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우중충했다. 회색빛으로 가득한 구름에 가려 하늘은 자신의 색을 잃어버렸다. 비가 내렸다. 비는 바람과 함께 온 세상을 씻어내려 갔다. 비는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더니, 어느새 모여 강물이 되었다. 수위가 높아진 하천은 사납게 물을 흘려보냈고, 숲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램프가 깜빡거리다 켜졌다. 나는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시야를 방해했다.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뭐였더라? 아, 그래. 이것을 정리하고, 저것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그것을 하러 가기로 했었지. 생각과 달리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이렇게 앉아 있고 싶었다. 조금 더 앉은 채로, 이렇게 가만히 앉은 채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빗속에 잠긴 세상을 바라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로, 어떠한 걱정과 고민도 생각하지 않은 상태로,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