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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도담 May 26. 2020

소심함이 세상은 못 구해도 나는 구한다

소심하지만 행복해



내가 책을 낸다면 이 제목으로 내고 싶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제목 스타일이긴 하지만,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아, 흐름을 타려고 제목을 일부러 지은 건 아니고 예전부터, 한 20년 전부터 줄곧 해오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소심함의 정도를 파악할 순 없겠지만, 나는 나 자신이 참 소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소심해서 취직할 생각도 없었고, 소심해서 온라인 게임도 못 하고, 소심해서 뭔가 배우러 다니지도 못한다. 

전화 받는 것이 무섭고, 익명성을 뒤집어쓴 인터넷 세계에서도 두려워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겁을 낸다. 


나는 작년 말까지 써브웨이에 가지 못했다. 어떻게 주문하면 되는지 몰라서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하도 써브웨이, 써브웨이 하니까 한 번은 먹어보고 싶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주문 제대로 못 했다고 때려죽일 것도 아닌데, 소심한 나는 그냥 무서웠다. 더듬거려서 바쁜 직원을 귀찮게 하는 것도 미안했다. 

주문 방법을 인터넷에 수도 없이 검색해서 달달 외워도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진 못했다. 초록초록한 써브웨이의 인테리어가 내 눈에는 이빨 뾰족뾰족한 맹수처럼 보였다.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던 아는 언니에게 내 앞에서 주문을 한 번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하는지 한 번만 확인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는 정말 나를 위해서 주문을 해주었고, 언니 옆에 바짝 달라붙어 지켜본 덕분에 이제 나도 주문할 수 있다. 

몇 달 동안은 쿠키를 추가해달라는 말을 못 해서 샌드위치만 받아 왔고, 최근 들어 쿠키를 추가할 줄 알게 되었으며 며칠 전에는 쿠키와 음료 세트를 추가할 수 있었다. 컵을 트레이에 올려주어서, 내가 알아서 따라 마시면 되는 방식이었다. 

평생 못 먹을 줄 알았던 써브웨이를 지금은 마음 내킬 때마다 사 먹는다! 이처럼 평생 못할 줄 알았던 일도 한 번 용기를 내면 이후로는 서서히, 아주 느리지만 쉬워진다. 


나는 용기를 낼 때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써브웨이도 3년 넘게 먹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낸 것이다. 끝까지 용기가 안 나면 그 대상은 그냥 내 인생에 없는 것이다. 

참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고민을 하며 사는 셈이다. 내 이런 소심함이 주변 사람을 속 터지게 하고, 내 커리어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은 한다. 성격을 좀 바꿔보려고 고민한 적도 숱하다. 


아무리 무섭고 두렵고 겁나더라도, 세상을 살면서 하기 싫은 일을 전부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인 번역도 결국에는 사람과 어울리면서 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출판사 대표나 편집자와의 관계는 자연히 따라온다. 다행히 출판 관계자는 저자나 번역가의 성향에 맞게 잘 배려해주는 분들이어서 이쪽 분야와의 만남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내가 만나고 싶다고 먼저 운을 띄울 때도 있다. 

꼭 출판 쪽 만남이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에 던져지면 '잘'은 못해도 그럭저럭해내긴 한다. 전화라면 파르르 떨면서 싫어하는 주제에 건강보험료가 말도 안 되게 나왔을 때는 앞뒤 잴 것 없이 공단에 전화부터 건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것은 최소한 생계나 목숨에 지장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일이든 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할 줄 아는 게 낫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생계나 목숨이 걸려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의든 타의든 해내니까 제외하고, 다른 사안들 중에 도저히 못하겠는 일이 있다면? 하려는 상상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면? 간이 쪼그라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해야 할까? 

나는 안 하고 싶다.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막막한 상황에 놓인 적은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내 소심한 성격이 아직은 싫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싫지 않을 것이다. 

소심하면 소심한 대로, 용기가 날 때까지 아량 넓은 마음으로 나를 온전히 지키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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