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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미소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서

by 권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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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봉고차를 몰고 새마을금고에 갔어요. 일을 보고 난 후에 차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꿈적도 하지 않는 거였어요.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 불만 들어오는 거였죠. 몇 주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견인을 요청했다가 곧바로 시동이 걸려 없던 일로 처리했어요. 하지만 어제는 그 후로도 전혀 반응이 없자 견인차를 부를 수밖에 없었죠.

영흥 공업사에 도착하자 처음 본 정비사는 이것저것 물었어요. 시동이 걸린 상태에서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는지, 시동이 꺼진 상태에서 경고등만 들어온 건지요. 내 말을 듣고 난 후에 그분은 발전기보다는 스타트 모터가 문제인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후 늦게 차를 찾으러 갔을 땐 ‘인히비터 스위치’가 고장났다고 하는 거에요. 스타트 모터가 고장이 나면 기어가 P에서도 빠지지만 그 스위치가 망가지면 기어가 P에 묶여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거죠.


만일 스타트 모터가 망가졌다면 20∼30만원 수리비가 나올 뻔했어요. 다행히 그 스위치가 망가져 부품비 21,000원과 공임비 50,000이 나와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처리했어요. 뭐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즉시 생각해 보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데 내일로 미루는 게 더 큰 문제가 생기는 원인이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81쪽)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말이에요. 아픈 환자가 건강한 앞날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내일 하도록 악마가 그 마음을 종용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행동도 못하게 되고 점차 그런 의식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는 거죠.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악마 윔우드를 통해 인간을 유혹하고 속여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걸 막는 방법이 그런 거라고 하죠.

이 책에는 그와 같은 편지 내용이 31개가 담겨 있어요. 각각의 편지마다 주옥같은 글과 날카로운 성찰이 담겨 있죠. 이를테면 악마는 종교 지도자가 대의명분으로 삼아 그럴듯한 일을 추진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주님을 이용하려는 교묘한 마음이 녹아 있다는 거죠. 악마는 교회를 사회 정의의 수단으로 삼게 하지만 참된 진리와 논리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거예요. 악마는 자기 의지로 마음을 추스른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도하도록 부추겨 진솔한 기도조차 방해한다고 말이죠.

이 책은 그만큼 악마의 삶을 고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려는 거에요.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헤쳐주고 있는 거죠. 악마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와는 상대도 안 되는 존재임에 분명하죠. 하지만 크리스천이 품고 있는 생각 속에 악마가 어느 감정선까지 자리 잡고 유혹하는지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마13:5-6)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죠. 우리말 ‘돌밭’은 헬라어로 ‘페트로데스’(πετρώδης)로 ‘바위가 가득 찬 땅’을 뜻해요. 밭에 흙이 있지만 그 밑에 바위와 같은 큰 돌이 내려앉아 있는 밭이죠. 그런 밭은 씨앗을 뿌릴 때 싹이 나오긴 하지만 뿌리가 없어 금방 말라버리죠. 사경회나 부흥회 때 가슴이 뜨거워지지만 예배당 문밖을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다투고 고함치는 모습이 그렇죠.


물론 더 심한 경우는 그것이죠. 종교 지도자가 특정 정치 세력과 야합하여 집회를 벌일 때 누가 봐도 종교를 수단으로 삼은 어긋난 행동임을 아는데, 그걸 느끼기만 할 뿐 올바른 행동을 보이지 못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는 거죠. 왜 그럴까요? 그 심령의 밭에 이미 큰 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좀체 깨부수고 나올 결단력이 사라진 거겠죠.


C.S.루이스의 그 책에 그 이야기도 참 감명 깊었어요. 유명한 신사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남은 인생을 올곧게 살고자 다짐을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배가 고프니까 점심을 먹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는데, 배가 부르니까 또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며 집으로 갔다고 하죠.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이 나이에 인생길을 바꾼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 집에나 가자.” 그때 악마가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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