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으로 산다는 것
"생각할 ‘고考’ 자는 늙을 ‘노老’ 자의 밑 부분인 ‘비匕’를 살짝 뒤집은 글자라서 재미있습니다."
"흔히 나이가 많으면 노인이라고 하지만 나이는 노인을 결정짓는 관건이 아닙니다." 노련老鍊, 노숙老熟, 元老는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니라 능숙, 침착, 모범, 여유를 말합니다. 노자老子는 늙어서가 아니라 도道를 깨우쳐서 노자老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나이나 사람과 관계없이 형용사가 아닌 접두사 노老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노파老婆는 늙은 여자가 아니라 젊었어도 아내이고, 늙지 않았어도 사장이면 노판老板이고, 쥐새끼라도 노서老鼠입니다. 사고思‘考’할 줄 알아야 제대로 된 ‘老’人이니, 老는 지혜와 현명과 노련老鍊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그냥 늙은이일 뿐이지요. 그러고 보니 한자말은 높임말이 되고, 고유어는 낮춤말이 되는 우리말의 폐단을 반복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립니다. '고맙다'보다는 '感謝하다'가 더 고마운 것처럼- 그러나 한자가 아니라면 이런 정심한 언어소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논란이 많지만 65세를 넘으면 노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법이란 바뀌면 그만이고, ‘인생은 60부터’ ‘70 청춘’이라는 말도 있고, 젊은이 못지않게 노익장을 자랑하는 늙은이도 적지 않다면 나이를 가지고 노년을 말하는 것은 역시 옳지 않습니다. 노인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늙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것이어서 위험합니다. 나이는 잊더라도 노년의 경륜과 노련을 모르면 철 모르는 늙은이일 뿐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일터에서 쫓겨난 딱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일단 ‘사회 일선에서 물러난’것에 대해서 서운해하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정년퇴임은 객관적으로 기운과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판단한 결과이지만 당사자들은 대부분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만큼은 아직도 젊은이를 능가하는 경륜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설사 정년연장이 되더라도 나잇값을 못하는 노인들에게는 무리하게 ‘왕년의 모양새’를 지켜내기에 애쓰기보다는 여유 있는 ‘삶의 자유’가 훨씬 좋을 것입니다.
"노년이란 노인의 나머지 인생이요, 동시에 인생의 대전환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라기보다는 살아온 인생의 정리요, 다가올 죽음에 대한 준비기간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삶의 일선에서 물러났다면 세상의 문제는 후세에 맡기고, 이제는 자신의 문제에 힘써야 할 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년에는 분투, 치열, 경쟁, 성취, 의지, 혈기는 더 이상 적합하지도,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물론 노익장을 외치며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지도 충분한 가치가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순리는 아닐 듯합니다. 순리를 어기면 편안한 노년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보다는 지족知足, 평안, 성찰, 근신, 신중, 양보, 배려, 관용, 기다림 등이 노년에 더 적합한 단어들일 것입니다. 젊을 때의 생존법이 있고, 늙어서의 생존법이 따로 있는 법이죠. 젊을 때는 맹자처럼 맹렬하게 살다가, 늙어서는 노자처럼 노련하게 보내다가, 죽을 때는 부처처럼 부지런히 가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야 좋겠지만 후대의 수범은커녕 꼰대가 되어 미래사회와 젊은이들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노년이 아니라 망년(妄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저께 벌어진 희대의 계엄령사태도 알고보면 망년들이 젊은이들에게 지어준 짐입니다. 사는 일에 묻혀 허둥대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의미도 모르고, 죽음에 대한 의연한 소신도 마련하지 못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년은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노년老年은 그냥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인생을 경험한 소중한 결과여야 합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60여 년에 걸쳐 생생하게 경험하여 얻은 지혜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60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사람은 죽기 위해 산다’는 말이 헛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인생역정은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요, 노년은 장차 죽기 위한 마지막 정리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년에 이른 것은 늙었다는 서러움보다는 죽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는 데에서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요절, 병사, 횡사한 사람은 꿈도 꾸어보지 못할 행운을 누리면서 불평불만을 갖는다면 배부른 투정이요, 사치가 아닐까? 더구나 요즈음 같은 노령화사회에서 고용불안의 시대, 청년 미생의 시대, 환경파괴의 시대, 독성 미세먼지의 시대, 기후변란의 시대, 性정체성 혼란의 시대, 인간성 상실의 시대, 도덕윤리 해체 시대에 젊은이로 살기보다는 노년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젊었을 때보다 훨씬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다소간의 물질적 편리로 옛날에 우리가 누렸던 정신적 여유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의 풍요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행복까지 주지는 못 합니다.
만약 편리와 행복을 고를 수 있다면 당연히 행복을 잡을 것이고, ‘편리한 젊음’보다는 불편하더라도 ‘행복한 노년’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젊은이를 부러워하기보다는 하루라도 일찍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