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토론인가?
6. ‘남한산성’은 너무나 잘 알려진 병자호란 당시 정국을 그린 영화입니다. 사실 병자호란은 영화화하기에 큰 매력이 없는 소재입니다. 치열한 군사적 대립이 있기보다는 남한산성에서의 포위 상태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화는 ‘말’에 집중합니다. 척화론의 김상헌, 주화론의 최명길이 인조를 앞에 두고 대립하는 장면은 단순한 연기 대결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그 내용적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 분명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국의 정세는 명과 청을 두고 선택해야 하는 조선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김상헌은 죽음을 각오할지라도 명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명길은 죽음 앞에서 명분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명분은 외교 협상, 국제 조약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 지금,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은 대한민국이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7. 그러나 김상헌과 최명길의 토론에서 명확한 승자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인조는 두 신하의 손을 번갈아 들어줍니다. 그것은 탕평책보다는 미봉책에 가까웠습니다. 조선 군대가 승전보를 울리니 척화를 내세우다가, 남한산성이 공격받고 나서야 화친을 수용하니 말입니다. 인조 본인의 철저한 판단 아래 내린 결론이 아닌, 외부 정세에 따라 출렁거리는 결정과 같았습니다. 인조의 잘못은 분명 있지만, 병자호란의 책임을 모두 그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자리는 누가 앉아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금 토론의 한계를 확인합니다. 토론 하에서는 끊임없는 견제 탓에 어떤 정책에 대한 맹신이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전시(戰時)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자멸의 지름길이 될 우려도 있습니다.
8. 그러나 이러한 우려가 토론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토론의 가능성은 내용적 측면이 아닌 형식적 측면에서 살펴야 합니다. 인조는 왜 김상헌과 최명길 사이를 오갔을까요? 두 신하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입니다. 둘의 설전이 선악의 대립이 아닌, 옳음과 옳음의 대립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그 방법만 달리했을 뿐, 문제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이것이 토론의 핵심적인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합의하는 것, 이것이 토론입니다.
9. 뻔한 말인가요? 그런데 사회는 이상하게도 이 뻔한 법칙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악의 대립 구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들은 최명길을 만고의 역적이라며 그의 목을 치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정치인들은 자신과 입장을 달리하는 의원을 악인처럼 몰아가며 사퇴를 운운합니다. 앞서 언급한 기존의 사극 영화나 히어로 영화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이유 역시, 한쪽을 악으로 상정하고 이를 처단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를 물고 뜯지 않습니다. 화친 이후 최명길은 인조에게 김상헌을 꼭 가까이 두라고 말합니다. 서로의 옳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적대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10. 옳음과 옳음에서 토론의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사회를 배로 비유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암초에 부딪힌다면 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방향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배를 모두 잘 움직여 보겠다는 일념 아래 있습니다. (토론에서 기회주의가 배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기회가 될 때 논증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통해 나온 결과가 어떨지라도 이는 그 일념을 실현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한 선장의 소유가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11. 여기까지가 토론에 대한 제 생각의 얼개입니다. 이후 제가 펼칠 모든 논리들은 이러한 전제 아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옳음과 옳음 (1)에서 토론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나이를 밝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왜 토론인가?’보다는 ‘어떻게 토론하는가?’에서 답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옳음과 그름은 어떻게 구분하는지, 토론에 감성이 개입해도 되는지 등의 물음이 잇달아 떠오릅니다. 생각을 정리한 뒤 다음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17.10.15.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