 하지만 그때 알아들었어도 유교걸인 나는 절대 같이 못 갔으리라.      


나는 제이제이에게도 집에 가지 말고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자고 얘기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12시까지 10분 정도까지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져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우리 직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곳에는 한 달 동안 함께 일하며 익숙해진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고, 피터가 있었다.


모두가 나를 반겨줬다.

“어디 갔었어? 이제 곧 카운트다운인데.”     


나는 나의 발칙한 계획처럼 피터 옆에 서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9. 8. 7. 6. 5. 4. 3. 2.... 1! HAPPY NEW YEAR!”      


샴페인이 터졌고, 사람들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옆에 있는 친구들과 포옹을 했고, 연인들은 키스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 피터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확 잡아서 '들었다'. 말 그대로 내 몸은 공중에 대롱대롱 들. 렸. 다. 우리 직원 중 키가 2미터가 되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나를 잡아들고는 해피 뉴 이어를 외친 것이었다.


10살 이후로 누가 내 몸을 통째로 들어 올리는 경험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고, 나의 당황한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에는 피터도 있었다.

     

곧 땅으로 착륙한 나는 피터에게 늦지 않게 해피 뉴 이어라고 얘기하고 그곳 사람들이 흔히 하듯 비쥬도 했지만, 이미 땅꼬마 같은 이미지가 되어 버린 나의 비쥬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충격 1. M에게 제이제이가 자길 돌봐달라고 나한테 얘기했다고 했더니, ‘자자.’라는 의미였을 거라고 했다. 그 순진한 얼굴로? 믿고 싶지 않았다.      


충격 2. 출근을 했는데 다른 지점에서 일하는 동양계 여자아이가 놀러 왔다.

약간 들뜬 얼굴로 제이제이를 찾기에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사실 우리 어젯밤에 키스했어.”라고 말했다. 아.. 그렇다면 나한테 자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니까 다른 여자애한테 키스를 했다는 얘기?     


충격 3. 지난밤에 타미와 피터가 잤다는 소문이 퍼졌다.

알고 보니 타미는 피터에게 내내 관심이 있었고, 그 날을 기회삼아 피터를 꼬신 것 같다고 했다. (브라우니를 가지고 나를 비웃었던 그 타미! 말이다) 타미는 내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세 명의 남자들과 잤다. 훗날 타미가 약간 뻐기듯 나에게 말했다.

“첨에는 제이제이가 잘 생겨서 좋았는데 갈수록 피터가 더 귀엽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얄밉다.      


충격 4. 샐리 아줌마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어제 제이제이랑 무슨 일 없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예전에 샐리 아줌마가 제이제이와 피터 중에 누가 좋냐고 물어봤을 때 제이제이라고 했던 말을, 12월 마지막 날 제이제이에게 얘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이제이한테 여기 여자애들 중에 누가 좋냐고 했더니 너라고 대답했다고 했단다.  

“둘이 서로 좋다고 했는데, 왜 아무 일도 없었어?”

샐리 아줌마가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 아니라고요.. 아줌마..

그건 3주 전에 물어본 거잖아요.

피터한테 마음이 옮겨간 게 언젠데..     


그러더니 샐리 아줌마가 잊지 못할 말을 했다.

“피터가 그 얘기 듣고 좀 삐진 것 같더라고.”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 날 낮에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자리를 피하던 피터.

평소에 좋다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자기를 ‘돌봐’ 달라고 했던 제이제이.      


피터의 입장에서는 내가 제이제이가 좋다고 해놓고 왜 자기한테 자꾸 이러나 싶었을 거고,

제이제이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자기를 좋다고 해놓고 왜 거절했나 싶었을 거다.      

이 모든 것이 알바생 러브라인 긋기를 하며 무료한 일상의 즐거움을 찾던 정직원 아줌마의 오지랖 때문이라니...     

그 뒤로, 우리는 그냥 말 그대로 저스트 프렌드로 지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 일하던 중에 피터와 제이제이가 미국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시즌이 끝날 때까지 같이 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쉬는 날에 장난 삼아 카페테리아 술을 훔쳐서 스키장에서 마시다 들켰다고 했다. 장난으로 한 일이었지만 매니저에게 발견되는 순간 ‘절도’가 된 데다 자기 나라에서는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못 마시는 나이여서 일이 커졌다. 둘은 워킹 비자를 뺏기고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그 날따라 나는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둘에게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짧은 짝사랑의 역사는 끝났다.




시간이 흘러, 반팔을 입고 스키를 타도 될 만큼 따뜻해진 어느 날,

나는 문득 칠리수프를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주문하듯 칠리수프를 가득 푼 접시 옆에 바짝 튀긴 감자튀김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콩과 야채가 가득한 칠리수프를 한 스푼 가득 떠서 입안에 넣었다.

토하고 난 다음 날 넘어온 위산처럼 시큼하게만 느껴졌던 맛이 풍부한 향료의 감칠맛으로 느껴졌다. 평소에 싫어하던 콩의 담백함도, 칠리의 매콤함도, 푹 퍼져 입안에서 녹듯 사라지는 야채의 식감도 모두 ‘호’였다.


이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그동안 그곳 음식들을 먹으며 입맛이 적잖이 변한 게 분명했다.      


나는 한 볼 가득 펐던 칠리수프와 감자튀김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와서 콜라와 함께 칠리수프를 먹던 아이들을,

이상하게 꼬여서 제대로 된 로맨스 장면 하나 만들어 내지도 못했지만 유쾌하고 즐거웠던 우리의 추억을 떠올렸고,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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