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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칸 있는 말이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어령의 3주기에 나온 어록집 〈이어령의 말〉을 읽고서

by 권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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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죠. 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요. 엄청난 빚더미에 앉았어도 채권자들 앞에서 진실하게 말한다면 동정심은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와 같은 것이죠.


커피를 마셔도 누군가는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고 카페라떼나 카라멜마끼야또를 마실 수 있죠. 중요한 건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보다 상대방과 어떤 말을 하는가죠. 아무리 맛있는 커피를 마셔도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그 커피는 죽을 맛이겠죠. 하지만 건강에 안 좋은 커피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말을 하면 그 커피는 환상적인 맛으로 기억에 남겠죠.

“빈칸이 있어야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빈칸 없이 정확하게 말하면 끌어들이는 힘을 못 가져요. 사용 설명서나 안내문을 봐요.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지.”(304쪽)


이어령의 3주기에 맞춰 나온 어록집 〈이어령의 말〉에 나온 말이에요. 빈칸이 있어야 독자들이 생각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죠. 말도 상대방에게 생각할 틈을 주는 게 좋다는 것이고요. 허점으로 보이는 말이 때론 백 점보다도 더 귀한 창의성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꽉 찬 타임라인의 삶에 쫓기기보다 여백이 있는 삶이 훨씬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이니까요.


그만큼 말은 그냥 전달되는 게 아니겠죠. 그 사람의 마음에 닿아 씨앗이 되고 싹이 나고 자라 번식하는 것이겠죠. 그 말이 사람의 심령이 박히면 인생이 달라지고 삶의 철학도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요. 씨가 좋은 밭에 떨어지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좋은 말도 한 사람의 인생에 좋은 결실을 맺는 원동력이죠.

이 책은 그가 평생 연구한 인간·문명·예술·언어·종교 등 아홉 가지 주제를 묶은 거예요. 처음부터 차례로 읽기보다 마음 닿는 대로 주제를 골라 읽으면 정수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거에요. 그만큼 이 책은 단순한 어록집 그 이상이에요. 그가 남긴 어록을 통해 누구라도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은 우리 곁에 남을 지적 유산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삶의 이정표라 할 수 있을 거예요.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7∼8)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록이죠. 하나님나라의 비유에요. ‘가시떨기’로 번역된 헬라어 ‘아칸타’(ἄκανθα)는 ‘가시’(thorn) ‘가시덤불’(bramble)이죠. 이스라엘은 건조해서 농경지 주변에 가시떨기가 많았는데 주변 식물들조차 가로막았다고 해요. 셀시우스(Celsius)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시떨기가 열여섯 종류가 있었다고 하죠. 포터(Porter)는 게네사렛 평원의 엉겅퀴가 너무 크고 무성해서 말도 지나갈 수가 없었다고 하고요.


그런 밭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날지라도 가시떨기에 기운이 막혀 자랄 수가 없는 법이겠죠(창3:18,사34:13,호9:6). 예수님은 그 어록을 말하면서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에 대해 일깨워줬어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세상 향락에 빠진 자들의 마음이 그런 밭이라고요. 그만큼 누군가 소중한 말을 해줘도 자기중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뜻이죠. 어찌 거기에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어령의 어록에 그런 말이 나와요. ‘수’를 받고 좋아하는 아이보다 ‘가’를 받고 그 뜻이 무엇인지 묻는 아이가 좋다고요. 혼자 산속을 헤매다가 ‘심봤다’고 외치는 심마니의 소리를 들으며 살라고요. 한밤중인데도 아프고 슬퍼서 불을 끄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사는 게 좋다고요.

이어령이 일펑생 그런 심정으로 질문하고 말을 하고 글을 써오지 않았나 싶었어요. 그러니 그가 남긴 어록이 얼마나 진귀한 보석과 같은지 알 수 있겠죠. 앞으로도 그의 어록은 누군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그들의 인생에 소중한 열매를 맺기에 충분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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