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맥시멀리스트
립밤을 끝까지 비워내는 삶이란
얼마 전에 본가에 갔을 땐 방문엔 엄마의 숙원사업을 드디어 이뤄냈다.
바로 나 데리고 옷 쇼핑가기.
서울에서 자취하기 시작한 이후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토요일부터 일요일 밤까지다. 주말의 루틴은 똑같다. 일단 집에 들어가면 앓는 소리를 내면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거기엔 내 분신인 노트북과 주말 안에 끝내기 위해 이것저것 가져온 짐(책)이 있다. 씻고 난 뒤, 침대로 직행해서 그 가방을 이틀 내내 풀지도 않고 있다가 일요일 밤에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게 내 주말이었다.
그렇게 와식생활을 하다 밥을 먹으러 거실로 나가면 엄마는 제발 봄 옷 쇼핑을 가자고 구슬렸다. 매일 비슷한 무채색 츄리닝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거슬렸나 보다. 생각해보면 옷장에 난색 계열 옷이 하나도 없어서 매일 우중충한 컬러 팔레트로 차려입기 일쑤였기도 하고.
그렇지만 쇼핑을 가는 건 너무 귀찮았다. 집에 있는 푹신한 내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주말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리고 막상 쇼핑을 갈까 생각을 해 보니 밖에 나갈 만한 일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알바 외엔 집 안에 콕 박혀 있는데 츄리닝 말고 입을 옷이 진짜 뭐가 있단 말인가.
웹 서핑을 하다 예쁜 옷을 보고 살까 싶은 생각을 해 보면 또 한두 번 입고 옷장에서 몇 년간 보존 처리할 게 뻔했다. 이건 다년간 쌓인 경험적 데이터에 의한 결론이었다. 그러느니 그냥 있는 옷이나 잘 입고 말지 뭐.
결국 쇼핑몰에 가긴 했지만 확실히 내 소비 습관은 예전과 달라지긴 했다.
(쇼핑몰에 가게 된 과정도 웃기다. 동생이 디저트를 같이 먹고 싶다고 해서 출발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쇼핑몰 안에 있는 디저트 가게였던 거다. 차에 타고 있어서 내릴 수도 없었다. 동생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애들을 치과 데리고 갈 때 장난감 사준다고 하고 데려가는 것 같다며 놀렸다.)
갓 스물이 되었을 때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 예쁜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남역 지하 상가나 고속 터미널 지하 상가, 그리고 신촌이나 홍대 쪽 번화가는 알록달록한 행거가 즐비했다. 한 번 외출했다 하면 홀린 듯 옷을 한두 장씩 사 오는 때가 있었다. 확실히 그렇게 충동적으로 집어 온 옷들은 오래 가지 않더라. 정전기가 잘 이는 '그 재질'(꽃무늬 블라우스나 프릴이 달린 길거리의 그 옷들.)로 만든 옷은 한두 번 입고는 촌티나 보이거나 구김이 펴지지 않아서 결국 다 처분했다. 하의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살 때는 너무 예뻐 보였던 옷들이 막상 집에 가져오면 어울리는 옷이 없어 또 구석에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옷들은 보풀이 일고 실밥이 터져도 괜찮은 티셔츠나 짧은 츄리닝 바지 정도였다.
그래서 그럴까. 이제 옷을 사려고 하면 오래오래 생각해본다. 집에 그 옷이랑 매치할 만한 다른 옷이 있을까? 내 피부톤이랑 어울리나? 입고 나갈 만한 일이 많을까? (너무 포멀하거나 화려한 걸 고르면 옷 상태와는 별개로 입고 나갈 일이 없어서 또 낭패다.) 재질은 괜찮은가? 가성비는? 내가 평소 입는 스타일과 너무 동떨어졌나? 이렇게 따져 보면 흔쾌히 지갑을 열 만한 옷이 별로 없다.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이다. 길거리 보세 샵들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아울렛에서도 비슷하게 이리저리 따져본다.
생각해 보면 소비의 다른 측면에도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 귀걸이에 엄청 꽂혔던 때가 있어서 외출만 한다 하면 귀걸이를 한두 개 씩 사왔다. 반짝거리고 큰 파츠가 많이 달려 있거나, 장식이 많은 드롭 귀걸이들. 지금 그 친구들은 작은 나무 함에 담겨 화장대 한 구석에서 잠자고 있다.
화장품도 그렇다. 새로 나온 립스틱? 행사하는 로드샵 제품? 세일 사인만 뜨면 올리브* 같은 드럭스토어에서 뭐라도 하나 사오는 편이었는데 화장품을 산 지도 거의 1년이 넘어가는 것 같다. 하루 날을 잡아 안 쓰는 화장품을 정리해서 동생에게 주거나 싸게 팔아버린 적도 있다.
웃긴 건 남들이 미니멀리즘을 지향할 때 나는 여태껏 슈퍼 맥시멀리스트였다는 거다. 아직도 지난 학기 기숙사 룸메이트의 표정이 생각난다. 스킨케어 용품과 세면도구를 전부 화장실 선반에 정리해 놨었는데, 내 물건이 너무 많아서 다닥다닥 몰아놓았는데도 선반의 절반이 안 보이더라. "너 이거 다 써?" 이게 걔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 이사할 때마다 꼭 챙기는 나의 보물상자 속엔 여행갈 때 사온 기념품이나 바다에 가서 주워 온 유리 조각, 조개껍질, 비즈, 그것 외에도 자잘하고 정말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쌓인 각종 프린트물과 필기 노트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뒀다. 그걸 다 꽂으면 책장 두세 칸은 너끈히 채웠다. 일년에 한두번 꺼내보는 그 순간을 위해 나는 내 방의 절반을 물건들로 채워놨던 거다.
도대체 뭘 계기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슈퍼 맥시멀리스트로 사는 건 잠시 정체기를 맞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에 단호하게 NO라고 얘기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미니멀리스트라 하기엔 쌓인 물건이 많고, 굳이 미니멀리스트로 살 생각도 없으니 그건 보류. 정체된 맥시멀리스트라는 말이 지금을 딱 좋게 표현하는 말 같다.
립밤이나 로션을 한 번도 끝까지 써본 적이 없는데 최근 들어 빈 공병이 쌓여간다. 아직은 이게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