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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도담 May 04. 2020

팍팍 비벼서 팍팍 먹는 비빔비빔국수

한 끼 식사와 차곡차곡




 오늘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우체국에 다녀왔다. 느릿느릿 걸으면 편도 15분 거리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우체국이다. 날도 덥고 부칠 짐도 있으니 버스를 타고 가면 딱 좋겠는데, 대도시처럼 너그러운 교통편이 아니어서 버스가 없는 길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짐을 부치고 비빔국수를 먹으려고 전날부터 계획을 세워둔 덕분이다. 집밥을 안 좋아하는 나는 외식하면 보통 기분이 좋다. 


 동네 우체국 건너편에 4년인가 전에 생긴 국숫집이 있다. 

 최근 나온 역서인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좋은 책입니다. 사주세요. ^^)에서 아키코가 운영하는 식당과 대충 비슷한 크기일까.  인테리어도 아키코의 식당처럼 하얗고 깔끔한데, 주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좀 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4인용 테이블이 네 개, 창가의 바 테이블이 네 석.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김밥의 단출한 메뉴를 파는데, 여름이면 차가운 국수가 추가된다. 여름에 간 적이 없어서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기억하기론 월요일에 쉬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열려 있었다. 한동안 이쪽 동네에 안 왔으니 그사이 휴일이 바뀌었나 보다. 우체국으로 들어가면서 국숫집에 눈도장을 찍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먹어줄게, 나의 귀여운 비빔국수!'


 연휴 지난 월요일이어서, 안 그래도 좁은 우체국이 더 비좁아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다른 때보다 오래 기다려서 부치고 나와 행복하게 건널목을 건너갔는데!

 창 너머로 보이는 실내가 꽉 차 있었다. 그것도 이제 막 자리에 앉았는지, 테이블 위에 물잔과 수저만 놓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원래는 여자분이 요리를 하고 남자분이 홀을 맡았는데, 밖에서 지켜보니 여자분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식과 서빙, 계산, 자리 정리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손님은 오고 주문은 밀리고, 그사이 손님이 더 오니까 주문은 더 밀리고. 


 나는 허기졌다. 아침 겸 점심으로 국수를 먹을 생각이어서, 일어나서 아침 루틴을 마치자마자 나온 것이었다. 밖에 오도카니 서서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원래 아무리 맛집이어도 기다리지 않는 성격이다. 같이 간 사람이 있으면 수다라도 떨며 기다리면 되지만 오늘은 아닌걸. 

 잠시 앞에 서서 고민하던 나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 국숫집에서 도보 10분 떨어진-또 마침 집으로 가는 길- 상가 1층에 있는 국숫집이 생각났다. 


 이쪽은 요즘 스타일의 식당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믿고 먹는 동네 식당 같은 분위기다. 

 재래시장에 가면 있지 않나. 벽과 테이블에 기름때가 묻어나고, 차림표 글씨는 큼지막하며, 아저씨들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아줌마! 비빔 하나 칼 하나!"라고 외치는 그런 식당. 자주 찾는 사람에게는 친숙한 고향 같은 곳이지만 처음 발을 들이는 사람에게는 왠지 선뜻 발 들이기 어려운 뒷골목 같은 그런 곳.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데, 늘 사람이 붐볐기 때문이다. 긴 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두 명 앞에 서 있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특히 연세 좀 있으신 분들이 많이 찾았다. 그럼 뭐다? 맛집이지. 하지만 줄이 길다? 그렇다면 안 간다. 

 만약 여기도 자리가 없으면 돈가스를 먹을 생각이었다. 


 자, 오늘 시작이 과연 국수가 될 것인가, 돈가스가 될 것인가. 

 기대 반 포기 반이 뒤섞인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더니,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한 사람이 앉을 자리가 있었다. 오늘은 국수로운 날이로구나!

 나는 기쁘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마치 몇 번 왔던 사람처럼 자리에 앉기도 전에 외쳤다. "비빔국수 하나요!"

 

 이 식당 역시 바빴다. 근처 상가 주인이나 아파트 주민이 포장까지 하러 와서, 사람은 계속 들락날락하고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서빙과 전화와 계산, 포장을 한 분이 했는데 어쩌면 손길이 그렇게 빠른지. 내가 앉자마자 물과 컵이 나왔고 수저통이 등장했으며, 곧 열무김치와 국물이 나왔다. 잠깐이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척척 움직이고, "김치 좀 더 주세요." "여기 수저통이 없어요" "포장될까요?"라는 돌발 상황도 막힘 없이 해결했다. 무림 고수 같은 그 속도감에 감탄하는 사이, 내 앞에 불그스름한 비빔국수가 나타났다. 


  사실 매운 걸 잘 못 먹는다. 요즘 말로 맵찔이다. 그런데도 국숫집에 가면 꼭 비빔국수를 먹는다. 젓가락을 휘휘 저어 오이나 열무김치 고명과 국수를 함께 잡고 입에 넣는 순간 혀에서 느껴지는 그 매콤함이란! 

 입에서는 "아, 매워!"라고 외치고 위에서는 "야, 위장 좀 챙기라고!"라고 외치지만, 내 뇌는 외친다. "한 그릇 받고 한 그릇 더!" 

  

 국수 한 젓가락, 열무김치 한 젓가락, 국물 한 숟가락. 이렇게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먹으면 세상 부러을 것이, 많지만 일단은 없다고 하자. 김치를 그다지 안 좋아하지만 비빔국수에는 역시 김치, 그것도 열무김치다. 조용히 씹으려고 해도 우적우적 소리가 나는, '나는 풀이오!'라고 주장하는 열무김치에서는 나무 맛이 난다. 혀에 남는 씁쓸한 끝 맛이 왠지 싫다가도 국물로 입을 축이고 국수를 우물거리면, 그 알싸한 맛이 그리워진다. 그러면 또 허겁지겁 열무김치를 집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그릇이 금세 바닥을 보여 아쉬워진다. 그렇다고 뇌가 외치는 대로 한 그릇 더 먹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거니와 배도 부르므로, 다음을 기약하며 입맛을 다신다. 

 


 원래 가려던 국숫집이 붐벼서, 늘 붐비던 국숫집이 마침 한 자리 남아서. 두 개의 우연이 겹쳐서 맛있는 인연이 만들어졌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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