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담도담 Apr 19. 2020

그러니까 쓸래요

글과 함께 차곡차곡



좋은 시절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지겨운 나날이고 사는 게 엉망진창이라고 투덜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때가 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돌아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라고. 

좋았던 시절은 그 무렵엔 느낄 수가 없지만, 

한 시절에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새삼 좋은 말이었음을 알려주어 고맙고 서글프게 한다. 


이도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위즈덤하우스, 2019, 288쪽





소설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은,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은 한순간을 오래 기억하는 것 같다. 

사진처럼 한 장면을 기억하거나 앞뒤 서사까지 한꺼번에 기억하거나, 어느 쪽이든 그 기억을 내면에서 되새김질하며 반짝이게 닦아간다. 그것이 언젠가 다른 무언가와 만나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끝없이 이야기가 샘솟는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는 이도우님의 그런 아름다운 찰나를 엿보는 듯한 글이었다. 



내가 산문집을 낸다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흘러간 과거의 기억들과 마음들을 하나둘 꺼내 소중한 듯이 무심한 듯이 들여다보며 지금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작가님의 살그머니 가슴에 안겨 오는 아름다운 문장과 나의 이리저리 덜컹거리고 비뚤어진 문장은 비교도 안 되지만, 언젠가는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꿈을 꾸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니까. 좋은 일이니까. 




나는 글밥 먹는 사람답지 않게 기억력이 굉장히 안 좋다. 

어제 뭘 했고 뭘 먹었는지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 친하게 지냈으나 인연이 끊긴 모 웹툰 작가님은 기억 주머니가 따로 있는 것처럼 예전 일을 잘 기억했고, 만화와 글에 잘 녹여 냈다. 손에 연필과 공책을 쥐고 태어나 순간순간을 다 기록하면서 성장한 것도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기억력이 뛰어날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과거가 새하얀 백지에 가까울까. 한때는 부럽고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어렴풋이 안다. 그런 분들도 0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을 전부 다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겪은 일이 인상적이었기에 기억한다는 것을. 


얼마나 재미없게 살았는지, 가장 추억이 많다는 고등학생 때나 자유를 누린다는 대학생 때 기억도 없는 나지만, 그보다 더 어렸을 때의 인상적이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가지고 있다. 창작가들이 엮어내는 글과 그림 역시 이런 기억의 파편이리라. 


글이란 참 신기하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조악한 문장이라도 하나둘 엮어 과감하게 내놓기 시작하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일이 하나둘 떠올랐다. 마치 '다음에는 나! 나를 잘 요리해서 글을 써 줘!'라고 외치듯이. 


그렇게 떠오르는 일들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억도 있다. 대충 '아마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덩어리로만 기억했던 사건의 세부까지 생각나는 바람에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껴 얼마 전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차라리 생각나지 않는 게 나았을까? 되지도 않는 글을 쓴다고 괜히 기억을 헤집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릴 필요가 있을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직은 이 의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아무리 불쾌하고 괴로운 일을 겪었더라도 그때의 경험과 감상이 모여모여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면 느낌이 다르다. 왜냐하면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 나는 내 눈에 썩 괜찮고 능력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 더 대단해질 사람이거든. 내 삶, 그렇게 나쁘지 않았거든.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더라도,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계속 글을 쓰고 싶다. 

혹시 아나, 이러다가 전생의 기억까지 떠오를지? 오오, 재밌겠다. 




작가의 이전글 공부 열심 우리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