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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ul 18. 2024

우리의 역사의식 3

역사의식이 바로 서야 민주주의가 산다. 

 

    

  中은 ‘마을 한가운데에 깃발을 꽂아놓은 모양’을 그린 象形글자라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 꽂혀있는 깃발은 족장이나 제사장의 존재를 표시하는 상징으로 집단원시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거기에 솟대가 있었다. 또 다른 풀이는 ‘일정 부분의 한가운데’를 나타내는 기호로 보는 것이다. 한자의 발달과정으로 보면 시각에 의존하는 象形이 가장 원시적인 글자이고, 指事(지사)는 추상적인 개념까지 기호로 나타낸 글자이다. 상형이건 지사건 지금에 와서는 中은 ‘가운데’라는 의미로 통합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이지만 中國이 정식 국가명칭이 된 것은 20C에야  孫文(손문)이 건국한 中華民國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中國의 역사는 백여 년에 불과하다. 그 전의 中國은 공식적인 국가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칭하는 보통명사였다. 國도 원래 ‘나라’가 아니라 일개 城이나 邑의 의미였다. 國보다는 邦이 더 나라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中國은 본래 국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의 거대한 중국은 中國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이 억지로 합쳐진 衆國(중국)이다. 미국이나 蘇聯(소련)이 합중국인 것처럼 – 그러니 언제든지 다시 갈라질 수 있는 운명이다. 중국이 위그르, 티베트의 독립요구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이유이다.  중국 최대의 적은 내부에 있는 셈이다. 


  中자에 마음 ‘心’이 이어지면 ‘忠’이 된다. 공자는 충이란 자신에 대한 ‘일관된 마음’이라 했고, 맹자는 '변치 않는' 항심(恒心)이라고 했다. 그런데  충이 지금처럼 군주나 상관에 대한 '맹목적 복종'으로 변질된 것은 권력이 후대의 유학자들과 야합한 결과였다. 그러면서 불안했던지 한 자를 더 붙여서 ‘忠誠(충성)’이란 말을 새로 만들어냈다. 誠은 성리학자들이 좋아하던 관념적인 글자였다. 우리 사극에 보면 군사들이 장군 앞에모여서 손을 들어 ‘충’을 외치는데 이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중국이라면 그럴지 몰라도 우리의 군사들이 중국어인 ‘충’을 외쳤을 리 없다. 군주나 지배계층들은 忠을 왜곡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조선 역사에 유난히 반역이 많았던 것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역적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이래 적발한 간첩 중에서 조작된 간첩의 숫자가 진짜간첩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과 이웃에 충실했던 충의 정신은 변질된 충성에 밀려나고 말았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을 목숨처럼 알아야 할 고위 장성들이 하는 짓을 보면 벌레들의 충성(蟲聲)에 가깝다. 구린내를 풍기는 똥별들이 군 기강을 바로잡기에 신명을 바친 의로운 군인을 항명수괴죄로 옭아 넣으려고 해괴한 짓을 하고 있으니 충성이 기가 막힐 일이다. 대통령실이 그 일을 주도했다는 소문도 있으니 대한민국이 기가 막힐 일이다. 

 

 中자에 손 手가 이어지면 史자가 된다. 史란 ‘엄정中立의 관점으로 기록’하는 會意의 글자이다. 그리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史官이라고 했다. 사관은 역사 이래 존중받던 관리였다. 공자도, 노자도 사관 출신들이다. 중국 춘추시대 董씨 삼 형제는 엄정한 史를 기록하기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고 해서 董狐直筆(동호직필)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임금들도 사관을 존중했고, 그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를 넘보지 못하였다. 史는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일이었다. 사마천과 반고는 代를 이어서 正史인 <사기>와 <한서>를 저술했다. 엄정한 사관의 기록이 무서워서 군주들은 언행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알았던 것이다.     


   史를 우리는 흔히 歷史라고 일컫는다. 이 역사는 서양의 History를 번역한 것인데 거기에 과거를 말하는 歷자가 앞에 붙어서 과거지향적인 인상을 주기 쉬운 말이다. 심지어 story는 사실관계까지 보장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라는 말보다는 史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던 이유는 현재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국회나 재판정에서의 속기록(速記錄)처럼 사관은 궁중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초에 충실히 기록했다. 그리고 왕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 사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엄정한 현재의 기록이었다. 절대군주 시대에도 이랬건만 민주주의 시대, 법치와 공정의 시대라고 호언하면서도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무회의 회의록이 없다고 하니 역사가 기막힐 일이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이는 역사를 우습게 보는 짓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권의 입맛대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빈번하니 우리는 역사의식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온 나라가 채상병의 희생에만 몰두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억울하게 희생된 젊은이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부패한 군인들에 의하여 흔들리는 국가안보를 염려해야 옳고, 신명을 바친 의로운 군인을 항명죄로 몰고가는 패역(悖歷)을 응징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나라의 기강이 엉망이 되어도 나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좋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 주인이 되려면 국민 스스로 올바른 시대인식, 곧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위정자들은 국민을 주인은커녕 무지렁이로 취급한다. 교활한 위정자들은 국민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역사를 사유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교육은 민주주의 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이 거시적인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시대를 바로 보고, 올바른 정치인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다.  역사를 歷事라 하지 않고 歷史라고 쓰는 이유는 역사가 단순한 사실이나 지식이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대립도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신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진영논리, 지역감정에 빠져서는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없다. 지금처럼 다수가 소수에 제압당하고 무기력해서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에 부끄러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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