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사용하는 '교수님'이라는 칭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나도 대학에서 나를 가르쳐주시는 분을 늘 교수님이라 불러왔다. 실제로 '교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는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치는 사람, 대학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대학사회에는 엄연한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에 따라 정교수, 조교수, 초빙교수, 강사 등으로 등급이 나뉜다. 그에 따라 나는 강사에 속한다. 가끔 이 사실에 위축될 때가 있고, 그로 인해 강의실 내에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칭호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사장님'이라 부르고, 대학에서 나를 가르쳐주시는 분을 '교수님'으로 생각했다. 직급이 교수가 아니니 교수님이라 칭하지 말고 '선생님'이라 불러달라고 말씀하신 교수님도 계셨고, 정교수인데도'선생님'이라는 칭호가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게 그런 계급장은 상관이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떤 선생님을 '교수님'이라고 꼭 부르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그건 그 선생님의 열정과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분명 다들 나의 생각과 별 다를 바 없었으리라 본다. 적어도 내 주변 친구들은 그랬다. 학생의 시점에서 나는 세 유형의 교수님(교수 + 강사) 들을 보았다.
1. 자신의 학문적 깊이만을 추구하는 유형.
2. 유유자적 강의를 마치고 여유롭게 귀가하는 사모님 유형.
3. 학생에게 무한한 애착을 갖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유형.
그리고 이젠 학생이 아닌 교사로서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나의 선후배, 동료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보인다. 사실 난 2번 유형의 교수님이 되고 싶었다. 워라밸을 지키며 품위를 유지하는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비-생계형 교수님이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1번 유형을 선택한다. 나 역시 교수님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없다고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길만을 고집하자니 학생들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한다. 그 모습이 애처롭다. 진로문제로 불안해하는 학생들의 어두운 표정과 마주하면 과거의 내 고민이 풀리지 않은 것 같고, 그 고민을 내가 풀지 못해 후배들이 같은 상황을 마주한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든다.
비인기과목, 인문학의 위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3번 유형의 교수님은 쉽게 만나볼 수 없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은 자신의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에 만나보기 어렵지만, 함께 몇 마디만 나누어도 기운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학생의 성장을 위해 시간, 열정을 아끼지 않는 유형의 교수님에게는 존경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치 경지에 이른 듯한 이들에겐 특별함이 묻어난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인문학의 의의에 대해 고찰해 보니 내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쉬워졌다. 인문학은 누군가의 삶에 빛을 주는 일이라는 그 단 하나의 사실만을 의지하며 가면 될 것이다. 나만의 학문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도 교수트랙의 지름길이라 중요하겠지만 내겐 학문이 사람과 맞닿아있지 않다면 공허하다.
파우스트 박사가 서재를 박차고 나간 것도, 결국 이와 같은 이유에서가 아니겠는가.
사실 아직 학생 앞에서 "나는 강사다"라고 당당히 말할 배짱이 없다.
하지만 언젠간 누군가처럼 '저는 교수가 아니니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십시오'라는 말에 부끄러움이 전혀 묻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학생의 성장을 위하는 것만으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학생들이 진정한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진정한 교육자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