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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Apr 27. 2020

무지는 그의 힘

김훈 작가와 그의 문제작을 되돌아보다

* 이 글은 2017년, 한창 김훈 작가의 과거 소설이 재조명되어 논란이 일었을 때 한 기사를 보고 쓴 글이다. 


** 링크: http://www.womennews.co.kr/news/114808

기사 제목: 김훈 “여성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툴러” 발언 논란


무지는 그의 힘


           최근 김훈 작가가 SNS 상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2005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언니의 폐경>에서 드러난 여성의 생리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50대인 두 자매가 자동차를 타고 길을 달리다가 언니가 갑작스럽게 생리를 한다. 김훈 작가는 이 장면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나온다’라고 말하는 언니와 그런 언니의 생리혈을 ‘팬티를 칼로 잘라내고 패드와 함께 차 뒷자석으로 던지며’ 처리하는 동생을 등장시켰다. 비단 이 글을 처음 읽고 반응한 수많은 네티즌뿐만 아니라 나도 이 글을 읽으면서 ‘불필요하게 관음적이다’, ‘생리라는 행위에 무지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나아가 생리라는 것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논란에 대해 김훈 작가는 어떻게 답했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한다.


“나는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여자를 묘사하는 데에 매우 서투르다. 여자를 생명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내 소설에는 여성이 거의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너무 서투르다. 이는 내 미숙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자에 대한 편견이나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니다.”


             사실 김훈 작가를 옹호하는 이들 중에서는 김훈 작가 특유의 ‘관음증적이고 집요한, 신체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듯한’ 문체가 그의 고유한 문학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폐경기를 겪는 두 오십 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언니의 폐경>이라는 이 작품에서도 생리하는 장면을 이처럼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이다. 궁금해서 찾아본 알라딘의 책 소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50대 두 자매가 겪는 늙어감, 남편의 떠남, 자식들의 이기심과 배신, 잔잔하지만 분명한 허무감 등을 여동생의 목소리와 시각으로 촘촘하게 교직한 작품이다. … 두 자매에게는 삶의 모든 사건들이 담담하게 지나간다. 그들은 50대 여성으로서 인생의 황혼기를 예민하지만 조용하게 받아들인다.” 김훈은 언니가 생리하는 그 장면을 표현하면서 그의 허무주의적인 시각을 덧입히려고 했다는 것이다.


             소설 전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상세한 줄거리 설명과 여러 서평을 통해 읽은 <언니의 폐경>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성과 대비되어 두 자매는 관용적이고 어떻게 보면 허무주의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에 반항하고 절망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이 둘에게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관조적이고 허무적으로 다가온다. 과연 이러한 서사 속에서 저 생리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의견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김훈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칼의 노래>에서부터 시작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김훈 작가의 건조하고 고요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지만, 약간 거북했던 부분은 이순신이 밤을 보냈던 관노 ‘여진’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순신의 목소리를 빌린 김훈은 여진이라는 여자를 ‘젓국 냄새가 나는 따뜻하고 조붓한 여자’라고 묘사한다. 이때 나의 당혹감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 대상을 저렇게 사물처럼 표현할 수 있나, 저렇게 무감각하게, 오로지 배출해 내는 욕망을 받아내는 무언가처럼 묘사할 수 있는가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김훈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했듯 그는 여자를 어떠한 인격체로 묘사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사물에 불과하게 묘사한다. 이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사람인 이들을 대상화하는 것이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것에 첫 번째로 당황했다.


             물론 오래된 작가이고, 기존의 가부장적 시선을 투영하여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성은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두 번째로 당황했다. <언니의 폐경>은 제목으로나, 내용으로나 여성이 중심이고 여성이 화자가 되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설에서 ‘여성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투르다’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콕 집어서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장면은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생리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생리를 할 때 마치 감탄하듯 아아,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나온다고 말하거나 아예 속옷을 다 뜯어서 버리지? 또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왜 동생이 나서야 하며 언니는 엉덩이를 들어올려야 하는가. 여성 화자를 자처하며 여성의 시선으로 소설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김훈 작가는 남성의 시선으로 오로지 여자가 겪는 일을 표현하는 무책임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김훈 작가에게 강한 불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그 뿐만이 아니라 한국 문단의 작가들 중 일부에게도 강한 불쾌함을 느꼈다. 기실 이러한 ‘사물화된’ 여성의 표현은 김훈 작가뿐만이 아니라 많은 한국 현대 문학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묘사이고 서사이다. 이들의 작품은 허무주의적인 관조와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문학계에서 널리 수용된다. 하지만 이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되어야 하는 것은 왜 항상 여성일까? 대놓고 말해서 변태적인 시선으로 글자 속에서 인체가 해체되며, 오감의 대상으로서만 등장하는 것은 왜 여성일까? 덧붙이자면 <언니의 폐경>에서도 김훈 작가는 생리하는 장면에 ‘물고기 냄새’라는 표현을 집어넣었다. 건조하게 성행위나 인체를 묘사하는 한국 소설의 많은 장면에서 비릿한 냄새, 달큰한 냄새, 온갖 표현으로 난자되는 여체를 본 적은 많으나 남체를 본 적은 없다. 즉 생물과 무생물을 이분법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쓰면서도, 그 과정에서 남자는 쓰이지 않고 여성의 성만 소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학 속에서 여성은 인격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문단의 중심이 되는 중년 남성의 서사에서 여성은 절대로 사물 이상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이는 예로부터 이어지고 아직도 만연한 문제이다. 영화나 문학에서 여성은 남성을 타락시키거나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어떠한 도구적인 존재로 서사에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 이야기한 대상화적 문체는 더 나아가 아예 직설적으로 존재 자체를 사물로만 소비하는 경우이다. 둘째, 이러한 서사로 여성을 문학에서 이야기하고자 할 때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통념으로 자리잡는다. 김훈 같은 작가가 여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시선으로 ‘여자’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그의 관점에 따른 여자가 더 만연해질 뿐이다.


             묘사하려고 하는 대상, 특히 자신이 화자로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조차 수반하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는 태만하고 무책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작품이 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 황순원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을 중년 남성의 작가가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나태함이 용인받을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가 무지해도 되는 자유는 결국 문단에서, 나아가 사회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권력의 일부에는 남성으로서의 권력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웹툰 중 ‘나는 귀머거리다’라는 만화가 있다. 주인공이자 작가 라일라 씨는 청각장애인인데, 웃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웃음 소리를 통제할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어떻게 들릴 지 몰라서 마음껏 웃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건청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고, 그들도 가끔 웃음소리가 우스꽝스럽게 들릴까봐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건청인들은 자신의 웃음을 통제하거나 통제하지 않을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라일라 씨가 느끼는 이러한 어려움은 젠더이슈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어려움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입장이라도 조금 더 조심할 수 밖에 없는 집단, 같은 입장이라도 다른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져야만 우리 사회가 포용적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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