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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도담 Apr 16. 2020

공부 열심 우리 엄마


요즘 우리 엄마는 공부에 여념이 없다. 불경을 사경하고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불교를 공부한다.


아마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와 만나 입문한 것으로 아니, 불교와 엄마의 인연은 나름 깊다. 법륜스님이 이끄시는 정토불교대학 1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불교는, 가정사가 단순하면서도 복잡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버거운 평생을 산 엄마가 마음 둘 곳이었다. 코로나 19로 다니던 절의 산문이 굳게 닫혀 절에 가지 못하니 외로우실 법도 한데, 오히려 공부할 시간이 늘어 즐거운 듯하다.



내가 엄마의 침실과 책상을 빼앗은 관계로 예전에 할머니가 사주셨던 마루의 건식 반신욕기에 앉아서 공부한다. 여기에서 잠깐, 내가 강탈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작업실로 쓰라고 책상을 내주셨다. 물론 내가 거부하면 좋았겠지만...큼큼.



부엌이나 화장실을 오가며 마루에서 공부하는 엄마를 보면 예전 생각이 난다.

전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귀국해서 소개까지 했을 때, 엄마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초급 일본어 강좌를 등록했다. 결혼이야 귀국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없던 일이 되긴 했지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50음도를 빼곡하게 적은 연습장과 초급 일본어 교재를 보면 목 안이, 또 가슴 어딘가가 찌르르 욱신거린다.



일본에서 헛짓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혼자서 외롭다고 한국에서도 안 하던 연애질을 냉큼 시작한 딸내미를 혼내지도 않고, 어쩌면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일본인과 더듬거리면서라도 대화를 나누겠다고 생긴 것도 괴상한 일본어를 공부하려던 엄마가 '아, 우리 엄마구나' 싶어서.

그때는 한국에서 살기 싫어서, 번역가로 자립할 길이 보이지 않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예비) 사위와 소통을 위해, 즉 딸을 위해서 돌아서는 즉시 잊어버리는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엄마를 본 순간, 엄마 곁에 평생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오빠는 나 없는 사이에 상견례까지 끝마치고 결혼할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 중인데, 어떻게 내가 엄마랑 할머니를 두고 일본에 가서 살겠나.



부모와 자식을 모시고 돈을 버느라 평생 고생한 엄마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아픈 몸을 치료도 받는다. 이제 곧 일흔인 연세가 되어서야 드디어 얻은 여유다. 한 자 한 자 경전을 정성껏 쓸 때마다 엄마가 더 자유롭고 더 평온해지기를.




그나저나 엄마는 과년한 딸내미 얼른 치우고 싶으시려나? 히히, 엄마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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